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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가책방 Oct 19. 2016

알리사. 네가 틀렸어, 우리는 행복하려고 태어났는 걸.

앙드레 지드 『좁은 문』

 지금 하려는 말이 오만하다 여길 사람도 있겠지만 몇몇 순간을 제외한 평생의 시간 대부분을 선량하고 예의 바르기 위해, 선하고 무해한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해 낭비했습니다. 

 잘못 읽지 않으셨어요. '낭비'라고 적었습니다. 

 낭비라는 말은 필요 이상으로 써버리는 일을 가리키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의 낭비입니다. 

어느 날에는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너의 선량함, 예의, 선함, 무해함을 도대체 누가 바랐는가?"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깎고, 꺾어, 굳이 힘들고 좁은 길로 나아가려는 건지 도무지 알 수 없게 되었던 겁니다. 그렇게 해서 남은 것이 기쁨과 행복과 보람이었다면 이런 물음을 던질 일도 없었겠지만, 실제로 남은 건 상실감뿐이었으니까요. 


 웃기는 일인데, 지금에는 적당히 무례하고, 생각 없는 말을 던지려고 하는 편입니다. 더 웃기는 건, 예의를 차리는 일이 습관이 되어서는 큰 마음을 먹어도 좀처럼 무례해지는 것도 쉽지가 않다는 겁니다.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이죠. 

 무례해지려고 한다는 게 막말을 한다거나, 불쾌한 행동을 한다거나 하는 건 아닙니다. 예의를 차린다고 하는 일이 오히려 무지의 힘을 입어 더 큰 무례가 되는 일이 적지 않았고, 예의상 거절하지 못했거나 하는 일들로 더 큰 잘못을 저지르는 걸 그만두기 위해 애쓴다는 말이지요. 


 지난 시간을 돌아보며 절실히 깨달았던 것 중 하나는 '나의 미덕'이 '타인의 미덕'은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나의 호의가, 선량함이, 예의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호의로, 선량함으로, 예의로 받아들여지는 건 아니라는 거지요. 오히려 충족시키지 못할 기대감을 품게 했다가 더 큰 실망과 원망으로 돌아오는 일이 적지 않았습니다. 나약한 친절, 선량함, 예의가 독이 되었던 거죠. 

 세상을 향한 미덕을 철회한 것이 아니라, 진짜 미덕이 무엇인지 생각하기 시작한 겁니다. 나와 세상 모두를 위하는 미덕은 최고의 미덕이 될 수 있겠죠. 하지만 모두를 위할 수 없다면 세상보다는 나를 위하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을 희생하면서 발휘하는 미덕은 그 순간은 행복하고 만족스러울지 모르지만 결국 누구도 행복하게 만들지 못한다고 생각하니까요.


 앙드레 지드의 『좁은 문』은 '미덕'에 대해 이야기하는 작품입니다. 

신앙의 미덕과 형제자매의 미덕, 양보의 미덕, 사랑의 미덕으로 가득 차다 못해 넘치는 이야기죠. 하지만 절대적인 미덕의 추구, 극단적인 인내는 슬픈 결말 밖에 가져오지 못합니다. 『좁은 문』의 주요 등장인물 중, 누구도 좁은 문 너머에 있는 행복에 이르지 못하는 것처럼요.


 『좁은 문』의 주요 등장인물은 제롬, 알리사, 쥘리에트입니다. 알리사와 쥘리에트는 자매이고 제롬은 두 사람의 외사촌입니다. 한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제롬과 알리사는 서로 좋아하는 사이이고, 더 자라면 분명 결혼하게 될 터였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생기지요. 알리사가 쥘리에트 역시 제롬을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아버린 겁니다. 그전까지는 제롬이 보내는 사랑의 메시지에 사랑으로 답하던 알리사는 갑작스럽게 냉담해지며 거리를 두기 시작합니다. 마치 여동생을 위해 사랑을 포기하려는 것처럼 보이죠. 그런 언니를 보는 쥘리에트는 나름의 결단을 내립니다. 자신에게 들어온 청혼을 받아들이고, 말릴 틈도 없이 결혼해서 집을 떠나버린 겁니다. 

 아, 알리사가 조금만 더 자기를 생각할 줄 아는 이기적인 사람이었다면 잠시 동안은 괴롭겠지만 제롬과 행복한 생활을 하며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해나갈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알리사는 너무나 착하고, 선량했을 뿐 아니라 미련스러울 정도로 고집스러웠죠. 마침내는 제롬의 곁을 영영 떠나 수도원에 들어가 버리고 맙니다. 

