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10년 혁명> 광고 속 시대착오 발견.
드물게 책을 많이 읽은 사람이라 실망할 때가 있다. 그 실망은 책을 읽지 않는, 전혀 읽을 생각을 하지 않는 사람을 대할 때보다 크다. 그토록 많은 책을 읽는데 쓴 엄청난 시간과 기울였을 노력도 덧없이 사람과 세상을 전혀 이해하려 하지 않거나 잘못된 이해를 바로잡으려 하지 않는 사람과 만났을 때 말이다.
흥미로운 기사를 봤다. <안 읽더라도 집에 책 쌓아놓아야 하는 이유>라는 제목. 신현호의 차트남 마지막 기사다. 아마 다양한 분야 차트를 들여다보고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글인 모양이다.
기사 요지는 집에 책이 전혀 없는 아이와 비교했을 때 책이 많은 아이들이 '언어 능력', '수리 능력', '기술문제 해결 능력' 따위에 영향을 주기에 안 읽더라도 집에 책을 쌓아두라는 이야기와 경제, 공간 문제로 집에 책을 둘 수 없을 때 공공 도서관이 중요해지기에 공공 도서관을 확대할 필요성이 있다는 이야기다. - 한겨레-
옳은 말이다. 읽지 않는 이보다는 읽는 이가, 책 자체를 보고 만질 기회가 없는 이보다는 보기만이라도 하고 가까이 있어서 손을 뻗으면 만질 수 있는 이가 더 나을 수 있는 가능성을 하나라도 더 갖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나는 종종 회의감을 느낀다.
"아무리 많이 읽어도 나아지지 않는다면 무엇을 위한 독서인가?"
"시험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을 키워도 지식과 경험을 통섭해 더 나은 생각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단지 도구 하나를 얻었을 뿐 아닌가?"
"빨리 읽는 능력을 키우고 많이 읽어서 지식을 늘리는 게 독서 목표라면 왜 굳이 책인가?"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이 있다.
아무리 많은 책을 읽었다 해도 나와 우리와 세상 속 문제를 발견하고 더 나은 방향으로 스스로를 이끌지 못한다면 많은 책을 쌓아두어도, 얼마나 많은 책을 읽어도 헛 일이 될 거라는 거다. 속이라도 시원하게 치워버리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생각은 오래된 습관이다.
"책을 읽어서, 더 많이 읽어서 나는 나아졌는가?"라는 질문.
"알지 못하던 지식을 얻음으로써 알아차리지 못하던 현실 속 문제를 발견할 수 있게 되었는가?"라는 질문.
"나의 생각, 나의 목소리가 아무리 하찮고, 부족함과 고쳐야 할 부분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일이 될지라도 부끄러움을 감내하고 지금 생각을 쓸 수 있는가? 그렇게 쓴 글이 아무 의미 없다고 해도 계속할 수 있는가?"
나는 너무 생각이 많다. 그렇게 생각할 때도 많다. 누군가는 "그렇게 생각이 많으면 피곤하지 않아?"라며 질색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생각은 나를 괴롭히지 않는다. 번거롭게 할지언정. 의도적으로 끄집어 내야 한다면 수고가 들어갈테고, 하고 싶지 않은 거라면 거부하는 데 기운을 쓰겠지만 자연스럽게 생각이 솟아나고, 그 생각이 흐르는대로 내버려 두는 편이니 말이다.
요즘 자주 하는 생각이 있다.
"말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들어주지 않았던 게 아닌가?"하는 의문이다.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을 본다. 소설 속에도 많고, 현실에도 넘쳐난다. 누군가는 그들에게 이렇게 조언한다.
"얘기를 하셔야 알죠. 목소리를 내세요!"
그런데 사정을 들여다보면 그들이 얘기를 하지 않거나 목소리를 내지 않았던 게 아니라는 걸 금세 알게 된다. 그들은 목이 쉬도록, 터지도록 소리를 지르지만 세상이 듣지 못했던 거다. 마치 주인공과 같은 공간에 있어도 카메라에 비치지 않으면 그 존재를 증명하지 못하는 행인 1이나 사람 2처럼 말이다.
