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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가책방 Apr 16. 2018

나도 나를 모르는데.

왜 너는 나를 아는가


“누구냐, 넌?”
정체성이란 뭘까?
정체성 찾기, 자아정체성, 정체.
익숙하게 쓰는 말이지만 단어 정체부터가 불분명하다. 사전 의미가 아닌 이해 정도에서부터 격차가 있다.

스스로를 찾고자 해도 좀처럼 찾지 못하는 이유가 그건 아닐까?
불분명하기에, 넘치거나 부족하더나 빗나가 있기에.

소설 줄거리는 이혼한 여자와 미혼 남자의 사랑이다. 여자는 능력도 갖췄고 부유하지만 나이가 더 많다. 남자는 평범한 능력 혹은 부족한 능력에 여자가 아니면 의지할 곳은 커녕 당장 잠잘 곳도 없지만 젊다.

갈등은 늘 사소한 데서 시작된다. 마른 봄 들불 번지듯 걷잡을 수 없는 상황으로 흐르기도 한다. 뻔한 전개인지 모르지만 이 소설 역시 그렇게 흘러간다. 걷잡을 수 없이 혼란스럽고도 모호해서 불분명한 방향으로.

내 경우 소설을 다 읽은 후 제일 먼저 떠오른 게 장자의 ‘호접지몽’이었다.
‘장자가 꿈에 나비가 되니, 장자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꾸는 것인지 나비가 장자가 되는 꿈을 꾸는 것인지 알 수 없다’는 이야기.

한 마디로 열린 결말이라는 거다.
(아, 스포일러 하고 말았습니다.)

‘정체’를 밝혔을 때 밝힌 정체를 인정받으려면 증거 혹은 증인이 필요하다.

대표적 증거는 삶, 생활을 통해 축적해온 주변의 평판- 평판은 스스로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이때 중요한 건 평판이 좋아야만 하는 것도 나빠야만 하는 것도 아니라는 걸 기억하는 일. 이유는 의도적으로 나쁜 평판을 만들고자 했을 수도 있고, 생각 못한 좋은 평판을 얻기도 하기에 -이다.
평판으로 판단하기 힘들 때 간절한 존재가 바로 증인이다. 이 증인은 특별한데 때로는 증인이 강력한 영향력을 갖고 정체성에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체성이 ‘부여된다’고 말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는 거다.
부여 역시 일종의 발견을 돕는 일로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부여된 정체성은 내면 본래의 정체성 혹은 서서히 눈 뜨게 되는 정체성과 괴리될 수 있다.
 혼란이 찾아올 거고 현명하게 극복하지 못한다면 스스로를 영원히 잃을지도 모른다.

이 소설은 결국 스스로 해내야 하는 삶의 부분들을 이야기 한다. 이야기 속 인물들의 이야기이면서 이야기 밖 독자들의 몫으로도 자발성을 요구하는 것이다.

밀란 쿤데라 작품을 좋아하지만 때로는 밀란 쿤데라 작품 속에 담긴 작가의 시각, 생각이 마음에 거스러미 같을 때가 있다.

정치 탄압으로 결국 망명을 선택해야했던 혹독한 삶이 안타까우면서도 비슷한 입장에서 끝까지 자리를 지킨 보후밀 흐라발과 비교하게 되는 점.

이야기의 흐름 혹은 핵심 메시지와 무관하게 상대적으로 여성이 수동적이고 약한 위치에 놓이는 점.

시류와 사회보다 개인에 책임의 무게를 두는 점-이 점은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해서 모순된다-.

나에게 정체성은 눈코입 표정이 없는 얼굴 없는 가면이 아니다. 누군가가 그려주기를 기다릴 생각도 없다. 그럼에도 독단적으로, 홀로 완성할 수 없음도 인정하고 있다.

정체성은 결국 상호작용 결과로써 드러나게 될 컷이므로 꾸준히 애쓰며 만들고 닦아 가는 일 말고 다른 방법은 없으리라.

저 괴테도 말했듯, “인간은 애쓰는 동안 방황하기 마련”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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