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가책방 Oct 27. 2016

당신은 나의 등대입니다.

밀란 쿤데라 『자크와 그의 주인』

 언제나 그런 건 아니지만 거의 대부분 그러는 것처럼 이 책을 읽게 된 이유나 계기 같은 건 이미 오래전에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읽은 지 두 달을 넘기고 보니 어떤 내용이었는지까지 잊어버리고 말았죠. 이러고서는 감상을 쓰겠다고 떠듬떠듬 시작하는 저도 참 한심하고 또 어리석게 느껴지네요. 

 다행히 몇 군데 메모해 둔 것이 있더군요. 

이 감상은 그 메모를 중심으로 써 볼 예정입니다. 언제나 그렇듯 어수선할 예정이니, 마음의 준비를 해주세요.


 『자크와 그의 주인』은 밀란 쿤데라가 쓴 것이지만, 스스로 작품 안에서도 밝히듯 '원래 텍스트'가 따로 있습니다. 바로 드니 드디로의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이라는 작품이죠. 재밌는 건 『자크와 그의 주인』을 읽고 났더니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을 사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겁니다. 물론, 바로 샀죠. 하지만 역시 아직 읽지 않고 묵혀두고 있었습니다. 그랬는데, 감상을 쓰려고 『자크와 그의 주인』을 들춰보다 보니, 이번에야 말로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됐습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요, 하나는 밀란 쿤데라가 『자크와 그의 주인』에 적어놓은 이 문장입니다.

주인 : 우리 이야기를 다시 쓴 사람을 사람들이 믿는다고 생각하느냐? 우리가 진짜 어떤 사람인지 보려고 원래 '텍스트'를 보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느냐?
『자크와 그의 주인』中

'우리 이야기를 다시 쓴 사람'은 물론 밀란 쿤데라 자신을 가리킵니다. '원래 텍스트'는 드니 드디로의 작품을 의미하고요. 밀란 쿤데라는 이렇게 말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내가 쓴 『자크와 그의 주인』 속 자크와 주인이 어떤 인물인지 알겠는가? 정말 내가 쓴 그대로의 인물들일 거라 믿는 건 아니겠지? 그렇다면 어쩌겠나, '원래 텍스트'를 읽어볼 밖에. 고민할 필요가 없는 문젤세."


독자인 우리를 놀리는 건지, 아니면 유혹하는 건지, 의도야 어떻든 호기심을 일으키는 것은 분명합니다. 힘없는 독자가 어쩔 수 있나요. 읽어볼 수밖에.


 처음 제목만 읽었을 때는 『자크와 그의 주인』이 의미하는 바가 '양주별산대놀이'의 '취바리'나,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 '광대'들처럼 자크가 주인을 골려주는 내용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앞부분을 읽을 때도 그런 것 같다고 느꼈고요. 하지만 읽어나갈수록 어딘가 다르다는 생각이 자꾸만 커지더군요. 

 뭔가, 조롱이나 비난을 주고받는 사이라기보다 동정 혹은 동병상련, 공감에 가까운 사이가 아닐까 하는 쪽으로요.


작가인 밀란 쿤데라의 말과 자크와 주인의 관계에 대한 호기심 외에도 한두 가지 정도 다시 읽어보고 싶은 생각을 하게 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이런 거였어요.


주인 : 넌 착한 놈이야. 너는 착한 하인이야. 하인들은 착해야 하고, 주인에게 주인이 듣고 싶어 하는 소리를 해야 해. 쓸데없는 진실은 절대 이야기하지 말아야 한다, 자크. 
자크 : 걱정 마세요, 나리. 저는 쓸데없는 진실은 좋아하지 않습니다. 쓸데없는 진실보다 더 멍청한 걸 전 알지 못합니다.
『자크와 그의 주인』中

『자크와 그의 주인』에서 자크와 주인은 이런 식의 대화를 자주 주고받습니다. 자크가 주인의 말을 인정하는 척하면서 비꼬는 것처럼 보이지요. 그런 의도가 아주 없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자크는 실제로도 주인의 견해에 얼마간 공감하고 동의하는 모습을 거듭해서 보여줍니다. 정말, '쓸데없는 진실'은 '멍청한' 거라고 생각한다는 거죠. 

 비약일지 모르지만, 문학은 현실을 도외시하고는 해석될 수 없기에 지금의 대한민국의 현실에 자연스럽게 겹쳐 읽고 말았습니다. 이미 누구나가 다 아는 '쓸데없는 진실'을 새삼 떠올리게 한 거죠. 

