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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가책방 Oct 17. 2016

삶은 죽음으로 가는 미로다.

주제 사라마구 『죽음의 중지』


한 사람이 태어나 죽기까지, 삶은 한 순간의 예측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몹시 복잡하고 또 어지럽게 흘러갑니다. 하지만 모든 사람,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태어난 사람은 반드시 죽음에 이르게 되죠. 삶이라는 미로가 그렇게 복잡한데도 말입니다. 

 몸이 불편한 사람이든,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든, 말을 못 하는 사람이든, 건강한 사람이든 죽음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해 세상에 머무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간단히 한 문장으로 적으면 이 정도가 되겠죠.


"모든 사람은 죽는다."


네, 모든 사람은 죽습니다. 

사람뿐만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에서부터 우주까지, 생명이 있는, 살아있는 모든 것은 결국 죽습니다. 죽지 않는 건 살아있지 않은 존재들 뿐이죠. 

예를 들면, 신이나, 악마, 죽음 같은 것 말입니다.


 주제 사라마구의 작품에는 일종의 '재앙'이 느닷없이 시작되었다가, 예고 없이 끝이 나는 일이 자주 일어납니다. 유례없는 재앙이라는 극한의 상황에서 인간과 사회와 국가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인간의 본성이 어떤 것인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일 겁니다.

『죽음의 중지』에서도 재앙이 찾아옵니다. 한 때는 눈이 멀었던 도시, 그 나라에 다시 새로운 재앙이 시작된 거죠. 이번 재앙의 정체는 제목과 소설의 첫 문장을 통해 거듭 명시됩니다. 

 소설의 첫 문장입니다.

다음날, 아무도 죽지 않았다.
『죽음의 중지』中

'아무도 죽지 않는 것', 이것이 재앙의 정체입니다.

이상하게 생각하는 분도 적지 않을 겁니다. 죽지 않는다는 것은 곧 '불사(不死)', 죽지 않는다는 것 아니냐며, 죽지 않으면 그건 재앙이 아니라 축복이 아니냐고 할 수도 있습니다. 

 저마다 세상살이의 경험이 있을 테니 알고 있을 겁니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을 뿐 아니라, 좋기만 한 것 역시 없다는 것을요. 세상이 그렇게 순진하고, 친절하지 않다는 것도 말이죠. 

 네, 그렇습니다. 분명 죽음은 중지됐습니다. 하지만 나이 들거나, 병이 들거나, 사고가 나서 혼수상태에 빠지거나, 다치거나 하는 것까지 멈추지는 않습니다. 사고로든 병으로든 고통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죽음이 다시 시작될 때까지, 어쩌면 영원히 멈추지 않는 고통 속에서 살아 있는 시체처럼 살아가야만 하죠. 


 이야기는 새해의 첫날인 1월 1일에 시작됩니다. 어느 해 1월 1일부터 갑자기 아무도 죽지 않게 된 겁니다. 임종을 앞둔 환자들, 노인들이 죽기를 멈춘 것은 물론이고, 사고로 중상을 입어 죽지 않을 수 없는 상태에 있는 사람 역시 죽지 않습니다. 처음 며칠 동안 사람들은 갑자기 얻은 불사, 불멸에 어리둥절 하면서도 기뻐합니다. 하지만 곧 아무도 죽지 않는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깨닫게 되죠. 회복되는 것도, 젊어지는 것도 아닌 상태에서, 늙고, 병들고, 결국에 움직일 수 없게 되었음에도 죽지 않게 되는 게 인간에게 얼마나 괴로운 일인지 말입니다. 

 정부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경제의 구조가 변하고, 종교는 갑작스러운 존폐의 위기에 몰리기도 하며, 병원과 요양 시설들은 시설의 부족에 따른 대책을 요구하고 나오니 마찬가지로 경험이 없는 정부도 당황할 수밖에요. 

 놀라운 건 '죽음의 중지' 현상이 이 나라에서만 일어나는 부분적인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국경만 넘어가면, 이 나라에서는 죽을 수 없던 사람도 죽을 수 있게 되죠. 이 사실이 알려지자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국경을 넘어 죽음을 되찾습니다. 마피아는 이 기회를 잡아 정부와의 뒷거래를 통해 돈벌이에 나서기도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방송국으로 자주색 편지가 배달됩니다. 그 편지에는 충격적인 내용이 담겨 있었고, 죽음이 중지된 이 나라는 다시 한번 혼란에 휩쓸리게 됩니다. 


 인간은 피할 수 없는 죽음, 아무도 죽지 않는 세상.

그런 세계의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한 번 읽어보세요. 이 이상의 스포일러는 하지 않을 테니까요.


 흔히 인간을 필멸자(必滅者)라 합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라는 말도 있고요. 

본격적으로 철학을 파고들지 않더라도, 세상을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단 한 번도 죽음을 생각한 적 없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특별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더라도 죽음을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을 거고요. 실제로 죽음은 무섭고, 두렵기 마련입니다. 삶과 죽음을 양쪽 저울에 올려놓는다고 했을 때, 죽음을 택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오히려 의학의 발달과 함께 평균 수명이 늘어났음에도 더 오래 살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동물인걸요.


