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우산일 수 없는 슬픈 아픔

감정을 품은 풍경을 수집합니다

by 가가책방
KakaoTalk_20180906_003209370.jpg 어느 비오는 날 망가져 버려진 우산_1

우산 하나가 있습니다.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느냐 할 지 모르지만 이 우산은 비 오는 날에만 쓸모가 있었죠. 편의점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저렴한 우산. 자동으로 펼쳐지거나 접히지 않는 우산. 예쁜 색깔도 무늬도 없이 밋밋한 검은 우산입니다.

어느 소나기 내리던 저녁, 우산 없이 집을 나섰던 이에게 팔린 우산은 여름 내내 비가 오기만 기다립니다. 하지만 주인은 좀처럼 우산을 꺼내주지 않죠. 비가 많이 오는 날에는 더 크고 넓게 펼쳐지는 장우산을 가지고 나갑니다. 비 소식을 미리 알게 된 날에는 작게 접혀 가방에 쏙 들어가는 자동 3단 우산을 가지고 나가고요. 게다가그 해 여름은 좀처럼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우산은 쓸모 없이 구석을 지켰지요. 6월이 가고, 7월이 가고, 8월도 마지막 주에 가까웠을 무렵의 일입니다. 태풍이, 아주 강한 태풍이 올라온다는 소식이 들렸죠. 그날 아침 주인은 처음으로 우산을 들고 집을 나섰습니다. 긴 기다림이 무의미하지 않았다는 기쁨도 잠시, 비는 아직이지만 심상찮은 바람에 우산은 겁이 나기 시작합니다.

"이 바람에 비가 섞여 내린다면 나는 주인을 지킬 수 있을까?"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우산은 잘 알고 있습니다. 지켜야만 하는 거니까요. 신발이나 가방, 바지나, 어깨는 어쩔 수 없더라도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야 하니까요. 점심 시간이 가까웠을 때쯤 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부슬부슬한 비가 바람을 타고 빗금처럼 내립니다. 그리고 점심 시간. 평소라면 동료들과 밖으로 나섰을 주인이 어딘가에 전화를 합니다.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요. 오늘 주인의 점심은 배달음식입니다. 이해 못할 일은 아닙니다. 점심 먹는다고 나갔다가 옷이나 신발이 젖는다면 남은 오후 내내 찝찝함을 견뎌야했을 테니까요. 우산 역시 그런 건 싫습니다. 비를 맞아 젖은 채로 접혀 오후 내내 우산 꽂이에 꽂혀 있다가는 조만간 녹이 슬고 말테니까요. 우산에게 녹은 치명적입니다. 우산 살을 약하게 할 뿐 아니라 주인 손에 녹을 묻힐 수도 있고, 녹슬어 날카로워진 날이 우산에 구멍을 내거나 심하게는 찢어버리는 일도 벌어지니까요. 쉬운 말로 우산에게 녹은 재앙입니다. 사형 선고입니다. 비가 금세 그칠 것 같진 않으니 퇴근 시간에는 주인 손에 들려 비를 가리는 영광을 누릴 수 있을 겁니다. 출근이 있으면 퇴근이 있고, 비가 내리면 우산을 펴게 될 테니까요.

오후가 무척 깁니다. 주인에게도 그런가 봅니다. 역시 우산과 주인은 일심동체로군요. 퇴근 시간, 급한 일은 마쳤는지 주인이 일어 납니다. 창 밖을 슬쩍 내다보는 듯 하더니 "어어, 지금 비 그쳤네요, 얼른 퇴근들 하시죠."합니다. 잠깐 비가 그친 모양이네요. 큰 비가 오려나 싶습니다. 주인은 잊지 않고 우산을 챙깁니다. 가방을 메고, 우산은 왼손에 들었습니다. 밖으로 나오니, 정말. 비가 그쳐있네요. 하늘도 무심하시지. 언제 다시 주인이 손에 들고 나올지 모르는 우산은 얼마쯤 우울해집니다. 우산 마음에 바람이 붑니다. 원망이 먹구름처럼 입니다. 지하철을 타도 되고 버스로도 갈 수 있는 주인은 혹시라도 비가 내리면 번거로워질 걸 생각해 버스를 탔습니다. 오, 이런. 버스가 두 정거장을 움직였을 때부터 비가 쏟아지기 시작합니다. 우산이 울고 싶어질 수 밖에요.

