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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가책방 Oct 23. 2016

인생은우리가사는그것이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다

파스칼 메르시어 『리스본행 야간열차』


 감상문에 붙이는 제목만큼은 직접 지으려고 애쓰는 편입니다. 그런데 감상문의 제목이 종종 책 속에 담긴 말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때가 있어요. 그럴 때는 어쩐지 무기력하고, 쓸쓸하면서, 서글퍼지고 말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기에 그 표현을 가져다 쓰곤 합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작가 '파스칼 메르시어'는 스위스의 철학자로 본명은 '페터 비에리'입니다. 파스칼 메르시어는 필명이죠. 언어 능력이 부족한 관계로 무슨 뜻인지는 모르지만, 의미심장할 것 같다는 생각 정도는 하게 되네요.


 제목이 뭐라고 제목 이야기로 감상문을 시작하냐고 묻는 분은 아마 없을 테지만, 제게는 조금 중대한 문제였습니다. 아주 사소하지만, 대단히 중대한 문제였던 거죠. 본격적으로 책 얘기를 하기 전에 잠깐 푸념 혹은 한탄을 좀 늘어놓아야겠습니다.


 저는 연약한 사람입니다. 얼마나 연약한가 하면 세상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스스로 무너질 만큼 연약하죠. 하지만 그렇게 연약한 제게도 끈기나 인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얼마만큼은 남아있습니다. 그 끈기와 인내가 오늘까지의 저를 있게 지켜준 힘이지요.

 모래성이나 모래집을 지어본 분들은 아실 거예요. 모래성을 쌓아 올릴 수 있게 해주는 원동력이 물이라는 사실을요. 잊어서는 안 될 중요한 교훈 하나있어요.

 무엇이든 그 무엇을 성립시키거나, 지키거나, 존재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동시에 그 무엇을 무너뜨리거나, 해치거나, 사라지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는 거예요. 모래성을 지을 수 있게 해주는 힘은 물에서 오지만, 그 모래성을 무너뜨리는 것 역시 파도 혹은 비와 같은 물이니까요.

 저는 연약합니다. 하지만 그 연약함이 있기에 끈기와 인내가 빛을 발할 수 있고, 동시에 연약함으로 무너지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하려던 거였습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늘어놓는가 하면 저와 『리스본행 야간열차』라는 작품의 관계가 마치 모래성과 물의 관계 같다고 느꼈기 때문이에요. 말로만 듣고 읽기를 미뤄오던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읽기 시작하며 정말 많은 순간 기쁨과 놀라움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좌절할 수밖에 없었어요.

 아주 오랜 시간 고민하고 생각해왔던 삶의 문제들이, 그 풀리지 않던 난제들이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등장하고, 언어의 천재들의 이야기를 통해 풀어지는 모습을 목격해야만 했으니까요. 더는 고민할 필요가 없이, 이 책을 몇 번쯤 더 읽으면 삶의 문제들 대부분이 풀려버리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허허로워졌던 겁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읽는 동안 인간의 존재에서 믿음과 이해에 이르기까지, 삶의 거의 모든 요소가 이 책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 두 사람의 삶을 통해 적나라하게 해체되었다가 다시 완성되고 있다고 느꼈어요. 조금 과장하자면 평생을 바친 연구의 결과가 알고 보니 이미 오래전에, 수백 년쯤 전을 살았던 사람이 풀어낸 결과와 같다는 것을 알아버렸을 때의 허탈함 같은 걸 느꼈던 겁니다.


 "이 책만 읽으면 된다면, 나는 이제 뭘 생각하고, 뭘 써야 하는 걸까?"

웃기지도 않는 고민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제게는, 적어도 연약하기 짝이 없는 제게는 너무나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감상문의 제목을 적으면서 쓸쓸해할 수밖에 없었던 거예요.

 고작, 제목을 이야기하는데 수백 자나 허비해야 하다니, 이것도 정말 민폐가 따로 없군요.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읽고, 동명의 영화도 봤습니다. 두 작품은 서로 비교할 수 없는 것이더군요. 원작을 읽은 제게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너무나 허술하고, 달콤하기만 한 솜사탕처럼 느껴졌습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진정한 면모가 궁금하신 분들은 꼭, 원작을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이제 책 이야기를 시작할게요. 하지만 조금만 하고 그만 둘 겁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 는 한 번 읽은 것으로는 이 책을 이해했다고, 뭘 말하는지 알겠다고 확실히 이야기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이야기라서요. 조금 더 많은 이야기를 하는 건 두 번째나, 세 번째쯤 읽고 난 후로 미뤄둘게요.


 이야기는 스위스의 베른에서 고전어를 가르치는 그레고리우스가 늘 학교로 가는 다리 위에서 한 여자와 만나면서 시작됩니다. 편지를 읽고 있는 것처럼 보인 이 여자는 마치 다리 위에서 강으로 뛰어내릴 것처럼 보였고, 그레고리우스는 이 여자를 구합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이 여자는 자기를 구한 그레고리우스의 이마에 펜으로 전화번호를 적고, '편지를 버리며 기억하지 않으려 했는데, 이제는 잊어버리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랬다며 미안하다고 사과를 합니다.