 제롬 역시 집을 떠나 전장으로 해외로 떠돌아다닙니다. 어디서도, 누구의 곁에서도 안정을 찾지 못한 채로요. 알리사는 수도원에 있는 동안 몸도 마음도 약해져 갑니다. 이룰 수 있었지만 이루지 못한 사랑에 아파하고 그리워하면서도 마지막까지 솔직해지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점점 신에게 가까이 다가가려 애씁니다. 선함과 미덕과 구원의 상징, 그 성스러운 세계로요.


 『좁은 문』을 처음 읽은 건 고등학교 때였습니다. 그때도 읽는 내내 답답해서 속이 터질 것 같다고 생각했지요. 알리사의 태도에 화가 나기도 했습니다. 언니를 잘 알면서도 혼자 책임지겠다는 식으로 일을 저질렀던 쥘리에트를 미워한 건 당연했고요. 제롬의 답답함도 알리사의 답답함 못지않았습니다. 정말 읽고 있으면 부글부글 끓어서 폭발할 것처럼 되어버렸으니까요. 

 이 답답한 이야기를 마지막까지 읽을 수 있었던 건 '좁은 문'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하는 말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알리사가 그랬던 것처럼 그때의 저 역시 좁은 문이 가리키는 방향만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거죠.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좁은 문』中


넓은 문은 들고 나기가 수월하지만 생명이 아니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이라는 말.

이 말은 '나는 특별한 사람이다'라고 믿는 마음, 그렇게 믿고 싶은 마음을 강하게 사로잡았습니다. 그래서 답답해서 미칠 것 같으면서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거죠.

 십 년 도 더 지나서 다시 읽었음에도 알리사가 마지막까지 추구했던 '좁은 문'의 진정한 가치를 깨닫는 데는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번에는 조금 더 수월하게 읽었을 뿐, 세 사람의 운명이 가리키는 곳에서 무엇을 생각해야 하고, 어떤 것을 얻어야 하는 건지 이해할 수도 없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던 겁니다. 

 여전히 알리사는 미치도록 답답하고, 제롬은 화나도록 답답하고, 쥘리에트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상태 그대로입니다. 


 제롬은 알리사에게 '인간의 영혼이 행복 이외에 더 무엇을 바라야 하느냐?'고 물었고, 알리사는 '성스러움,,'이라고 답합니다. 제롬은 좌절하면서도 알리사에게 매달리고, 애원하지만 알리사는 점점 더 자기 안의 성스러움으로 파고듭니다. 그 좁고, 좁다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자신의 전부나 다름없던 제롬조차 내려놓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처럼요. 


 제롬이 이렇게 행동하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나는 이틀 후에 퐁괴즈마르를 떠났다. 그녀와 나 자신에 대한 불만과 내가 그때까지 '미덕'이라 부르던 것에 대한 막연한 증오심, 내 마음속에 늘 자리 잡고 있는 집념에 대한 회한으로 가득 찬 채였다. 그 마지막 만남에서 내 사랑을 과장되게 표현하느라 내 모든 열정을 소진해 버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처음부터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알리사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나의 항변이 끝난 연후에도 여전히 생생하고 기세 등등한 채로 내 마음속에 남아 사라질 줄을 몰랐다. 그래, 그녀가 옳았어! 나는 환상을 소중히 여겼던 거야.
『좁은 문』中

 제롬은 자신의 알리사를 향한 사랑을 '환상'이라고 생각해 버립니다. 지금까지 사랑이라 믿어왔던 모든 것이 끝나고, 지극히 평범하고 하찮아서 의미 없는 감정만이 남았다고 믿어버리는 거죠. 알리사가 워낙 단호하게, 반복적으로 거절한 것도 있지만 실제로는 제롬 자신이 지쳤던 것이었을 겁니다. 알리사의 진심을 알면서도, 알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진심이 아닐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더는 '미덕'을 계속하고 싶지 않았던 것 아닐지. 무한한 노력을 요구하면서 동시에 끝없는 고통을 안겨주는 그 미덕이라는 좁은 문으로 나아가기를 그치고 말았던 것이겠지요.


 구구절절 잔뜩 늘어놓았지만, 시작하면서 늘어놓았던 '무례해지기로 했다'는 생각은 제롬이 결국 '미덕'이라 믿었던 것들을 증오하는 결과에서 나온 결심이었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뿐입니다. 고작 이 말을 하려고 이렇게 잔뜩 늘어놓아야 했느냐고 묻는다면, 겸사겸사 그랬다고 밖에는 할 말이 없네요.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이 있을지 모르니 제롬의 입장에서 내린 결론도 적어보기로 합니다.