 대한민국의 국민이 하인이라면, 주인은 누구일까요. 주인이 듣고 싶어 하는 소리를 해야 한다면, 하인은 어떤 말을 해야 할까요. 하인들이 착해야 한다면, 주인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자, 질문이 여기쯤 오게 되면 왜 쓸데없는 진실이 멍청한 건지 자연스레 깨닫게 됩니다. 답은 이미 오래전에, 너무나 당연한 모습으로 나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뿐이니까요. 새삼 생각하고 고민할 필요가 없는 문제를, 쓸데없는 진실은 고민하게 하고, 시간을 낭비하게 합니다. 이 고민의 바통은 이미 우리를 떠나 있습니다. 고민해야 할 것은 우리가 아닌 저 편에 있는 이들이라는 거죠. 명백한 진실은 명백한 진실로 이미 굳건하게 존재합니다. 굳이 그것을 해석하고, 풀어서, 답을 구하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는 거죠. 그냥 하면 되는 거니까요. 


 네, 현실을 돌아보게 하는 힘. 

전혀 현실적이지 않을 허구의 이야기가, 그 이야기를 읽는 독자를 자연스럽고도 굳건하게 현실에 매어놓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문장과 표현. 이러한 표현이 새삼 눈에 들어왔기에 『자크와 그의 주인』에 이어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까지 읽고 싶어 지게 만들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자크와 그의 주인』의 줄거리를 들려드리고 싶지만, 줄거리를 잊어버렸기 때문에 줄거리는 나중에 다시 읽게 됐을 때 쓰는 감상에서 적는 걸로 하겠습니다. 그래도 괜찮겠죠? 한 가지 생각나는 건 자크나 주인 모두 '여자' 혹은 '사랑'문제로 마음을 앓고, 골치를 썩이고 있다는 겁니다. 허무주의랄까, 무의미랄까, 자포자기랄까 하는 뭔가 소모적인 감정으로 가득한 두 사람이 서로의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하며 읽는 사람까지 염세적으로 만들어버리는 내용이죠. 아, 『자크와 그의 주인』을 변호하는 건 아닌데, 몹쓸 작품이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절대로 아니죠. 오히려 읽다 보면 '아!'하고 무릎을 탁 치게 하는 기막힌 문장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 페이지 전체가 너무 좋아서 통째로 옮겨 적고 싶어 질 정도의 표현도 있어요. 


주인 :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아느냐? 
자크 : 누구도 알지 못하죠. 
주인 : 누구도. 
자크 : 그러니 저를 인도해 주세요. 
주인 :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는데 내가 어떻게 너를 인도할 수 있겠느냐? 
자크 : 저 높은 곳에 쓰인 대로 가는 거죠. 나리께서는 저의 주인이시니 저를 인도할 의무가 있으십니다. 
주인 : 그래, 하지만 조금 더 먼 곳에 쓰인 것을 네가 잊었구나. 명령을 내리는 건 주인이지만, 명령을 선택하는 건 자크 너지 않느냐. 그러니 내가 기다리마! 
자크 : 좋습니다. 그러니까 저는 나리께서 저를 인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앞으로……. 
주인 : (주변을 둘러보며 당혹해한다.) 그러고 싶지만 앞이 어디냐? 
자크 : 나리께 큰 비밀 하나를 알려 드리겠습니다. 인류가 태곳적부터 알아온 계략이죠. 어느 쪽으로 가도 앞입니다.
『자크와 그의 주인』中

『자크와 그의 주인』에서 가장 좋아하는 표현이 담긴 부분입니다. 

'누구도' '우리가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런 사정이다 보니 서로가 서로에게 자꾸만 의지하며 묻게 됩니다. "어디로 가야 합니까?"하고요. 그다음엔 요청하게 되죠. '저를 인도해 주세요'하고요.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건 서로 마찬가지라서, 간단히 "알았다."하고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여기서 "알았다."하는 사람을 의심해야 하는 거죠. 절벽이나 늪으로 인도할 수도 있으니까요. 


 정말 재밌는 부분은 가운데에 있는 주인의 말입니다. 

명령을 내리는 건 주인이지만, 명령을 선택하는 건 자크 너지 않느냐. 그러니 내가 기다리마!

정말 주인답지 않은 주인이죠. 내려진 명령을 선택하는 게 하인인 자크라니. 마치 신이 인간에게 명령을 내려놓고서는, 결국 인간 멋대로 하게 될 테니 기다려 봐야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죠. 만약 운명이란 게 신이 정해놓은 것이라면 이처럼 무책임한 발언이 또 있을까요?

 이런 말이잖습니까.

