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6 화 받아들이겠습니다. 텅 비었으니까요.

이 남자가 연애를 못하는 서른네 가지 이유

by 가가책방

“세상에 어떤 그릇도 무한하지 않기에 어느 날에는 터지고 만다. 그리고 그것이 밖으로 터져 나오면 비명이 되고 안으로 터져 나오면 이야기가 된다. 그러니 오라! 나는 여전히 텅 비어있으니.”

남자는 좀처럼 하얀색 옷을 사는 일이 없었다. 하얀 옷은 쉽게 더러워질 뿐 아니라, 단순히 세탁기만 돌려서는 본래의 눈부신 하얀색을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때는 검은색 옷만 사기도 했다. 하지만 우습게도 검은색은 하얀색만큼이나 관리하기 힘든 색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했다. 하얀 옷이 간단히 더러워졌다면 검은 옷은 조금만 먼지가 묻어도 지저분해졌다. 게다가 흰 옷이 누렇게 바라는 것처럼 검은 옷도 허옇게 바라기 일쑤였다. 하얀 것이나 검은 것이나 까다롭기 짝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차라리 회색이 마음이 편했다.

하얀색이나 검은색이 간단히 자신의 색깔을 잃어버리는 이유는 순수하기 때문일 수도 있었고, 단순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다르게 생각해보면 흰색이나 검은색 모두 까다로운 것뿐일 수 있었다. 흰 옷이나 검은 옷을 자주 입은 사람들이 깔끔해 보이기는 하지만 은연중에 결벽성과 완벽주의자의 분위기를 풍긴다고 느끼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 흰 옷이나 검은 옷을 지저분하고 추레하게 입는 사람에 대한 인상은 말할 것도 없다. 너무도 당당하게 자신의 결점을 드러내는 모습에 오히려 보는 사람을 당황스럽게 만들어 버리는 거였다.

언제부턴가 남자의 옷장은 조금 더 다양한 색깔의 옷들로 채워졌다. 남자의 결벽성이 흰색과 검은색을 멀리하게 했다는 것은 하나의 모순이었다. 남자는 가끔 완벽하지 못하지만 완벽하려 노력하는 쪽과 완벽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고 완벽함을 상징하는 것들과 거리를 두는 쪽 가운데 어느 쪽이 더 골수의 완벽주의자인 걸까 하는 생각을 했다. 한쪽은 자신이 완벽주의자라고 말하고 다니는 완벽주의자일 것이고 다른 쪽은 자신은 완벽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하고 다니는 완벽주의자라는 차이 밖에 없지 않은가 하는 식의 결론에 닿았다. 흰 색이나 검은 색을 의식하지 않고 멀리 하는 사람들과 달리 고의적으로 흰색과 검은색을 피한다는 데에 완벽주의의 함정이 있었다.

남자는 자신에게 흰색과 검은색이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받아들인 것처럼, 스스로의 불완전한 완벽주의도 받아들였다.

“그때가 시작이었는지도 몰라.”

남자의 혼잣말이었다.

남자의 말처럼 뭐든 받아들이려고 하는 지금의 태도가 굳어진 것은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던 그 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보다 더 오래된 습관이 있었다. 그것은 안에 있는 마음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었다. 남자는 좋다거나 싫다거나 하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것을 어려워했다. 단순하게 ‘내가 조금 더 노력하면 되겠지’하는 식으로 생각했고, 고치고 바로잡아 나가는 게 자기 몫의 일이라고 생각했다. 남자는 마른 스펀지처럼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받아들였다. 그리고는 역시 마른 스펀지처럼 간단히 젖어버렸다. 하지만 스펀지는 물기를 받아들이더라도 머금고 있지는 못한다. 그 무엇도 자신의 것으로 하지 못한다. 스펀지의 입장에서 물은 자신을 거쳐 갈 뿐인 의미 없는 것이었다. 한차례 쥐어짜는 것으로 스펀지 안의 물은 대부분이 빠져버린다. 바람이라도 한두 차례 불고 나면 그나마 남은 수분도 날아간다. 스펀지는 다시 텅 비어버린다. 받아들임과 동시에 잃어버릴 마음의 준비를 하는 거다.