빗길에도 버스는 40여 분을 무사히 달려 주인을 목적지에 내려놓습니다. 훌륭합니다. 자기의 쓸모를 완수한 버스는 왠지 의기양양해 보이는군요. 비는 여전히 내립니다. 버스에서 내리면서 주인은 우산을 활짝 폈습니다. 드디어, 마침내 우산은 쓸모를 되찾습니다. 긴 기다림이었죠. 기다림이 참 길었습니다. 그나저나 바람이 심상치 않습니다. 한쪽으로만 불어준다면 거뜬히 버틸 수 있으련만, 이리저리 방향을 돌아가며 부는 통에 몇 걸음 걷기도 전에 주인의 신발이며 가방, 바지와 어깨가 모두 젖어 버렸습니다. 우산 실격인 걸까요.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우산에게는 포기라는 선택지가 없으니까요. 모든 우산은 파괴될 지언정 패배할 수 없는 겁니다.(노인과바다)

아, 바람이, 바람이 모든 걸 망쳤습니다. 모든 걸 망가뜨렸습니다. 모든 게 부서졌습니다. 바람이 뒤집고 비가 몰아닥치며 우산을 파괴해버렸습니다. 그 잠깐 사이에 흠뻑 젖어버린 주인은 우산을 길 바닥에 내팽개치더니 달리기 시작합니다. 200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집으로, 이제 더는 쓸 데 없어진 우산을 버리고 달려 갑니다. "재수가 없으려니까, 재수가 없어서, 재수도 없네." 그런 생각을 하고 있겠지요. 아니면 어차피 비에 맞는 거 무더웠던 여름을 생각하며 시원하다 여겼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우산은 철저히 파괴되어 바닥에 누웠습니다. 비를 가리던 우산이 비에 젖었습니다. 쓸모 없는 우산, 파괴로 끝나지 않고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유일한 의미, 무이한 쓸모, 비에서 주인을 지키지 못한 우산은 파괴되고 패배하여 버려지는 걸로 길지 않은 삶을 끝내고 말았습니다. 이상이 사진 속 우산이 품고 있을지 모를 이야기입니다. 우산은 말이 없으니, 대신해 봤는데 괜찮았던 걸까요. 괜찮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요, 이미 우산은 파괴되고 패배한 채 어느 청소부의 쓰레기 봉지에 담겨 불태워지거나 깊은 곳에 묻혀있을텐데요, 뭘.


-끝-


취미라고 하면 이상한 취미겠지만 버려진 우산 사진을 찍는 취미가 있습니다. 한동안 너무 처량한 취미다 싶어 그만두었다가 이제는 처량한 마음으로 바라보지 않을 수 있게 되었기에 가끔, 마음이 내키면 사진으로 남기고 있죠.

우산에게 존재 의미는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을 비와 눈에게서 지켜내는 겁니다. 아무리 크고, 비싸면서, 튼튼한 우산이라도 주인이 젖는 걸 막아주지 못하면서 쓸모 있다고 느낄 수 없겠죠. 그런 의미에서 비가 오는 날은 우산이 쓸모 있어지는 유일한 기회인 셈입니다. 그런 날, 하루 종일 비가 내리던 어느 날 저녁 망가진 채 길 위에 버려진 우산은 얼마나 서러웠을까요.


가장 쓸모있는 날에 망가져 버려진 우산, 세상에 머물던 시간 동안 몇 번쯤은 쓸모 있었기를 바라며.

우리를 생각합니다. 사람의 쓸모는 우산처럼 단순하고 명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흔히 누군가의 우산이 되어주고 싶다는 표현을 쓰고는 하죠. 그런 의미에서 우산을 소중히 써 주세요. 3000원짜리 편의점 우산이거나 30000원짜리 자동우산이거나, 당신의 손을 잡고 쏟아지는 빗속을 거닐던 시간을 최고의 순간으로 알고 살아가는 모든 우산들을. 그 마음들을 헤아려주세요.


너의 우산일 수 없는 슬픈 아픔, 그게 반드시 사람만의 마음이 아닐 수 있음을, 기억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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