아마 소설 <토지>를 읽고 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평소에는 들리지 않았던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냥 들리기만 하더니 한두 번 더 듣게 되면서는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리고 오늘, 왜 마음이 불편했는지 확실히 인식하게 됐다.
사정은 이렇다.
모든 버스가 그런지는 모르지만 서울 버스에는 정류장 음성 안내 사이에 광고가 있다. 그 광고 중 하나는 이런 내용이다.
"서울아~"
"네, 서울입니다~"
공공주택, 지역 균형발전, 서울페이, 온마을 돌봄.
내 삶을 바꾸는 서울 10년 혁명.
마음이 불편한 부분은 가장 앞 부분인 "서울아~" "네, 서울입니다~"이다.
왜 불편했는가?
"서울아~"하고 부르는 건 남자 목소리, "네, 서울입니다~"하고 답하는 건 여자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분명 예전부터 방송은 나왔을테고 나는 들었으리라. 그러나 오늘은 두 사람이 부르고 답하는 소리를 들으며 토지 속 한 부분이 확실히 떠올랐다.
예를들면 이런 부분이다.
기화라는 기생이 있다. 상현이라는 양반 자제가 있다.
상현이 기화를 부른다.
"기화야~"
기화가 상현에 답한다.
"네, 부르셨어요~"
지나치게 예민하게 구는 걸지도 모른다. 친근하고 부드러운 이미지를 주기 위해 여성 성우를 썼을뿐 어떤 관습적으로 고정된 성역할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궁금해진다. 이 광고를 기획한 사람은 지금 나처럼 느낄지도 모르는 사람을 상상하거나 예상할 수 있었을까?
찾아보니 영상 광고도 있다. 네 명이 서울이를 부른다. 성비만 보면 셋은 남자, 하나가 여자다. 여기에도 별 의미는 없겠지 한다. 나 같은 생각을 하게 될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상상하지 못했을 거다. 나도 상상을 못했으니 말이다. 버스에서 흘려 들은 광고, 그 잠깐의 대사에서 토지 속 기생과 손님 혹은 우월한 지위의 남편과 순종적인 아내를 떠올리는 날이 올 거라고는 말이다.
테드 창 소설 <네 인생의 이야기>를 원작으로 제작된 영화 <컨택트>를 생각해 보자. 외계인이 상상이 안 된다면 내가 모르는 이국의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과 만났다고 생각해 보자. 그것도 아니라면 심한 사투리를 쓰는 다른 지역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해보자. 나는 그들이 하는 말만 듣고 그 외계인을, 외국인을, 다른 지역 사람을 이해했다고 말할 자신이 없다. 단순히 소리를 듣는다고 다 듣는 게 아니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거다. 가나다를 읽을 수 있다고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같은 책을 읽고 전혀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만난 경험이 있는가?
내가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사건, 이론, 경험과 연결시키는 사람들을?
나와 완전히 반대로 이해하고 느끼고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들은?
재미로 읽어도 좋다.
지식을 얻기 위해 읽어도 좋다.
문제 해결, 수리, 언어 능력 향상을 도모해도 좋다.
집에 서재를 두든 공공 도서관을 이용하든 상관 없다.
하지만 굳고, 얼어붙은 인식을 깨뜨리지 못하는 독서라면 그 가치는 반감 혹은 반의 반에 그치는 게 아닐까.
충분한가?
나는 운이 좋았떤 덕분에 어려서부터 꾸준히 책을 읽고, 책에서 얻은 지식과 사상을 비판적 사고와 자아 성찰에 활용해온 사람 몇 명과 알고 지낼 수 있게 됐다. 나의 무식함, 무지함, 좁은 식견과 사고, 무심함을 거듭 거듭 부쉈고 지금도 부수고 있다.
안 읽는 책을 쌓아두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말았으면 한다. 마음에 쌓기를, 생각에 쌓기를 바란다.
눈으로, 머리로 읽은 책은 지식은 될지 몰라도 삶이 되지는 못한다.
지극히 개인의 기록에 그치더라도 좋다.
나는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풍경, 떠올리지 못한 생각을 다만 적어나갈 뿐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