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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가책방 Mar 02. 2018

[리뷰] 고독은 찬란하고, 외로움은 비참하다.

『잠시 혼자 있겠습니다』_마이클 해리스/어크로스

<잠시 혼자 있겠습니다_마이클 해리스/어크로스>

 <잠시 혼자 있겠습니다>는 '잃어버린 나'를 되찾는 과정을 담고 있다. 모두가 같은 방법으로 자신을 찾아야 할 필요도없고, 찾을 수 있다고 말할 수도 없지만 어떤 식으로든 자신과 마주하는 '고독'을 회복해야만 한다. 고독은 자발적인 홀로있음이며, 자기 자신이 세상의 중심임을 확인하는 시간이다. 나는 흩어지고 지워진 나의 조각들을 되찾아야 한다. 내가 아닌 그 무엇으로도 나를 채울 수 없기 때문이다.


고독과 외로움은 어떻게 다른가?

이 물음에 제일 먼저 떠오른 생각은 외로움이 불러 일으키는 비참함이었다.  

고독은 찬란할 수 있지만 외로움은 비참하기만 할 뿐이라는 생각.

내가 생각하는 외로움이란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감정의 감옥에 붙은 낭만적 이름이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과 실시간으로 얼굴을 마주할 수 있고, 연락 없이도 지인들의 근황을 알게 되며, 계정 하나만 만들면 낯모르는 무수한 친구를 만들 수 있는 세상.

 이토록 다양한 연결 속을 살아가는 현대 사회는 풍요 속 빈곤에 시달리고 있다.


 왜 자꾸 외로워지기만 하는 걸까.

 함께 있지 않기에 외로운 거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다. 그때는 누군가와, 무엇인가와 연결되기만 하면 외로움이 사라질 거라고 믿을 수 있었다. 혼자가 아니기만 하면 외로움이라는 감옥에서 해방될 거라고 말이다.

 

 심심함은 게으르고 나태한 쓸모없음의 증거라 온갖 수단을 동원해, 적극적으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

쉼 없는 근면과 부지런함이 미덕으로 칭송받던 시대는 저물었다.


 시간은 많은 걸 바꿔 놓았다.

혼자라서 외로운 게 아니다. 사람은 혼자일 수 없기에 외로움을 느낀다.

심심함, 게으름, 나태함을 철저하게 박살냈듯 관계, 성공, 좋은 사람이라는 이미지를 위해 고독을 외면한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한 거다.


 사람은 여전히 사회적 동물이다. 혼자서는 온전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하지만 타인은 나를 구원할 수 없다. 사르트르처럼 '타인은 지옥이다'는 식으로 말하려는 건 아니다. 타인의 존재가 고통을 주는 건 나 자신보다 타인이 존재 우위에 있을 때다. 주체성, 독립성을 잃고 휘둘린다면 힘들어지기만 할 뿐이다.


 나에게는 타인이 필요하다. 나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수용하고, 사랑해줄 수 있는 존재가 있어야 한다. 나의 존재를 긍정해줄 수 있는 대등한 존재가 있다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오랜 시간 만나지 못해도 외로움이 나를 집어삼키는 일은 벌어지지 않으리라.


 <잠시 혼자 있겠습니다>에서는 얕은 존재 의식, 깊이도 무게도 없는 사교 행위로써의 관심을 '소셜 그루밍'이라고 칭한다. 잠시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는 쓰다듬 말이다. 지속될 거라는 확신보다 언제든 그칠 수 있다는 불안이 더 큰, 목이 말라 바닷물을 들이켜듯 점점 더 관계의 갈증을 키우는 노력이 SNS와 커뮤니티의 모습으로 확장되고 장려된다. 넓고 얕은 관계에 휩쓸려 나도, 우리도 잃어간다. 마침내 우리는 조금 더 외로워진다.


 어떻게 지독한 외로움을 끝내고 나를 찾아낼 수 있을까. 소로처럼 오두막을 짓고 홀로 지낼 수도 없는, 정보와 연결의 홍수 속에서 무엇으로 우리를 건져낼 수 있을까.


 이 시대에 연결을 거부한다는 건 덜하게는 괴짜로, 심하게는 부적응자로 낙인찍히기를 자처하는 게 된다. 다들 읽는 책을 읽어야 하고, 다들 본 영화를 봐야 하며, 다들 아는 건 나도 알고 있어야 한다. 보이지 않는 시달림이 차츰 나를 갉아 들어온다. 적극적으로 혼자가 되어야 하는 이유, 잠시라도 나와 마주하는 시간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최인아북클럽 #solitude #고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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