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 화 만인에 대한 남자의 특별 대우

이 남자가 연애를 못하는 서른네 가지 이유

by 가가책방

“하늘 아래 모든 이를 평등하게 대하라. 다만 평등하다는 것이 동일하다는 것과는 다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인간관계에 있어 남자의 균형 감각이란 언제나 몹시도 위태로운 것이었다. 의도하지 않았던 것에서 의도가 생겨나고, 의도와 다른 결과들이 이어졌다. 변명하기를 곤란해하는 남자는 변명조차 하지 않았다(남자는 변명하기를 곤란해한다기보다 귀찮아했다). 오해를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남자의 태도를 건방지다거나 무례한 것으로 받아들이기도 했다. 물론 남자는 그런 사람들이 그러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지극히 평등하게 모른 척하기로 한 셈이다.

“아, 그러세요? 그럼 그러시든지.” 랄까.

남자가 사람과의 관계에서 두렵다고 느끼는 것 가운데 하나는 지쳐버리는 것이었다.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지치는 것도 두려웠지만 그보다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지쳐버리는 것을 더 두려워했다. 남자에게는 쉽게 소모되어버리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몹시도 감정에 약했다.


남자는 굵은 관이 박힌 작은 물통 같은 감정의 그릇의 소유자였다. 남자의 감정은 쉽게 가득 차고 넘쳐흘렀지만 간단히 소모되어 버리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런 남자를 보며 감정의 기복이 심하다고 평하고는 했다. 종잡을 수 없다고도 했고, 까다롭다고도 했다. 남자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평가들이었다. 사람들의 평가에 일일이 반응하기에는 언제나 감정의 잔량이 부족했다. 보통은 감정이 남아있지 않았다.

감정이 남아있는 날은 남아 있던 탓에 일이 꼬이기 일쑤였다. 어떤 사람들은 기쁨과 유감, 슬픔과 아쉬움, 고마움과 미안함, 좋음과 싫음을 드러내는 태도를 보며 ‘이상한 사람’이라는 결론을 내리기도 했다. 남자는 솔직해야 한다고 믿었기에 감정에도 솔직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모든 선물이 모든 사람에게 선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다. 감정 역시 좋은 의도에서 드러낸 것이라고 해서 좋은 감정으로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남자의 솔직한 감정은 오히려 경솔함 혹은 가벼움으로 받아들여지곤 했다. 남자는 감정을 전달하는데 서툴렀다. 그 결과는 언제나 서로의 마음에 남는 상처였다. 남자는 상처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보다 더 상처주기를 바라지 않았다. 결국 남자는 거의 모든 사람들을 대할 때 감정의 그릇이 텅 비우고 대하기로 했다. 조금은 어색하고 표면적으로 불쾌함과 무례함 비슷한 것을 느끼며 때로는 약간의 기분이 상하게 하는 편이 모두를 위한 더 나은 선택일 거였다. 그리고 그러는 편이 실제로도 더 나았다. 남자는 그런 선택 덕분에 오랫동안 특별한 감정의 충돌이나 다툼 없이 편안한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분명 그럴 것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문제는 사소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오래지 않아 남자의 ‘만민 무감정주의’에 숨겨진 치명적인 약점이 드러났다. 치명적인 약점이란 이 모든 것이 오직 이 남자만의 생각이었을 뿐이라는 거였다. 비인간적일 정도로 감정에 무감각해 보이는 남자의 태도는 사람들에게 가벼운 놀람의 선을 넘어 거부에 가까운 기이함을 느끼게 했다. 남자가 이러한 사실을 깨닫게 된 것도 순전히 희생자의 숭고한 제보를 통해서였다.

“당신에게는 그게 아무렇지 않게 하는 보통인지 모르지만 보통사람들은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

남자에게는 아무렇지 않기에, 거의 의미가 없기에 남발하게 되는 호의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특별한 것이 될 것이라는 걸 남자는 몰랐다. 알면서도 줄곧 무시해왔는지도 모른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남자의 그런 무신경함은 언제나 상처를 남겼다.

남자의 생각이란 간단히 적으면 이런 것이었다.

“오해 따위 아무래도 좋아.”

그러나 아무래도 좋은 건 남자뿐이었고, 그래도 된다고 믿는 것도 남자의 생각일 뿐이었다.

처음에 남자는 이대로 누구와도 얽히지 않고 살아가면 될 거라는 말도 안 되는 꿈을 꾸기도 했다. 그러나 남자가 인간으로 살아가는 이상 아무와도 얽히지 않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남자는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깨달았다. 감정은 남자에게 도망치는 것도 무시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감정이란 좋은 것으로든 나쁜 것으로든 받아들여져야만 하는 것이었고, 좋은 쪽일지 나쁜 쪽일지는 차라리 운에 맡기는 편이 더 나은 것이었다. 감정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받아들임의 문제였다. 그것은 거부를 거부하는 거대한 소나기였다. 피할 곳 없는 데서 마주친 거대한 소나기를 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완전히 젖을 준비를 하는 거였다. 완벽하게 젖어버리기로 한 사람에게 비는 바다를 흐르고, 강을 흐르는 것과 같은 물에 불과했다.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물은 사람의 마음을 다치게 하지 않는다.


남자에게 ‘보통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준 사람과는 여전히 화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툰 것도 아니면서 화해한다는 것이 우습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멀어져 가고 있음을 실감하게 되는 날이면 남자는 어쩔 줄 몰라 안절부절못하고는 했다. 남자는 그 불편함, 불편하게 만들고 말았다는 죄책감을 쉽사리 내려놓지 못했다.

최근에야 남자는 그런 불편한 마음을 품고 있는 한은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음을 깨달았다. 모든 사람을 평등하게 대하겠다는 처음의 생각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동일하게 대하는 것을 평등한 것이라 믿었던 자신의 생각이 커다란 착각이었음을 깨달은 것도 그때였다. 너무나 당연한 것을 착각해왔다는 생각이 남자를 허탈하게 만들었다.

감정에 있어 평등하다는 것은 마음이 가는 사람들에게 더 마음을 기울이고, 상관없는 사람들에게는 상관없이 대하는 거였다.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무례하다 생각하든 불쾌하다 여기든 마음 쓸 필요가 없는 사람들인 거였다.

감정의 문제는 차별하는 것이 오히려 평등한 것이었다. 차별이 자연스러운 것이 감정의 문제였다. 그 순간부터 남자는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격렬한 차별을 실천하기로 했다. 자신의 마음이 편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의 마음이 편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두고 ‘기만’이라고 한다. 그것은 스스로에 대한 기만인 동시에 배려하고 싶다고 말하는 상대에 대한 기만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러한 기만은 모두에 대한 모욕이자 배신이었다. 기만은 누구를 기쁘게도, 만족스럽게 하지도 못했다.

남자에게 ‘편하지 않으면 만나지 않으니 걱정 마요’라고 말해준 사람이 있었다. 편안함을 말하는 그 말이 남자에게 불편함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많은 염려를 내려놓게 했다. 최근의 일이었다.

해결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날부터 남자가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도 아니다. 여전히 만인에 대한 평등을 부르짖고 다니는 것도 변하지 않았다. 하지만 빠르게 흐르지는 않더라도 꾸준히 흐르는 물은 언젠가 반드시 지형을 바꾸어 놓는다. 이러한 변화는 남자의 증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오랫동안 남자는 모든 사람을 특별하게 대하는 것이 가능할 거라 믿어왔다. 그래서 남자는 연애를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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