신 : 나는 너의 운명을 정해놓기는 했는데, 선택은 너의 몫이니까 기다릴게.

이런 거라면 운명이 정해져 있다는 건지 아직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건지 누가 알 수 있느냐는 거죠. 

 

중요한 건 아니지만 '조금 더 먼 곳에 쓰인 것'이라는 게 드니 드디로의 『운명론자 자크와 그의 주인』의 내용을 암시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읽어보고 그런지 아닌지 알려드리도록 하지요.


다시 운명과 인도 이야기로 돌아오면, 자크는 재밌는 말을 합니다. 마치 '좋은 걸 가르쳐드리죠.'라며 인심이라도 쓰는 것처럼 굴면서요.

어느 쪽으로 가도 앞입니다.

인간과 물리적인 세계를 중심으로 생각해보면 이 말은 말도 안 되는 오류가 분명합니다. 하지만 '운명론'에서 보면 어떨까요? 한 사람이 앞으로 가든, 뒤로 가든, 옆으로 가든, 물구나무를 서서 가든, 걸어가든, 기어가든, 뛰어가든, 업혀가든, 자동차를 타고 가든, 매를 맞으며 가든, 밥을 먹으며 가든, 물을 마시며 가든, 혼자 가든, 둘이 가든, 떼로 몰려가든 관계없이 운명은 언제나 '앞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결국 정해져 있든 정해져 있지 않든, 누가 명령한 대로 가든 아니든, 운명은 우리가 나아갈 길로 우리를 이끌어 가게 되어있으므로, 고민은 사실 의미가 없어지게 되는 거죠. 


 고민이 의미가 없어져서 고민할 필요가 없어진다면 그건 좋은 일일까요, 나쁜 일일까요. 

나쁜 일까지는 아니더라도 썩 좋아 보인다고 말하기 어려운 이유는 어쩐지 자포자기하고 말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될 대로 된다'는 얘기가 되고 마니까요. 

 개척할 필요도 애쓸 필요도 없다면 삶의 순간순간에 마주하는 고민들에 심각해질 필요가, 힘들어할 필요가 어디에 있을까 하는 겁니다.


 밀란 쿤데라는 고향인 체코가 독일에 점령당하고, 전쟁 이후에는 사회주의 진영에서 공산화되어 마치 운명이 짓밟기를 원하는 것과 같은 불가항력적인 시대의 폭력을 경험했습니다. 아무리 애쓰고 노력해도 이룰 수 없는 것이 있다는 체념, 깊은 상실감이 『자크와 그의 주인』에 담겨 있는 것 같아 쓸쓸해지고 말았습니다. 


고민과 노력이 무의미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무수한 단서와 증거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의미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내려놓을 수가 없습니다. 외딴섬의 등대는 한 해 내내 바다를 지켜도 몇 대 되지 않는 배 밖에 인도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매일, 매 순간, 기다리고, 노력하는 등대의 노력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멀리 배를 타고 나간 사람들은 그 어떤 순간에, 멀리서 손을 흔들듯 하는 등대를 보고 안심하고, 안도할지 모릅니다. 


 만의 하나라도 운명이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인생을 정해놓고 있다고 해도, 노력을 그칠 수는 없는 이유는 운명의 입장에서는 그 노력이 무의미할지라도 '나'의 입장에서는 그 노력이 전부이기 때문입니다. 어디로 가든 앞이라면 다만 가고자 하는 방향으로 끊임없이 나아가기 위해 애써볼 뿐입니다. 


 제 주의는 '해도 후회할 것 같고, 하지 않아도 후회할 것 같다면 하지 않는 주의'지만 노력하고 애쓰는 것까지는 그만둘 수가 없네요. 이 문제는 하고 하지 않고를 떠나 있는 '나 자신' 그 자체이니까요.


솔직히 여기 인용한 표현들을 빼면 기억하는 부분이라고는 여자 문제로 서로 골치를 썩이고, 갈등하고 있다는 것뿐입니다. 하지만 다른 내용들을 전부 기억하지 못하는 게 이 책을 읽었다는 사실 자체를 무의미하게 하지는 않습니다. 이렇게 휘갈기고 있는 감상 하나는 남았으니까요. 


 저는 앞으로도 가고, 뒤로도 가고, 옆으로도 가고, 아래로도 가고, 위로도 가고, 기어도 가고, 뛰어도 가고, 자전거를 타고 가고, 차를 타고 가기도 합니다. 다른 건 다 달라도, '간다'는 것은 한결같군요. 이렇다 저렇다 하여도, 일단 가 봅시다. '앞으로'.


매거진의 이전글 인생은우리가사는그것이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