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어하는 목록
고분고분한 아이는 아니었다.
이렇게 하라고 하면 저렇게 하려고 하고, 잘 하던 일도 누가 와서 이래라저래라 하면 하기 싫었다.
좀 자라서는 거의 누구나 하라고 하는 걸 더 하기 싫어한다는 걸 알게 됐다. 외롭지 않았다.
충분히 자라서 사회에 나오게 됐을 때(무슨 농산물 출하 같은 소리냐고 할지도 모르겠는데 실제로 그런 느낌이다) 얼마간 혼란을 느껴야했다.
그 많던 반항아, 이단아는 사라지고 시키는 것만, 시키는 거라도 '잘 하는 방법'을 익히는 게 처세의 기본 자세라고 가르치는 현실에 맞닥드렸기 때문이다.
세상은 열심히 하는 자를 원하지 않았다. 잘 하는 사람을 원했다. 잘 하는 것에도 기준이 달랐다. 시키는 걸, 시키는 대로 잘해야 했다.
중고등학교 때까지는 일률적인 커리큘럼에 따라 교육을 시키고, 대학교에 가면 느닷없이 창의적으로 사고하라고 하다가, 사회에 나가면 눈치와 처세의 기술을 익힌 자만이 살아남는다고 했다.
묘한 일이다. 생애의 일정 시기에 따라 갖춰야할 사고 방식과 기술이 이토록 달라서야 평생 적응만 하다 끝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조금 반항을 하기로 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아도, 얼마간 피곤해진대도 그래야 했다.
참견을 완곡하고 긍정적인 표현으로 바꾸면 '조언'이 된다. 참견은 싫지만 조언은 필요로 한다. 모순된 듯 보이지만 여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내가 생각하는 참견의 개념은 이렇다.
'뭘 모르는 사람이 아는 듯 가르치려 드는 일 또는 행동'
사전적인 의미를 찾아볼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마저 적기로 하자.
어려서 경험한 참견은 보통 부모님이나 선생님으로 대표되는 어른들이 한 거였다. 너무 당연한가? 뭐 그럴수도 있겠다.
어른들이 당연히 많이 알고, 더 객관적이고 공정한 판단을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참견의 원인이자 근거였을 거다. 나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른들의 참견은 아이의 경험을 무가치한 것, 유치한 것으로 여기는 판단을 근거로 한다. 아이의 방식이 시간낭비의 비효율과 무지의 막무가내로 비쳤던 것이리라.
결국 아이는 시행착오의 기회, 깨달음의 기회를 잃는다. 스스로 문제를 해결했다는 달성감, 혼자서 일을 마쳤다는 성취감도 박탈당한다.
어른의 참견이 도움이 되었든 아니든 어른은 자신의 조언이 문제 해결, 일의 성공에 기여했다고 믿었다. 어른들은 아이를 칭찬했다.
잘했다고, 수고했다며.
아이는 두 번 좌절한다.
성공이 가져오는 만족감과 다른 일도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박탈되거나 반감되는 경험을 한다.
아이가 어른의 참견에 화를 내는 건 당연하다. 자신이 정당하게 얻어야 할 것을 빼앗아가는 도둑에게 화를 내지 않을 사람이 어디있겠는가?
어른의 참견을 무시하고 억지를 부려가며 내 방식을 관철했던 경험이 여러 번 있다. 힘들었다. 어른들이 가르쳐준 방식이 더 쉽고 수월했다는 걸 깨닫게 되는 일이 더 많았다. 하지만 성취감은 비교할 수 없었다.
내가 어른이 된 후에 옛날 기억을 잊고 조카들의 놀이나 일에 끼어들었다가 혼난 적이 몇 번 있었다. 아이가 짜증을 내는 게 당연했다. 아이에게는 아이만의 방식이 있고, 시행착오를 겪을 권리와 성공의 성취감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할 권리가 있었으니까.
나는 지금도 내 방식으로 하는 걸 좋아한다.
여전히 참견은 싫어한다.
앞서 적었듯 조언은 환영한다.
나는 조금은 오만하다.
조금 많이 오만할 수도 있다고 생각할 때도 있다.
때로는 그 오만이 '작업복'같은 역할을 하기도 한다. 무언가를 할 때 의식처럼 오만을 두르는 거다.
오만의 정점은 타인의 경험을 완전히 무시하는 태도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오만의 정점에는 오르지 못할 인물이다.
참견을 즐기는 이들은 오만의 정점에 무척 가까워 보인다. 타인의 경험, 생각, 노력 같은 건 안중에 없으니.
아이러니다.
뜬금없이.
오늘은 여기까지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