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0호』_움베르토 에코_열린책들
안녕하세요. 북큐레이터 서동민입니다.
책을 읽다 보면 오탈자가 종종 눈에 들어오죠.
글을 써보면 알겠지만 교정에 어지간한 노력을 들이지 않고서는 오탈자 없는 글을 쓰기 쉽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교정이나 교열도 사람이 하는 일이니 실수가 있을 수 있고요.
지금은 그만뒀지만 과거 한 때 오탈자를 찾는 대로 공개되어 있거나 찾아낸 출판사 메일로 열심히 리포트를 보내던 때가 있었습니다. 책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기여한다는 생각에 보람을 느끼기도 했죠. 하지만 몇 년 하다 그만뒀습니다.
왜 그만뒀는가?
첫째는 오탈자 리포트를 생각보다 반기지 않는 출판사의 태도였습니다. 적극적으로 수용하거나, 감사를 표현하는 출판사도 있었지만 더 많은 출판사에서 무반응, 형식적 수용에 그치는 경험을 하다 보니 의욕이 생기지 않더군요.
둘째는 오탈자를 고쳐서 출간하려면 초판을 소진해야 하는데, 생각보다 초판을 소진하고 중쇄 할 수 있을 듯한 책이 별로 없었던 겁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재쇄 하게 되면 꼭 반영하겠습니다."라는 답을 받아도, 길이 막막하더군요.
셋째는 번거로움, 개인적 귀찮음이었습니다. 사실, 오탈자를 인지한다는 건 그 단어 혹은 표현, 문장이 잘못되어 있으며 어떻게 바로 잡아야 하는지 대략 예상을 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어색하거나 잘못된 표현을 발견했다 해도 스스로 교정해서 독해할 수 있다는 거죠. 오탈자를 기억하려면 메모하거나, 사진으로 남기거나 어떤 식으로든 기억을 위한 기록을 해야 하는데 그게 의외로 번거롭게 느껴진다는 겁니다. 출판사에서도 반기지 않을 거 같고, 재쇄 한다는 보장도 없으며, 번거롭기까지 하다면 그만둬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새로 오탈자 혹은 어색한 표현 혹은 맞는지 틀린 지 궁금한 부분들을 찾고, 기록하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마음먹었습니다. 이유는 '변덕' 정도면 충분하겠고, 어디까지 찾을 수 있을지 스스로의 한계 혹은 가능성을 시험해보는 나름의 재미도 있을 듯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시작하는 오탈자 리포트, 통칭 '오탈자 탐험대'(아직 1인이지만).
첫 번째 책은 움베르토 에코의 마지막 소설로 10월 말, 열린책들에서 출간한 『제0호』입니다.
오탈자라는 생각에 공감하거나 혹은 다른 의견이 있는 분은 언제든 댓글 남겨주세요. 소통 환영입니다.
오탈자 탐험을 시작합니다.
2018년 10월 30일 초판 1쇄 기준.
띄어쓰기는 찾지 않았습니다(저도 자신이 없거든요).
1. 69페이지 12번째 줄.
그런데 가속에 걸리는 시간이 9.4초나 되고 무게는 고작해야 1천2백킬로미터를 조금 넘기는 수준일 뿐만 아니라, 최고 시속도 210킬로미터밖에 되지 않아.
/제가 이상하게 생각한 건 먼저는 무게의 단위를 '킬로그램'으로 잘 쓰다가 오탈자 부분 바로 앞에서 '킬로'로 쓴 후에 '킬로미터'를 쓰게 되었던 부분입니다. 왜 굳이 바로 앞에서 '킬로'로 줄여 썼는지, 바로 뒤에 속도 단위로 '킬로미터'가 등장함에도 어색함을 느끼지 못한 이유는 뭐였을지, 지금도 개인적으로 궁금해하고 있습니다.
2. 117페이지 17번째 줄.
다른 한편으로 당신이 말했듯이 우리는 삼부회나 코사 노스트라나 카모라나 은드란게타 같은 범죄 조직에 맞서 싸우는 것입니다.