  고전어에 능한 것으로 문두스(세계, 우주, 하늘 등의 뜻을 지닌 라틴어)라고도 불리는 그레고리우스는 칸트만큼은 아니지만 거의 늘, 항상, 같은 시간에 학교에 출근하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날은 그 여자 때문에 늦게 되죠. 이때만 해도 그레고리우스는 잠시 후 자신에게, 일어난 적도 없었고, 앞으로도 절대 일어날 리 없던 긴 여행이 시작될 거라는 걸 알지 못했습니다.

 수업이 시작되고, 여자는 사라집니다. 그레고리우스는 어쩐지 여자가 쓴 포르투갈 어의 울림을 잊지 못하고 수업 중에 학교를 빠져나와 에스파냐 서점으로 가죠. 거기서 아주 우연히 구하게 되는 책이 『리스본행 야간열차』의 근원이 되는 아마데우 이나시오 드 알메이다 프라두가 쓴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책입니다. 포르투갈 어를 모르는 그레고리우스지만 당장 어학 교재를 사서 듣고 공부를 하며 책을 번역해 읽기 시작합니다.

 네, 천재죠. 천재적입니다. 고전어에 능하다고 하지만 지금까지 익힌 적 없는 언어를 사전과 교재에 의존해서 아주 빠른 시간 동안에 익히고, 번역까지 할 수 있게 되는데 천재라는 말 외에 어떤 표현이 어울리겠어요.

 그레고리우스는 『언어의 연금술사』에 푹 빠지게 됩니다. 정확히는 『언어의 연금술사』를 쓴 작가인 '아마데우 프라두'라는 사람에 대해 알고 싶어 하게 되죠. 그래서 떠납니다. 아주 갑작스럽게, 연락도, 예고도 없이, 가장 먼저 출발하는 열차를 타고 아마데우 프라두가 있을 리스본을 향해서요.

 리스본에 도착한 그레고리우스는 아마데우 프라두의 책을 단서로 추적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아마데우 프라두는 이미 오래 전에 죽었다는 걸 알게 돼죠. 리스본의 역사와 남겨진 사람들을 통해 아마데우 프라두를 알아가는 동안 그레고리우스는 지금까지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나'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몰랐던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삶에 대해, 관계에 대해, 죽음에 대해, 사랑에 대해, 믿음에 대해, 행복과 불행에 대해, 인간에게는 불가능할 것 같은 이해에 이르기까지. 인생에 가득 차고 넘치는 난제들을 하나하나 격파해나가는 겁니다. 이 격파의 과정은 전혀 통쾌하다거나 시원한 것은 못 됩니다. 그러나 무의미하지도 않죠. 그것이 인간이니까요.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한 번 읽고 난 후에 제가 내린 결론은 이 감상문의 제목과 동일합니다.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다.
『리스본행 야간열차』中

꿈을 꾸는 일, 이상적인 삶을 그리는 일, 상상하는 일은 의외로 헛되거나 허황된 것만은 아닙니다. 소위 현실 주의자들은 헛된 꿈에, 이루어질 수 없는 이상에, 일어날 리 없는 상상에 시간이나 노력을 낭비하지 말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런 노력, 애쓰는 과정이 무의미한 것으로 정해져 있다는 걸 그들이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똑같은 현재를 살아가고 있는, 지금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미래를 어떻게 단정할 수 있는지 오히려 그것을 되물어야만 합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읽으며 많은 문장, 표현을 발견했어요. 그 문장들을 다 늘어놓을 수도 있겠지만, 아마 그건 시간낭비 밖에 되지 않을 겁니다. 몇 군데만 담아 보여드리는 걸로 대신하기로 할게요.


'이름이 뭐지? 이름은 다른 사람들이 우리에게,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입히는 보이지 않는 그림자다. 기억나니?'
『리스본행 야간열차』中

사람에게는 누구나 저마다의 '이름'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이름이 오직 하나인 건 아니죠. 이름은 부르는 사람마다 달라질 수 있습니다. 의미도 달라지고요. '보이지 않는 그림자'라는 표현, 깊이 와 닿지 않나요.


사람들은 침묵을 견디지 못한다. 프라두의 짧은 글 가운데 하나였다. 스스로를 견디어야 한다는 말과 같은 뜻이 될 테니까.
『리스본행 야간열차』中

파스칼은 '세상의 모든 불행은 방안에 혼자 있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데서 기인한다'라고 말했답니다. 그런 파스칼의 말에 첨언을 하듯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 아마데우 프라두는 '침묵', '스스로를 견디는 일'을 하지 못하는 점을 짚어줍니다. 잠깐만 생각해봐도 이 말은 금세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만약 방안에 혼자 있는 것을 모두가 잘 견딜 수 있게 된다면, 누가 누구를 해칠 것이며, 누구를 해코지하게 될까요. 누가 자기를 무시한다고 생각하고, 기분 나빠하게 될까요. 그런 일은 완전히 사라질 겁니다. 불행과 함께요.


