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분 즈음에

계절은 돌고 돌아 밤은 잦아들고

by 가가책방

시간은 머물지만 계절은 오고 간다.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듯 계절에 의미를 담는다.

나는 농부의 아들, 봄이면 스폰지 만큼이나 부드러워진 땅을 밟고 뛰고 물구나무를 서고 앞으로 뒤로 재주를 넘었다.

봄이란 밭을 갈다 아직 잠이 덜 깬 개구리를 만나고, 논을 갈다 미꾸라지를 잡는 시기였다. 지금처럼 ‘봄’하고 입으로 되뇌고, ‘봄’이라 끄적이며, 물이 오르고 피어나는 모습을 눈으로 ‘감상’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구경꾼이 되기 전 이야기다.


언제부터 보고 듣는 이야기로 시간을 채우기 시작했을까.

돌 사이에 돋은 새싹과 길 가에 핀 꽃을 잊고 뉴스와 SNS와 사진들로 봄을 전한 건 또 언제부터였을까.

춘분즈음 돌아본다.

밤과 낮이 공평하게 하루를 나누어 가는 날.

나만의 시간을 고집하며 고립을 자처하지도 말고, 바쁘다며 나를 돌보기에 소홀하지도 말자고 다짐한다.


봄은 남 일만 같았다. 느닷 없이 찾아왔다고, 아무 것도 하지 않았는데 또 봄을 맞았다고, 봄인가 했더니 그새 여름이라고, 그래서 그게 뭐라고.


개구리, 미꾸라지는 오래 전 이야기지만 아직 돋지 않은 새싹과 피지 않은 꽃이 있다. 눈에 비치고, 손이 닿는 거리에 피고 자라 스러질 내 몫의 봄이 있다.


죽은 듯 몇 년을 보내고 부활하듯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나무가 있다. 내가, 우리가 그러하지 않으리라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어머니, 아버지는 여전히 농부. 보드라운 흙의 감촉은 가물가물 해졌어도 나는 여전히 농부의 아들이다.

오래 잊고 지낸 만큼 내 몫의 봄은 간절하다. 무엇이 싹틀지, 얼마나 자랄지, 열매를 맺을 수 있을지, 확신도 약속도 없다.

그 없음이 안기는 막막함은 얼마나 가슴벅찬가. 아무 것도 없었기에 무엇이든 자라난다. 마르고 텅 빈 보드라운 땅이 생명으로 가득차듯, 그렇게.


춘분즈음에 시작한다.

막힘 없이 흐르는 시간과 오고 가는 계절을 흙 삼고, 보고 듣고 생각하기를 씨앗 삼은 나의 인생 농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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