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심심풀이땅콩
우리는 언제나 별 것 아닌 일에 발목을 잡힌다. 이걸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면서도 거듭 잊어버리는 건 그게 별 것 아니기 때문이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속담은 상투적으로 읊으면서도 부자가 되지 못하는 이유도 다르지 않다. 티끌은 하찮다. 별 것 아니다. 별 것 아니니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 결국 티끌은 모이지 못하고 티끌로 흩어진다. 별 것 아닌 걸 별 것으로 바꾸지 못하는 동안, 티끌은 언제까지나 하찮은 티끌에 머문다. 별 것 아닌 일에 거듭 발목을 잡히는 삶은 별 것 아닌 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하찮은 티끌로 흩어진다. 30년을 살던 50년을 살던 100년을 산대도 다르지 않다. 별 것 아니다. 삶이 별 거 없었다면 그는 살아가며 별 것 아닌 것에 발목을 거듭 잡혀가며, 별 것 아닌 것을 붙잡는데 시간을 쏟았을 뿐인 거다. 정말 별 거 없다. 결국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지금 어쩌면 아무 의미도 없을 말을 몇 줄이나 내리 적었다. 무슨 소리인지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은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못 되는 이야기다. 하지만 한 문장이라도 아니, 한 단어라도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 사람에게는 얼마간의 두려움을 불러일으킬지도 모르는 이야기다. 지껄이고 끄적일 자유가 있는 나는, 시간만 빼앗아간 몇 줄을 향한 원망에도, 일말의 두려움이 불러온 공포에도 책임을 느낄 필요가 없으리라. 실제로 일말의 책임이나 유감도 느끼지 않는다. 내가 감정이 없다거나 공감 능력을 상실한 사이코패스라서가 아니다. 이 모든 게 별 것 아니기 때문이다. 너무나 흔히 일어나고 겪는 하찮은 일이기 때문이다. 사소한 욕설, 폭언, 혐오, 때로는 폭력까지도 사람들은 간단히 용납한다. 용서하지 못하면서 받아들인다. 티끌처럼 흩어져 사라질 거라 믿는 것처럼. 설명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간단하지 않은 문제라는 걸 안다. 내가 아는 걸 어떻게 증명할 거냐고 묻는 건가? 장담하는데 한 가지 예만 들어도 당신은 납득하게 될 거다.
거창한 일도 아니다. 흔히 일어나는 일이고, 몇 번이나 경험했을 일이다. 감이 오는지. 수수께끼를 낼 생각은 없었다. 이런 거다. 당신은 언제 눈물 흘리나? 슬플 때 눈물 흘린다? 정답이다. 그리고 또 언제 눈물 흘리나?
아, 이런. 수수께끼를 낼 생각이 없다고 해놓고 이러고 있었으니.
내가 겪은 일이다. 공감하지 못할 수도 있으니 너그럽게 들어줬으면 한다. 언제나 티끌이 화근이었다. 고작 티끌 주제에 눈에 들어가면 어찌나 따갑고 괴롭던지, 슬퍼서 운 적보다 티끌 때문에 운 날이 더 잦았다. 손에는 쥐어지지도 않고 툭툭 털면 떨어져 나가는 하찮은 티끌 주제에 망막에는 어찌 찰싹 달라붙는지 한참이나 눈물을 쏟았던 일도 적지 않았다. 한결같이 거창한 게 없듯 한 없이 사소한 것도 없다. 사소한 무신경함이 누군가에게는 눈에 박힌 유리 조각처럼 치명적일 수 있다는 얘기다.
무슨 소린지 알지도 못하고 알고 싶지도 않은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못될 이야기를 또 몇 줄이나 늘어놓고 말았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한 문장이라도 아니, 한 단어라도 마음에 걸리는 게 있는 사람에게는 이 또한 얼마간의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였을 거다.
이제 정말 솔직해지기로 하자. 사실 오늘은 처음부터 혼잣말을 잔뜩 늘어놓을 생각으로 얘기를 시작했다. 사실이라고 진실이라고 장담하거나 맹세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듣건 말건, 믿건 무시하건 아무 상관없다. 모든 건 자유다. 자유! 자유란 무엇인가! 누리는 거다!! 눈치 볼 거 없다. 어차피 우리는 아는 것만 두려워하거나 겁낼 수 있을 뿐이다. 나는 당신을 모르고, 당신은 나를 모르니 두려워할 이유도, 겁낼 필요도 없다. 오히려 마음껏 웃어주길 바라는 마음이다. 자유다! 자유!!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야겠다. 시작이자 끝이다.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어쩌면 결론이다.