 '경멀에서 오는 외로움.' 프라두가 생의 마지막에 골몰하던 주제였다. 우리가 타인의 존경과 관심에 의지하고, 그것에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 그가 걸어온 길은 얼마나 멀었던가!
『리스본행 야간열차』中
"누군가에게서 얻을 수 있는 이익에만 관심이 있는 게 아니라, 정말 그 누군가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도 있을까?"
『리스본행 야간열차』中

 다른 사람들에게, 타인에게 존경과 관심을 얻고자 하는 욕구는 앞에서 말한 고독, 침묵을 견디지 못하는 것과 한패가 되어 우리가 우리 다워지는 것을 방해하게 됩니다. 사람들이 '관심이 있다'라고 말할 때는 대부분 '나에게 이익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해석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겁니다. 이익을 위해 보이는 거짓 관심에, '나에 대한 관심'이 아니라 '나를 통해 생길 이익에 대한 관심'에 시간을 들이느라 스스로를 잃어버리고 마는 일은 얼마나 슬픈 일인가요.


 여전히 불고 있는 아들러 열풍의 굵은 줄기 중 하나는 '인정 욕구'에 대한 부정입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도 아마데우 프라두를 통해 같은 맥락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 거죠.


 이제 마지막으로 한 문장만 더 적고 감상을 마무리하기로 하겠습니다.

그 뒤로 몇 년 동안 누군가 저를 이해하기 시작하면 저는 언제나 도망쳤어요.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한 가지는 그대로 남았지요. 저는 누군가가 저를 '완전히' 이해하는 걸 원하지 않아요.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채 살고 싶어요. 다른 사람들의 눈이 멀어야 저는 안전하고 자유로우니까요.
『리스본행 야간열차』中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 가장 큰 충격을 안겨준 문장이에요. "저는 누군가가 저를 '완전히' 이해하는 걸 원하지 않아요."라는 말은 누군가를 완전히 이해하고 싶다고 생각해왔던 제 생각을 전복시키는 표현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다음 문장을 읽고 한 번 더 충격을 받았습니다. 처음보다 더 큰 충격이었죠.

"다른 사람들의 눈이 멀어야 저는 안전하고 자유로우니까요."

 아, 생각해보세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완전히' 이해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말입니다.

행복할 수도 있을 겁니다. 어쩌면요. 정말 그들이 이해한 것이 온전한 '나'이고, 그들의 이해의 '목적'이 '나를 통해 생길 이익'이 아니라 '나 자신'이라면 말입니다. 하지만 이런 가정, 생각은 얼마나 순진한 건가요.

 내 생각이란 것이 없는 인생, 도무지 자유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삶, 행복할 수 있을까요.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지금까지의 제가 '이해'의 환상에 얼마나 중독되어 있었는지, 다른 사람의 '관심'을 얼마나 바라고 원해왔는지, 적나라하게 까발려 드러냈습니다. 처참했죠. 환상에 불과한 신기루를 좇아 점점 더 척박한 사막으로, 죽음이나 다름없는 세계로 나아가는 여행자나 다름없었으니까요.

 부끄럽기도 했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싶다고 말할 때, 그 이해의 목적이 그 사람 자체를 알고, 이해하는 것이었는지, 아니면 그것을 통해 얻게 될 이익을 생각했는지 알 수 없어졌으니까요. 꼭 이익을 생각하지는 않았다 해도, 절대 하지 않았다고도 할 수 없는 상황, 모호함 스스로에 대한 무지가 부끄러웠습니다.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무척 방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어요.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의 인생, 삶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의 삶까지를 관통하는 메시지를, 마치 폭격이라도 하는 것처럼 무차별적으로 쏟아냅니다. 한 번이나 두 번 읽어서는 그 절반도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겠지만, 나아질 겁니다.


 제목을 포함해 벌써 세 번이나 적게 되었는데,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다."는 문장만큼은 기억해주셨으면 해요. 이 '상상'이 헛되거나 허황된 생각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건 잘 아시리라 믿어요. 우리가 지금의 모습으로 '사는' 이유는 많고도 많습니다. 하지만 '상상하는 대로 사는' 것이 불가능한 것도 아니지요.

 처음부터 완벽하기를 바라지는 않더라도 조금씩 '나다운 나'와 '진정한 삶'을 회복하기 위해 애쓰는 과정이 무의미하지는 않을 겁니다.


 이제는 좀 걸을 수 있게 되었으니 뛰어볼까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이제 막 기어가는 것을 시작하는 수준이었음을 깨달은 것처럼 힘이 빠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뛰는 사람은 없지요. 기다가 서게 되고, 서고 난 후에 걷고, 그러다 뛰게 되는 거겠죠.  

 

정말 마지막으로 한 문장만 더.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게 무엇이 없는지 알지 못해요. 그게 나타나기 전까지는 말이에요. 그러다가 그게 나타나면 단 한순간에 확실해지지요.
『리스본행 야간열차』中

무엇이든 상상하세요. '그게 나타나기 전까지'요. 그때가 되면 저절로 알게 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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