 제롬의 행복, 기쁨은 오직 알리사에게 달려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알리사야 말로 제롬의 미덕 그 자체였고, 목적이었던 거죠. 하지만 그녀가 사라지면서 미덕의 가치 역시 사라지게 됩니다. 남은 건 증오와 후회뿐이었죠. 물론 후회는 과거 미덕이라 믿었던 것에 대한 것보다 알리사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던 단단하지 못했던 자신의 마음과 행동에 대한 후회가 더 컸을 겁니다. 어쩌면 뒤틀린 생각일 수 있겠지만, 그래서 영영 괴로워할 길을 선택했던 거겠죠. '좁은 문'의 환영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로요. 


 '좁은 문'의 의미는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습니다. 금욕적인 생활, 성실함, 절제나 절약, 잘못을 저지르지 않으려는 도덕적인 결벽, 악을 피해 다니는 선함, 실수 없는 완벽함 같은 것들 모두 하기 힘든, 어려운, 좁은 길을 가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죠. 

 보통의 사람들은 잘못을 하더라도 실수였다 거나, 미안해하지도 않으면서 겉으로나마 미안하다고 하거나, 거짓인 줄 알면서도 속이거나 모른척하는 일을 자주는 아니더라도 종종하게 마련입니다. 정말 큰 잘못이나, 결정적인 일이 아니면 다른 사람들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곤 하죠. 사람이니까 그럴 수 있고, 자기도 언제 그럴지 모르는 거니까요. 하지만 좁은 문으로 다니는 사람들은 그 모든 일, 사소한 것 하나까지가 괴로움이고 고통이 됩니다. 그래서 어렵고 힘들더라도,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길을 선택하지요. 좁고, 힘들지만 성스러운 길을요. 


 사실 지금도 '좁은 문'으로 통하는 길을 완전히 포기하지는 못했습니다. 아무렇지 않게, 태연하게 그럴 수는 없는 일을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마음이 늘 한 구석에 남아 있는 거죠. 거짓을 미워하고, 거짓말하는 일에 괴로워하고, 자기 편하자고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주는 무례한 인간들에 눈살을 찌푸리거나 화를 내고, 나 자신이 누군가에게 피해를 준 일을 두고두고 벌하는 버릇도 다 버리지 못했고요.


 엉뚱한 이야기지만 결론은 자기의 행복이 누군가에게 결정적인 불행이 되지 않는다면, 행복을 포기하지 말라는 겁니다. 미덕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형식이고, 상징에 불과하다고 생각해요. 정말 중요한 것은 미덕을 행하는 목적입니다. 선량하게 사는 것으로, 예의 바르게 행동하는 것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면 그렇게 하면 되겠죠. 결국 다 행복하자고 하는 일이니까요. 

 만약 자신이 추구하는 미덕이 행복을 해친다면, 그것은 이미 미덕이 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타인을 위해, 누군가를 위해, 세상을 위해 자신의 행복을 포기한다고 해서 행복의 총량이 늘어나는 것도, 세상과 그들이 절대적으로 행복해지는 것도 아님을 아는 것은 무척 중요합니다. '나'는 어디까지나 '나 자신'에게만 유의미한, 결정적으로 의미가 있는 존재입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고 해도 그 사람의 삶을 결정짓는 건 타인인 나가 아니라 그 사람 본인이라는 거죠. 그렇기에 나의 결정적인 행복을 양보함으로써 타인의 완전한 행복을 만들겠다는 건 그야말로 환상에 불과한 일입니다. 인간이 지상에서 하늘의 영광과 성스러움을 실현할 수 없는 것처럼 처음부터 한계가 명백한 일이라는 거죠.


 이 세상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성스러움이나, 미덕이 아니라, 잘 사는 일입니다. 한국을 비롯한 동양에서 '행복'이라는 단어, 표현의 역사는 극히 짧다고 합니다. 길어도 수백 년 밖에 되지 않았다는 거죠. 하지만 행복의 역사가 길건 짧건 우리는 행복하게 살기를 바랍니다. 

 크고 넓은 문이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로 통한다고 해도, 홀로 생명으로 통하는 길을 가는 것보다 나은 순간도 분명 있을 겁니다. 그래서 저는 적당히 예의 바르면서도 무례해지기도 하면서 넓은 문과 좁은 문을 이리저리 오고 가기로 했습니다. 

 앙드레 지드가 『좁은 문』을 통해 전하려고 했던 메시지에게는 미안하지만, 아무래도 지금은 이렇게 하는 게 더 행복하니까요. 스스로가 믿는 미덕을 추구하는 것도 좋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너무 몰아붙이지는 말았으면 합니다. 홀로 생명으로 나아가는 것보다, 함께 멸망으로 나아가는 길이 더 즐거울지도 모르잖아요. 

 아직 아무도 가보지 않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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