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갈 수는 있지만 나올 수 없는 공간.

by 가가책방

꿈을 꿨다.

오랜만의 꿈이다.

꿈을 꾸는 것도 오랜만이고, 꿈속 이야기가 이렇게 오래 기억에 남아있는 것도 오랜만이다.


익숙한 꿈이다.

이미 오래전에 꾼 꿈과 닮아 있었다.

간단히 잊히지 않는 건 그래서이리라.


기억나는 시작은 지하철 승강장이다.

지하철을 타기 위해 내려가는 길.

열차가 도착한다는 안내음이 들린다.

서둘러 내려가려다가, 어떤 이유에선가 다시 올라간다.

다시 올라가다가 별 이유 없이 다시 내려온다.

두어 번 반복한다.


열차가 도착했는지 사람들이 계단을 올라오기 시작한다.

그제야 승강장으로 내려간다.

예상 밖이다.

열차는 아직 문을 열어두고 있다.

출발을 알리는 소리, 문이 닫힘과 동시에 뛰어들듯 열차에 올랐다.

또 한 사람이 옆 칸으로 뛰어들었는데, 그를 보면서는 아슬아슬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탄 것 역시 아슬아슬했겠지만 나보다는 그 사람이 더 위험해 보인다.


위험하게 타지 말라는 열차 안내 방송이 나올 거라고 생각하고 기다린다.

방송은 나오지 않는다.

평소와 다름없는, 안내가 흘러나올 뿐이다.

열차 안은 의외로 한산하다.

눈이 마주친 사람은 없다.

주위를 둘러보는 사람도 없다.

조금 느낌이 다르기는 하지만 일상적인 풍경이다.


버스에서 내린다.

그렇다.

착각이 아니다.

탄 건 지하철 이건만 내리는 건 버스다.

어딘가에서 기억이 끊겼거나, 꿈이기 때문이겠지.


거대한 쇼핑몰이 있는 신도시 느낌을 물씬 풍기는 공간이다.

기이한 건 내리자마자 돌아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기다리기 시작했다는 거다.

그 공간, 화려하고 소란스러운 공간에 들어가고 싶지 않다.

돌아오는 버스가 오지 않는다.

위를 둘러보니 안내판이 있기는 한데, 아무래도 '내리는 곳'만 안내되고 있지 싶다.

저 앞, 어두컴컴한 길을 한참 가면 돌아오는 버스에 탈 수 있는 정류장이 있겠지 싶지만 거기를 향해 걸어가지는 않는다.

길을 물을 생각으로 공간 속으로 들어간다.

의외로 소란스럽지 않다. 오히려 적막할 만큼 사람이 적다.

나가는 버스가 서지 않는다면 나와 같이 온 사람들, 그전에 왔을 사람들, 그 많은 사람들은 어디로 갔을까.

마침 경비로 보이는 아저씨 두 분을 발견한다.

한 사람은 밝은 얼굴에 체격도 좋고, 다른 한 사람은 어딘가 음울한 얼굴에 말라보인다.

꿈속에서 어제 본 영상 속 메시지가 떠오른다.

"도움이 필요할 때는 요청하라."

그래, 지금부터 도움을 청할 생각이다.


밝은 얼굴의 아저씨에게 묻는다.

"여기서 나가는 버스 정류장이 어디에 있나요?"

아저씨, 웃는다.

문득, 얼굴도, 머리카락도 하얀색에 가까운 회색이라고 느낀다.

뭐라고 얘기는 하지만 분명히 어디 어디로 가라고는 말하지 못한다.

못하는 건지 안 하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원하는 대답은 아니다.


음울한 얼굴의 아저씨가 나선다.

길을 알려줬다기보다 위로를 건넨다.

아저씨는 내가 향해야 할 방향만을 넌지시 일러준다.

표정이 더 어두워진다.

발견하기 어렵거나, 발견할 수 없다고 말하려는 듯하다.

아무려면 어떤가.

두 사람과 헤어져 걷기 시작한다.


조금 더 걸어 내려오니 낡은 건물들로 가득하다.

가정집처럼 보이는 건물이 커피숍이었다거나 원두를 갈아 템핑 하고 있는 바리스타가 고향 아저씨였다거나 하는 시시껄렁한 사실들을 '발견'한다.

그렇다.

나는 발견해 가고 있다.

이미 오래전에 이 공간에 와본 기억이 있다.

다른 건, 그때는 꿈이라는 걸 몰랐고, 지금은 꿈이라는 걸 안다는 것 하나다.

주변은 점점 황량해진다.

빈집과 철망, 오물이 널려있다.

그리고,

고양이.

유난히 새끼 고양이들이 많이 보인다.

물론, 죽어가는 고양이도 있다.

어린 고양이다.

모든 풍경을 지나친다.

나는 버스를 타러 가야 하니까.


철문을 열고 나섰다.

마침내 도착한 곳은 산길이다.

멀리 내가 지나왔을 도시가 보인다.

멀리도 왔다.

구불구불한 길이다.

산 속이지만 어둡지 않다.

길을 낸 지 오래되지 않은 듯하다.

비는 내리지 않고, 비가 온 흔적도 없건만 길은 진흙탕이다.

도무지, 녹색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도 특이하다.

산인데 말이다.


앞에서 한 남자가 걸어가고, 뒤에서도 한 남자가 걸어온다.

한 사람은 보고 있고, 다른 사람은 다만 알고 있다.

노래자랑대회라도 하는지 노랫소리가 들린다.

옛날 노래다.


걸으며 기이하게 생각한 건 이런 거다.

버스에서 내릴 때는 분명 밤이었는데, 지금은 한 낮이니 이 공간의 시간은 도대체.

이미 오래전에 여기에 와본 기억이 있는데 왜 더 나아가지 못하고 같은 데서 이러고 있을까.


그러다 잠이 깼다. 4시 48분.


돌아보니 꿈에서 어떤 기분이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꿈 내용은 대략 기억나는데, 왜 그런 걸까.


들어오는 것, 내리는 것만 가능한 공간.

나가는 것, 타는 것은 불가능한 공간.

많은 사람이 찾지만 그들을 만나거나 보기는 힘든 공간.

시간과 공간이 뒤섞였거나, 사라지는 공간.

고양이들, 희거나 노랗거나, 검거나 한 고양이들.

녹슬어버린 노란 철문과 녹색을 잃은 산.

멀지 않은 데서 들리는 노랫소리.

진흙길을 걷는 나.


여기는, 어디냐.

나는 어디에 있는 거냐.

지금 나는 꿈에서 깬 걸까, 여전히 꿈을 꾸는 걸까.


해가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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