남자는 받아들인다는 것이 내 것으로 한다는 것과는 다른 거라고 생각했다. ‘내 것’은 빼앗기거나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이었다. 내 것으로 하기 위해서는 물리적으로든 심리적으로든 그것을 들여놓을 공간을 만드는 수고를 거쳐야만 한다. 쉬운 예로 상대를 내 것으로 여기는 연애와 받아들인 것으로 여기는 연애의 차이를 들 수 있다. 상대를 내 것으로 하기 위해서는 그에 대한 보상으로 자신 안에 상대만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야만 한다. 그 공간에는 그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고, 그 사람이 있을 때 의미를 갖는다. 만약 그 사람과 헤어져 그 공간이 비어버린다면 문에 달린 자물쇠를 걸어 자신조차 들어갈 수 없게 만들어버린다. 상실은 고통을 낳고 슬픔을 느끼게 했다. 하지만 받아들인다는 것은 조금 더 홀가분한 것이었다. 상대방에게서 받아들일 수 있는 것만 받아들이면 되는 관계라면 그 사람이 떠나더라도 폐쇄된 공간을 만들지 않아도 된다. 그곳은 처음부터 비어있었고, 상대방이 사라짐으로써 원래대로 돌아갈 뿐 무엇을 잃어버린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별의 아픔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가슴에서 울린다는 공허한 소리는 자물쇠를 걸어둔 문을 두드리는 마음의 소리였을 거라고 남자는 막연히 상상하고는 했다. 그것은 그리워할 수 있는 대상이 있는, 그리움이 보내는 신호였을 거였다. 남자는 자신의 가슴에서 울리는 소리에도 귀 기울이고는 했다. 공허한 소리가 났다. 그러나 그 소리는 탁 트인 하나의 공간을 울리는 소리라는 게 달랐다. 남자의 마음의 소리에는 그리움이 없었다.


때때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은 좋은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의 기회이자 계기가 되어주었다. 얼마 동안은 색다른 자신과 마주하는 즐거움도 느꼈다. 하지만 그런 색다름은 언제나 오래가지 못했다. 마치 스펀지가 받아들인 물처럼 어우러지지 않고 겉돌고는 했다. 일에서도,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더 깊어지지 못하고 오히려 멀어지기도 했다.

남자는 자신이 생각하는 ‘받아들임’이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떨쳐내지 못했다.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지만 조금 다른 것만은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계기는 ‘경청’이라는 단어를 새삼스레 알게 되면서였다. 경청은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미덕으로 여겨진다.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말에 귀 기울이고, 그 이야기 속에서 그 사람의 마음을 읽어내는 능력이 뛰어나다. 사람들은 이런 능력을 일컬어 ‘공감’이라고 한다. 그 사람의 말과 상황에 공감하기에 그 사람에게 맞는 위로의 말과 조언을 해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경청은 그 사람의 말과 상황을 ‘받아들이는 과정’인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받아들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 비춰 한 번 더 생각해보는 과정을 통해 ‘공감’을 낳았을 것이다. 결국 남자의 받아들임은 반쪽짜리였던 셈이었다.

남자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와 상황 등을 받아들였지만, 자신의 마음에 비춰보지는 않았다. 처음부터 그럴 마음이 없었던 것인지 언제부터인가 그러지 않게 되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결론적으로 전혀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해 왔음은 분명했다. 마치 흰 옷에 때를 묻히기를 두려워하고, 검은 옷에 먼지가 묻는 것을 질색했기에 흰 옷도 검은 옷도 멀리하게 된 것처럼 관계에 있어서도 거리를 둬왔던 거였다. 남자는 불완전한 완벽주의자였다(9화 참고). 완벽함은 불완전할 수 없으므로 이미 전제부터 모순으로 가득했던 셈이다.

물리적인 거리는 걷고 뛰는 것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음의 거리를 어떻게 좁혀야 하는지 남자는 알지 못했다. 단순히 받아들였다가 보내기를 반복해왔을 뿐이었다.

남자는 텅 비어있었다. 텅 비었기에 받아들임과 내보냄을 무의미하게 반복할 뿐이었다. 그래서 남자는 연애를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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