/삼부회는 검색해보면 '프랑스 세 신분(귀족, 가톨릭 고위 성직자, 평민)의 대표자가 모여 중요 의제에 관하여 토론하는 장, 신분제 회의'라고 위키백과에 나옵니다. 갑자기 왜 삼부회와 싸우게 됐나? 소설 배경이 이탈리아인 줄 알았는데 왜 프랑스?라고 생각하기 전에 '당신이 말했듯'에 주목해서 앞에서 뭐라고 했는지 살펴봅니다. 윗부분은 시메이라는 인물의 말이고 '당신'은 마이아라는 인물입니다. 114페이지에서 마이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 식당은 삼합회나 마피아나 카모라 같은 범죄 조직에 딸린 가게예요."라고요. 자, 해결.
3. 122페이지 20번째 줄.
아마도 당신이 유명 인사들의 로맨스를 다루던 시절에는 이런 기사든 저러 기사든 매일반이었을 겁니다.
/인간의 뇌는 너무나 뛰어나서 오류를 스스로 정정하면서 독해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소한 실수, 조금 긴 인물의 이름 순서, 지역 명, 익숙한 표현이 조금 바뀐다거나 틀려도 인지하지 않는다고요. 그런 이유에서 생긴 사소한 실수가 아닌가 합니다. 혹시, 깊은 의미가 있는 듯하다면 조언을.
4. 170페이지 7번째 줄.
더 앞서 1944년 2월, 3월, 8월에도 무솔리니와 면담했지만, 어느 때에도 이토록 건장해 보이지는 않았다.
/이 부분은 확실히 오탈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러 각도에서 들여다봐야 하는 부분입니다. 일단 이 부분에 적당하다고 생각하는 표현은 '건강해'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데요. 첫째는 바로 앞부분에서 거듭 이야기하는 게 '건강'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앞에서도 '그때보다 훨씬 건강해 보였다'라고 적고 있거든요. 둘째는 뒤이어 이어서 혈색, 구릿빛 얼굴, 눈에 생기, 편안한 거동, 체중을 언급하기 때문입니다.
오탈자가 아닐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셋입니다. 하나는 '건장'은 국어사전에서 건장 하다의 어근이라 풀고 있고, 건장하다는 '몸이 튼튼하고 기운이 세다'이기에 건장도 이상하지는 않습니다. 둘은 굳이 '건장'으로 번역을 했다는 건 작가가 쓴 원문이 '건강'과는 다른 단어로 되어있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가능하죠. 게다가 이세욱 번역가 님 이시니. 하나 더, ㅈ과 ㄱ은 혼동해서 쓰기에는 제법 멀리(두 칸이나) 떨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건강하다의 사전적 의미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아무 탈이 없고 튼튼하다'입니다.
오탈자 탐험은 여기까지.
170페이지 이후에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늘 찾아내는 것도 아니고, 어디에나 실수가 있는 것도 아니겠죠.
소설은 뒤로 갈수록 날카로워지고 의미심장한 표현을 늘려갑니다. 메모하고, 적고, 사진으로 남긴 부분이 거의 중반 이후였거든요. 앞부분에서 좋다고, 의미 있다고 생각해서 표시해둔 부분을 두 곳 발췌합니다. 역시 움베르토 에코랄까요. 이 소설, 다시 한번 읽으며 곱씹어 볼만 합니다.
효과적인 암시란 그런 것입니다. 그 자체로는 별로 가치가 없는 사실, 그렇지만 진실이기 때문에 반박되지 않는 사실을 넌지시 말하는 것입니다. /제0호. 95페이지/
아시다시피 오늘날에는 누군가에게 고발을 당하거나 기소를 받게 되었을 때 그것에 응수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가 없어요. 그저 그 고발인이나 기소인의 정당성을 떨어뜨릴만한 것을 찾아내면 됩니다. /제0호. 188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