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시험을 치른 이들에게

지금은 이대로 충분하다는 말 밖에는 할 수 없지만.

by 가가책방

2018년 11월 15일.

2019학년도 수학능력시험일. 한파 없이 맑은 날씨.


쫓기는 꿈을 꿨습니다. 좀처럼 꿈을 꾸지 않는 편입니다. 하물며 쫓기는 꿈이라니, 특별히 드문 일입니다. 오래 전 치른 수능시험이, 그때의 압박감이 되살아났던 걸까요. 새삼스럽게 그럴리가 하면서도 꿈을 꾸게 한 이유가 궁금해집니다. 꿈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쫓아오는 건 생겨난 곳도 이유도 모르지만 살아있는 자들을 쫓으며 그 목숨을 뺏는 괴물 들입니다. 괴물은 크고 강합니다. 빠른데다 영악하기까지 하더군요. 처음에는 둘인가 셋이더니 어느샌가 숫자가 불었습니다. 강을 건너 도망쳐도, 지하로 숨어 문을 닫아도 괴물 들은 쫓아왔습니다.

저도 혼자는 아닙니다. 누군가가 있습니다. 아마, 동료라고 할 수 있을 누군가가. 한참을 도망치다 어떤 건물, 많은 사람들이 있는 건물 가까이 가게 됩니다. 무기가 필요합니다. 손에 들고 있는 짧은 검으로는 괴물을 이길 수 없으니까요. 단단한 나무를, 적당한 길이의 몽둥이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나무가 어디에 있을까. 문득 무기로 가공할 만한 나무가 어딘가 멀지 않은 숲에 있다는 얘기를 들은 기억이 떠오릅니다. 그런데 숲으로 가던 중 쓸만해 보이는 나무 몽둥이를 발견합니다.

하지만 겉보기에 멀쩡했던 나무 몽둥이는 괴물을 한 대 내리치던 순간 부러져 버립니다. 어쩔 수 없이 다시 도망입니다. 동료는 먼저 달려갔고 나는 좀 뒤쳐집니다. 사람들이 있는 곳에 닿습니다. 군중 속에 섞여들지만 괴물 들은 무자비합니다. 비명이, 비명 소리가 가득합니다. 달리고 다시 달리고 계속 달립니다.


탁 트인 곳을 지나 또 다른 건물에 닿습니다. 뒤에서는 여전히, 멀지만 또렷한 비명이 울립니다. 그러다 그나마도 그쳐버립니다. 다 죽은 거겠지요. 계속 달립니다. 이러다가는 지치고 말 거라는 생각이 떠오르고 두려워집니다. 막연하지만 확실한 두려움.

동료는 안전한 공간을 찾아보겠다며 갈라집니다. 나는 뒤에 서 있습니다. 그때 동료가 향한 방향에서 괴물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옵니다. 수십, 수백으로 불어난 작은 괴물들이 보입니다. 동료는 확실한 위험, 분명한 죽음 앞에 있습니다.

나는 소리 지릅니다. 이쪽이라고 훠어이, 어어이 하고. 괴물들은 동료를 지나쳐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뛰어 옵니다. 내가 있는 곳으로. 동료는 그 속을 뚫고 올라가려 애씁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갔을 때 아직 위험을 모르는 많은 사람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곧 괴물들이 들이닥쳤고 나는 뒤로, 건물 뒤로 돌아가 피합니다. 경고할 시간도 도망칠 기회도 그들은 갖지 못합니다. 건물 뒤에는 남자 두 명이 있습니다. 지금의 사태에 관심이 없다는 듯 자신들과 무관하다는 듯 태연하달까 무관심해서 심드렁해 보이는 태도입니다. 그리고 다시 건물 안에 울리던 비명이 그칩니다.

"시체로 가득하겠죠?"남자들에게 묻듯 던집니다. 남자 중 하나가 "특히 등골이 빠진 시체가 많을 거요."합니다. 등골을 빼먹는 괴물. 인간, 척추 동물을 지탱하는 척추를 뽑아 내는 잔혹한 괴물들. 두려움 속에서 건물 앞으로 나갔을 때 다른 이유로 충격을 받습니다. 거기엔 아무도 없습니다. 피도, 시체도, 괴물도 없이 깨끗합니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요. 모두 어디로 사라진 걸까요. 하지만 곧 괴물들이 달려오겠지요. 이렇게 도망치는 데에도 한계가 오겠지요. 언제까지 달릴 수는 없으니 나 역시 죽겠지요.

동료는 어떻게 됐을까요. 죽었을까요, 곧 죽게 될까요. 그때 인식 하나가 꿈 속으로 비집고 들어옵니다.


"이건 꿈이다."

동료를 걱정할 필요도 괴물들이 달려들어 너를 죽여 찢고 삼킬 참사에 떨 필요도 두려워할 이유도 없다. 꿈꾸기를 멈추고 눈을 뜨면 되는 일이다. 새 아침을 새로운 날을 시작하면 된다.


나는 눈을 떴고 꿈 속 괴물도 위협도 두려움도 사라집다. 그러나 안도보다는 더 깊고 무거운 무력감을 느낍니다.


"또 꿈에서 도망쳤다. 맞서지 못하고 도망치고 말았다."

죽음이라는 위협에 시달렸다. 맞서지도 이겨내지도 못했다.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현실에서도 여전히 무력하겠지.


그런 마음에서 오는 무력감이었습니다.



보통 잠에서 깨면 흩어지고 잊히던 꿈과 달랐습니다. 한참 지났어도 생생해서 가슴이 떨리고 조마조마함을 느낍니다. 언제쯤 강해지게 될까. 도망치는 겁쟁이, 무력한 희생자를 언제쯤 그만둘 수 있을까. 꿈에 말하듯 아직 내게는 맞설 용기가 부족합니다. 두려움도 많고 겁나는 일도 많으며 힘도 약합니다. 동료, 뜻, 마음이 맞는 동료가 필요한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혼자는 힘이 드는 법이니까요.


나는 스스로 "나는 큰 존재다", "나는 영향력이 크다", "사람들이 내 글에 공감하고 목소리에 귀기울여 주리라"고 믿지는 못하는 편입니다. 늘 회의와 의심이 확신을 압도하곤 합니다. 그럼에도 거듭 쓰고 다시 쓰는 이유는 나 스스로를 구할 수 있는 최선, 회의와 의심이 안기는 두려움을 이기고 한 걸음이라도 내 삶에 가까워지는 다른 방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입니다. 고작 이 정도가 말입니다. 그럼에도 부끄러움을 느끼지는 않습니다.


나도 우리도 세상 속 무언가에 끊임없이 쫓기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하루가 다 가도록 꿈이 지워지지 않는 드문 경험. 보이지 않지만 그래서 더 치명적인 위기의식, 위협, 위압감. 어쩌면 이 순간에도 쫓기고 있다고 느끼고 있을 모든 이들을 응원합니다. 불안을 느끼고 두려에 떠는 사람들은 남이 아니기에. 또 다른 나, 함께 살아갈 동료, 친구라고 느끼기에.


꿈은 끝나지 않았다.

일단 지금은, 오늘 밤은 편안히 잠자리에 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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