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3월 1일 이후부터
9권까지 읽으니 이 길고 긴 소설, <토지>의 치명적인 면모 몇 가지가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첫째는 인물들의 삶과 죽음이 몹시 가깝게 느껴지기 시작한다는 거다. 이야기 시작 즈음에는 젊거나, 어리거나, 혹은 태어나지도 않았던 이들이 늙고 병들고 죽어 세상을 떠난다.
만들어 낸 이야기와 현실의 구분이 모호해지는 지점에 닿았다는 이야기다.
한恨, 단 한 글자로 간단히 적히지만 수백만 권의 책에 담은 이야기로도 다 풀지 못할 그 마음들이 생생하게 살아 온다.
1919년 3월 1일, 만세를 외치는 함성이 한반도를 휩쓴다. 서울에서 지방으로 수 개월이나 이어진 저항의 외침. 일제는 그 주동자를 색출하는 동시에 통치 방식에 변화를 주기 시작한다. 상해에 임시정부가 세워지고 독립 운동은 조금 더 체계적으로 은밀하게 힘을 키우며 때를 기다리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9권의 배경이 되는 시기의 이야기다.
간도, 용정을 떠나 진주에 내려와 있던 서희는 마침내 조준구에게서 집문서까지 되찾는다. 그러나 기쁨보다 평생이라고 할만한 시간을 사로잡았던 복수가 너무 간단히 끝났음에 허탈함을 느낌과 동시에 기어이 돌아오지 않은 길상을 향한 원망에 사로잡힌다.
월선이가 죽고 서희를 따라 진주로 돌아온 용이와 임이네 홍이 사이의 갈등은 심상치 않은 단계를 넘어 극으로 치닫는다. 거기에 용이가 갑자기 쓰러져 자리를 보전하는 신세가 되면서 어떤 형태로든 멀지 않아 결말이 지어질 것을 암시한다.
구천이, 김환은 동학의 잔당 세력과 함께 일제에 대항을 계속하고 있지만 내부의 갈등, 방식의 차이에서 오는 다툼을 계속하고 있다. 자객이 찾아오기도 하고, 앞으로 나아가야할 저항의 방식을 두고 시국을 살피며 논쟁을 하기도 한다.
갈등과 긴장이 최고조에 달하는 시점은 김평산의 둘째 아들, 김한복이 독립 운동 자금을 운반하는 역할을 맞아 간도땅 용정으로 건너간 이후라고 생각한다.
단순한 친일파도 아니고 가장 적극적으로 열심히, 효율적이며 철저히 독립지사들을 잡아들이고 죽이면서 출세를 이룬 형, 김거복, 김두수를 만나러 가는 길이니 말이다.
악랄한 친일파를 형으로 둔 독립운동을 돕는 동생. 거기에 깊은 비극이 있었다.
가장 안타까운 장면은 기어이 김두수의 손에 잡힌 심금녀, 수냥의 죽음이다. 모욕하고 욕보여 승복시키려는 김두수에 저항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거다.
소설 속에서는 한 사람, 한 장면이지만 실제 역사에는 얼마나 숱한 심금녀, 김한복이 있었을까.
주목할만한 인물로는 명희를 꼽는다. 임명빈, 서희가 땅과 집을 되찾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임역관의 외동딸로 유학까지 다녀온 신여성이다.
오빠 임명빈은 스물다섯이 되도록 시집갈 생각을 하지 않는 노처녀 여동생을 억지로라도 시집 보내려고 한다. 명희가 마음으로 사모하는 인물이 이상현이라고 꼬집어 말하며 마음을 꺾으려 한다.
당시 신여성을 향한 뒤틀린 시선, 못마땅함을 보여주려는 시도임과 동시에 그 이후의 어떤 행동들을 통해 메시지를 전하려할 것임은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한 가지가 자꾸 마음에 걸린다. 작가, 박경리 선생님을 향한 의문이다.
박경리 선생님은 '사랑'이 뭐라고 생각했던 걸까. 용이와 월선이 사이에는 분명 사랑이라고 할만한 어떤 진실된 마음, 이루지 못했으니 공통된 사랑의 이상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외에, 짝사랑하는 여자들의 모습이나 여자를 대하는 남자들의 모습에서 사랑이라는 걸 찾기 어렵다는 생각이 자꾸 커지는 거다.
사랑, 물론 알 수 없는 것이고 정의내리기도 불가능한 주제다. 그러나 지금까지 읽은 바 내놓을 수 있는 감상 하나는, 토지에 없는 것 하나, 결정적으로 빠진 것 하나가 사랑이 아닌가 하는 거다.
아직 갈 길이 멀기에 이 주제는조금 더 지켜보기로 하자. 자, 다음에는 어떤 일들이, 누구에게, 어떤 모습으로 벌어질텐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