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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가책방 Nov 01. 2018

[간단리뷰] 죽어가는 짐승

뒤틀린 욕망의 추함과 역겨움의 극한

무엇을 숨기랴!
읽는 내내 불쾌함을 떨치지 못했고 읽고 나서도 고개를 젓게 만든 소설이다.

필립 로스를 더 읽어봐야 알겠지만 마음에 맞는 작품과 아닌 작품에 격차가 너무 크지 싶다.

소재가 결정적이다. 70세 노교수의 고백 형식인데 그 고백이라는 게 강의에서 만난 여대생을 유혹해 섹스를 즐겼던 과거다. 수십 년 간, 몇 명인지도 모를 제자와 관계를 가져온 뒤틀린 성욕으로 똘똘 뭉친 걸로 밖에 보이지 않는 추하게 늙은 남자.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겠다. <죽어가는 짐승>이라니. 나이 들어 쇠약해지는 남자의 비참함에 동정이라도 보내달라는 걸까.

강간은 아니었다고 변호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그루밍 성범죄'라는 정의조차 없었겠지. 1960년이나 70년, 많이 양보해서 80년 대라고 해도 얼마나 달랐겠는가.


스무 살을 넘긴 성년의 여성, 합의된 성관계라는 설정도 전부 사회적 비난을 의식한 작가의 의도적 장치였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그런 게 있기는 하겠다. 몰랐다, 무지했다는 항변도 할 수 있다. 그러나 지극히 추악한 욕망을 품고 의도적으로 접근해, 가장 성공률 높은 수단을 활용해서 사냥감을 손에 넣는 비열함. 그 악랄함은 조금도 줄일 수 없다.

노교수라는 지위를 십분 활용한다. 권위와 연륜, 경험과 경력. 젊은 여자가 '어쩌면' 동경할 수 있는 요소들을 그는 갖췄고 능숙하게 효과적으로 활용한다. 나이차가 40에 가깝기에 상대는 방심하기 마련이고, 주인공을 통해 '노인과의 섹스는 어떨지 궁금해 하는 젊은 여자도 있다'고 말할 정도인데 어련할까.

필립 로스 자신의 경험이건, 상상이건, 환상이건, 욕망이건, 이런 이야기는 혼자 두고 읽었으면 좋았을뻔 했다.

 지금보다 뭘 몰랐던, 좀 더 혈기 왕성하고 호기심에 넘쳤던 때에 읽었다면 전혀 다른 평가를 내렸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은 한다. 숨겨두고 몰래 읽으면서 환상을 키우고, 욕망을 삭였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없게 됐다. 이 책을 읽은 건 지금의 나이고 쥐어짜서 만들 수 있는 한두 가지 이유를 제외하면 이 책이 굳이 한글로 번역되어 종이를 낭비하면서 인쇄될 필요가 있었음을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한두 가지 밖에 떠오르지 않으니 이유를 적을 수는 있겠다.
 첫째로 이토록 적나라하고도 노골적으로 성묘사, 성욕에 구애 받는 남자를 그리기도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 번도 집착을 느끼지 못했던 남자가 쇠약해지면서(성적으로 혹은 육체적으로 죽어가면서) 보이는 집착과 질투, 그가 뿌려대는 파멸의 씨앗들이 너무나 생생했다. 읽는 것만으로 역겨울만큼.
둘째로 그 생생함이, 역겨움이 커질수록 빛의 밝기에 따라 짙어지는 음영처럼 삶과 죽음의 교차가 자아내는 비극성이 극대화 되는 걸 발견했기 때문이다. 필립 로스가 욕망을 쏟아 부을 생각으로 순수하게 자극만을 위해 쓴 작품이 아니었다면 혹은 그게 필요했던 거라면 예술로서, 어디까지나 인간 세계를 초월한 예술의 경지에서 존재해도 될 작품이라는 점.

2018년, 결국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한 채 죽음을 맞은 필립 로스. 그와 그의 작품 전체에 편견을 갖게 되는 일이 벌어지지 않은 걸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다른 작품들, 널리 읽히면서 인정 받는 작품들이 있고, 나 스스로 감동을 느꼈던 경험이 있기에.

욕망은 건강함, 생기, 활력을 상기시키기도 하지만 집요해지고, 더러워질 때 몹시 추해서 역겨워지는 것임을 깨닫는다.

호기심이 동한다면 읽어봐도 좋겠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리 추천하고 싶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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