알게 된 게 하나 있다. 내가 두려워하는 것, 겁낼 수 있는 것의 정체다. 반박해도 좋다. 하지만 잊지 말길. 그 반박을 나는 듣지 못한다. 그러니 반박하고 싶어도 반박하지 못해서 괴로워하지 말고 새겨듣기를 권한다. 아, 본의 아니게 강압적으로 굴고 말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스스로 해결하고, 치유하기를. 이제부터 일어나는 일의 모든 책임은 내가 무엇을 적었는지 '알게 될' 당신의 책임이라는 걸 기억하기를.
인간은 두려워한다. 공포를 느낀다. 무엇을? 무엇에? 인간은 무엇을 두려워할 수 있을까? 이런 말을 익히 들어왔을 거다. '인간은 미지의 것을 두려워하기 마련이다.' 동의하는가? 인간이 알지 못하는 것, 모르는 것을 두려워한다는 말에 동의하는가 말이다. 나는 동의했었다. 아니, 정확히는 동의한다고 믿어왔다. 하지만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나는 '모르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알지 못하는 것'이 겁나지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두려움도 느꼈고 겁도 났었다.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다고 불평할 생각이라면 잠시만 그 불평을 참아주길 바란다. 내게도 진정할 시간이 필요하다. 진정하고 나면 다 얘기해 줄 테니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기다려주기를.
내 급한 성격이 결론부터 말하라고 보채고 있으니 결론부터 적자면 언제나 내가 두려워하고 공포를 느낀 건 '앎',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모르는 것, 알지 못하는 것이 두렵고 공포스러운 듯 느껴졌지만 그건 결과였을 뿐 원인은 아니었다. 설명하기 어렵지만 이 모든 건 사회적인 이유, 관계에서 시작된다.
자, 다시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보이지 않는 걸 볼 수 없다."
이 말은 사실인가? 물론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보이지 않는 걸 어떻게 볼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이 말은 어떤가?
"우리는 먹어보지 않은 음식의 맛을 알 수 없다."
이 말은 사실인가?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먹어보지 않고 어떻게 그 맛을 알겠는가.
물론 방법은 있다. '추측'하거나 '상상'하는 거다. 다른 방법도 있다. '학습'하는 거다. 인간이 지닌 능력, 학습하고 추측하고 상상하는 능력을 활용한다면 우리는 모르는 것을 알 수 있게 되고, 볼 수 없는 걸 보게 되며, 먹어보지 않은 음식의 맛도 알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이 모든 건 어디까지나 실제 경험이 아니라 상상이고 추측이며 학습의 결과다. 실제로도 그럴 거라는 장담은 할 수 없다.
여기가 두려움과 공포가 시작되는 지점이다. 우리는 앎으로써 비로소 두려움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알게 됨으로써 공포를 품게 된다.
오늘은 이야기를 시작한 날이니 여기까지만 하기로 하자. 아, 그전에 앎을 계기로 공포를 느끼게 되는 유명한 예 한 가지를 들려줘야겠다. 익숙한 일일 테니 가벼운 마음으로 상상해보시기를.
당신은 지금 폭 30센티미터짜리 나무 위를 걷고 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30센티미터는 아주 넓은 건 아니지만 걸음을 옮기기에는 충분하다. 이 사실은 당신이 알고 있는 사실과 다르지 않을 것이며 부정하지도 않으리라. 자, 이제 눈을 감자. 당신은 계속해서 한 걸음, 한 걸음, 또 한 걸음을 내딛는다. 어려운 건 하나도 없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이미 눈치챘겠지만 상황이 변했다고 생각해보자. 생각만 그런 게 아니라 실제로도 변했다고 하자. 당신이 걷고 있는 나무는 지금 지상에서 100미터 높이에 있는 건물과 건물 사이에 놓여있다. 당신은 지금 허공을 걷고 있으며, 당신이 디딜 수 있는 공간은 '고작' 폭 30센티미터에 불과한 나무뿐이다. 허공에는 떨어지는 당신을 받아줄 어떤 보호 장비도 없다. 조금만 흔들려도, 한 발만 잘못 디뎌도 당신은 100미터 아래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치게 된다. 그다음은? 부정하고 싶겠지만 없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폭 30센티미터짜리 나무 위를 걸어 무사히 건너가는 것뿐이다.
두려운가. 공포를 느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정상이다. 사소한 조건 하나만 - 사소하지 않을 수 있다는 걸 안다 - 달라져도 상황 전체가 달라진 것과 동일한 변화가 일어난다.
사소한 행동, 작은 변화, 하찮은 계기는 사실 너무나 많은 걸 바꿔놓는다. 당신이라는 존재는 결코, 사소할 수도 하찮을 수도 없다. 그러나 모든 이야기는, 거의 모든 이야기가 사소한 일에서 시작된다. 우연히 눈에 들어온 어떤 책을 읽게 되는, 그런 사소한 일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