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가책방 Apr 10. 2018

어쩌면 다음 세계에는 다시.

역사는 단순 반복이 아닌 변주다

이갈리아의 딸들_게르트 브란튼베르그/황금가지

여기 하나의 세계가 있습니다. 

가부장제의 극단, 가모장제의 세계가. 

이 새로운 세계의 이름은 '이갈리아', 평등주의와 유토피아의 합성어라는 설이 유력한 나라죠.

여기서 여성은 움, 남성은 멘움으로 칭하며 이 세계 모든 부와 명예, 권리는 움에게서 나와서 움에게로 돌아갑니다. 움은 멘움보다 크고 강하며, 주로 바깥 일을 담당합니다. 육체 노동부터 정치까지 영역을 망라하고요. 멘움에게는 육아를 포함한 집안 일이 맡겨집니다. 움에게는 임신과 출산이라는 대체 불가능한 능력이 있고, 이 능력은 특권으로 이어집니다. 멘움은 아이를 낳는데 필요한 도구와 비슷하게 취급되며, 아이가 태어나면 보모 혹은 유모 신세로 전락합니다. 만약 자신이 친아버지라고 해도 멘움이 인정하지 않으면 지위와 권리는 인정되지 않으며, 부성보호((움이 자기 아이의 아버지로 공식 인정하고 하우스바운드(남편)로 받아들이는 일)를 받지 못한 멘움은 가난하고 궁핍한 삶을 살아야만 합니다. 또 하나, 멘움은 일정한 나이가 되면 페호라는 받침대를 착용해서 성기를 고정해야 하며, 상시 착용해야 합니다.  

 이 정도쯤 이야기 하면 대략 어떤 세계인지 상상이 갈 겁니다. 어딘가 익숙해서 낯익은 이야기처럼 보인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닙니다. 얼마 전까지의 세계, 어쩌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뒤집은 모양처럼 보일테니까요.


 그렇습니다. 이 책은 숨기거나 감출 것도 없이 기존의 가부장적 세계에 반대되는 세계를 그리고 있습니다. 듣고, 보고, 이야기되는 그대로요.


 이 소설은 1977년 노르웨이의 페미니스트인 작가가 쓴 가상의 세계를 그린 작품입니다. 물론 페미니스트의 시각에서 볼 수도 있겠지만 단순히 소설로 읽더라도 흥미로운 부분이 많습니다. 특히 흥미로웠던 부분은 대륙도, 문화도, 시대도 다르지만 과거 조선시대의 풍습들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 있었던 점과 현재 우리 사회와도 크게 다르지 않았구나 하는 유사성이었습니다. 

 조선시대 풍습 중 신혼 첫날 밤에 새신랑이 새신부의 장신구와 옷을 벗겨주지 않고 잠들었을 때 그 자세 그대로 밤을 새워야 하는 게 있었는데 이 소설에서도 비슷한 장면을 발견했던 거죠. 또 한 가지가 더 있는데 바다로 뱃일을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한 움을 기다리다 미쳐버린 멘움이 망부석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는 석상. 솔직히 놀랐습니다. 망부석, 열녀비 같은 개념을 유럽 한복판에서 발견했으니까요.


 지금도 그렇지만 출간 당시에는 어지간한 비난과 비판에 시달렸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혐오에 혐오로 맞서는게 정말 정당하고 올바른가?"라는 물음도 많이 들었겠죠. 하지만 기억해야 하는 건 이 이야기가 '소설'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정반대의 상황, 남성 상위의 가부장제 사회가 '현실'인 상황에서 단지 상상 속에서나마 존재하는 게 고작인 만들어낸 이야기라는 거죠. 

 

 이 소설을 읽으며 느낀 건 현실 세계의 가혹함입니다. 역으로 차별당하고 부당함을 감수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남성을 볼 때 느끼는 부당함과 위화감이 반대로 나 스스로의 현실 인식의 수준과 위치를 일깨웠기 때문입니다. 

나름으로는 많이 생각하고 고민하며 노력하지만 여전히 어떤 벽은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음을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이야기 속 메시지가 가장 강렬하게 느껴졌던 부분은 결말이었습니다. 

만일 멘움을 억압하지 않는다면, 만일 멘움이 제지되지 않는다면, 만일 그들이 교화되지 않는다면, 만일 그들이 <그들의 자리를 지키지 않는다면> 생명은 소멸할 거다._루스 브램과 페트로니우스 브램의 논쟁을 맺는 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갈리아의 고대, 그러니까 움이 멘움 상위에 놓이기 이전 시대에는 이 세계 역시 남성 상위, 남성 중심의 사회였을 거라는 생각입니다. 남성이 지배하던 사회는 멸망에 가까운 상황에 놓였고, 그 결과 혁명이 일어나 남성과 여성의 지위가 역전됐던 건 아닐까요. 남성 상위 사회가 돌아오지 않도록 역사를 바꾸고, 신체 조건을 약화시키는 제약과 교육을 했던 건 아닐까요. 


 이 소설이 던지는 메시지가 그리 단순하지는 않겠지만 얼른 와닿는 메시지는 흔히 약자로, 불완전한 존재로 치부하며 정당한 권리를 허용하지 않고, 온갖 구실과 이유들을 가져다 불평등을 정당화 하는 논리가 틀렸음을 알리고자 하는 것이 하나일 겁니다. 그에 이어서 틀린 논리가 만들어낸 고통이 얼마나 크고도 깊은지 바꿔 생각해보는 역지사지의 기회도 가져보라는 의미겠죠. 


 꼭꼭 씹어 읽어도 부족하겠지만 저는 그저 흥미롭고 재밌는 이야기로 읽었습니다. 부당함, 차별, 불평등을 곱씹는 걸 잊지는 않았지만요. 


 어떤 성이 더 우월하다거나 뛰어나다는 논리는 낡기도 했지만 처음부터 틀린 논리라는 게 거듭 밝혀지고 있습니다. 성별에 따른 차이, 신체 구조나 기능이 달라 생겨난 다름은 있을지 몰라도 그 다름이 불평등이나 차별을 정당화 할 수도 없음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세계도 우리 사회도 더 평등한 방향으로, 동등한 모습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얼마간의 다툼과 충돌이 있겠지만 그 과정을 현명하게 해결해나가는 일 역시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일 겁니다. 

 

우리 세계의 차별과 불평등의 역사가 얼마나 깊고, 오래됐는지를 보여주는 이정표와 같은 소설. 

<이갈리아의 딸들>이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랑이라는 위험한 착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