주제 사라마구의 또 다른 소설『눈먼 자들의 도시』는 이 나라를 눈멀게 했던 원인이 무엇인지, 원흉은 누구인지 알려주지 않은 채 끝이 납니다. 그런데『죽음의 중지』에서는 죽음을 멈춘 존재인 '죽음'이 등장합니다. 앞에 적었던 방송국으로 편지를 보낸 존재가 바로 '죽음'이었지요. 

 죽음은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에게 죽음을 보내왔습니다. 언제부터였는지, 누가 시켰는지를 잊어버릴 만큼 오랫동안 계속해 온 거죠. 그런 죽음이 죽음을 중지시킨 이유는 어떻게 보면 유치하고 또 단순합니다. '죽음'의 말을 들어보죠.

이제 내가 잠시 활동을 중단했던 이유, 죽이기를 그만둔 이유, 상상력이 풍부한 옛날의 화가나 판화가들이 늘 내 손에 쥐어주었던 상징적인 큰 낫을 내려놓았던 이유를 설명해야겠군요, 그건 나를 그렇게 혐오하는 사람들에게 언제까지나 산다는 것, 영원히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맛을 좀 보게 해주려는 것이었어요, 물론 우리끼리 이야기입니다만, 언제 까지나라는 말과 영원히라는 말이 우리가 흔이 믿고 있는 것처럼 동의어인지는 잘 모르겠다는 걸 솔직히 고백해야겠군요,
『죽음의 중지』중

걸작이죠. 죽음이 '죽이기를 그만둔 이유'가 죽음을 미워하고 혐오하는 사람들에게 영원히 산다는 것의 의미를 맛 보여주고 싶었다는 말. 우리는 정말 언제까지나, 영원히 산다는 것의 의미를 알 수는 있는 걸까 싶습니다. 

 단순히 생각하면 영원히 사는 것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것보다 행복할 것만 같아요. 하지만 단지 언제까지나, 영원히 삶이 이어질 뿐이고 거기에 어떤 목표도 없다면, 즐거움도 없다면 영원히 사는 것에 의미가 있을까요. 

 숨이 끊어지지 않았고, 심장이 뛰고 있을 뿐, 흔히 '인간다운 삶'을 조금도 누릴 수 없는 상태에 있다면, 살아도 살아있다고 할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묻는 것만 같습니다. 

 

 저는 아직까지 죽음으로부터 심각한 위협을 받아본 적은 없습니다. 가장 가까이 왔던 일이 동생이 오토바이 사고를 당해 수술 닷새만에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일과 새벽기도를 가시다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외할머니 정도죠. 죽음이 코 앞에, 바로 곁에 있는 것을 보면서도 두려워하거나 떨리지 않았습니다. 그 죽음은 저를 찾아온 게 아니라고 생각했던 거죠. 나쁘지만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이 죽음은 나의 것이 아니다'라고요. 


 모르는 이의 죽음이나, 이름만 아는 이의 죽음은 거의 무감각하게 흘려보내게 됩니다. 죽음은 언제나 곁에, 주변에 있지만 모르거나, 모른 척하고 살아가는 거죠. 나만은 영원히, 더 오래 살 수 있을 것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죽음이 저를 찾아오면 죽음을 거부하고 미워하고 저주하며 이렇게 외치겠죠. 

"왜 하필 나야!!"

죽음이 다른 사람을 찾아갔을 때는 그렇게 태연하고 냉정했으면서, '사람은 결국 다 죽는 거지'하는 식으로 철학 운운했으면서 분명 악이라는 악은 다 쏟아낼 기세로 죽음을 거부할 거라는 겁니다. 인간이니까요.


죽음 이야기를 하다가는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으니 이제 마무리를 해볼까요.

『죽음의 중지』의 감상을 쓰면서 지금껏 내내 죽음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마지막까지 읽어본 결과 『죽음의 중지』는 단순히 삶과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고 느꼈습니다. 삶과 죽음을 이분법으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변수로 '가능성'이라는 것을 집어넣은 겁니다. 

 분명 죽음은 반드시 찾아옵니다. 하지만 '언제'라고 정해져 있지는 않죠. 또한 '누구에게'라는 것도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언제'라는 때와 '누구에게'라는 대상이 정해져 있지 않기에 우리는 터무니없는 희망에 부풀지도, 빠져나올 수 없는 절망에 빠지지도 않을 수 있습니다. 죽지 않는 사람은 없지만, 지금 혹은 내일 누가 죽을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 감상의 마지막에 적은 말은 '사랑해야 한다'였습니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좀머 씨 이야기』에서는 죽음으로부터의 도망을 그치는 것에 대해 적었지요. 

 둘을 합치면 그럴듯한 결론이 나올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두려움으로 도망치기를 그치고, 사랑해야 한다."하는 식으로 말이죠.


사실 『죽음의 중지』에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잔뜩 있습니다. 하지만 소화하지 못한 걸 억지로 꺼내려고 하면 배탈이 날 것 같아 더 쓸 수가 없군요. 죽음 앞에서는 정부도, 종교도, 보험회사도, 마피아도 무력합니다. 그들은 무엇도 책임져 주지 못합니다. 그들도 결국 죽음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니까요.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죽음은 면죄부가 아닙니다. 죽으면 다 끝난다고, 그러니 무책임해도 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죽음조차 당신의 그 무엇도 짊어질 의무가 없습니다. 스스로가 맺은 것은 스스로 풀고 가도록 애쓰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 노력이 삶의 끝에서 마주친 죽음이라는 미로를 빠져나가는 최상의 마무리가 되어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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