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온라인 서점서 첫 책을 주문하며.

계획과 실행 사이, 구매와 독서 사이.

by 가가책방

안녕하세요. 북큐레이터 서동민입니다.

책을 우선해야 하는 입장에서 생각하면 일탈이지만, 놀이하는 인간(호모 루덴스)으로서는 순전히 즐길 수 있는 취미가 하나 생겼습니다. 지난 연말부터 펜드로잉을 시작해서 2주 남짓 지난 지금, 어느새 책 읽는 시간까지 잡아먹힌 거죠.


여기서, 안타깝지만 지극한 현실로 세상에는 책 말고도 재밌는 게 넘치도록 많다는 걸 실감합니다.


새삼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자, 책과 다른 활동은 한 인간의 삶에서 더 많은 시간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며 승리를 다퉈야 하는걸까?"


대답 앞에 잠시 머뭇거립니다. 지금만을 보면 분명 둘은 뺏고, 빼앗기고 있으니까요.


드로잉을 시작한 계기는 의외로 책입니다.

책, 문학이 드로잉을 낳았죠.

글쓰기는 부담스럽고, 그렇다고 얘기만 하고 끝내기는 아쉬운 마음에서 한 장의 드로잉을 그려보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막상 해보니 드로잉도 재밌더군요. 하나의 대상, 건물을 오로지 종이 한 장, 펜 한 자루로 만드는 하나의 세계.

한 권의 책을 읽는 의미, 하나의 이야기에서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 드로잉에도 있었습니다.

이제 막 시작했기 때문이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책 읽기보다 그리는 게 더 재밌게 느껴졌어요.

책이 드로잉을 경계해야 하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랄까요?

"이 무슨 사투르누스가 제우스를 삼킨 신화 같은 이야기인가? 자신이 낳은 무엇에 자신을 빼앗길까 두려워해서 어떻게 하겠다는 건가?"


엄살을 좀 부렸지만 이 상황을 낙관하고 있습니다. 책을 읽는 의미가 세상으로 향하는 문을 닫는 게 아니라 여는 과정이듯 드로잉 역시 책장을 덮는 게 아니라 열게 하는 계기가 될 거라 믿고 있으니까요.


무언가를 그려낸다는 건 그 대상이 아무리 단순하다고 해도 많거나 적은 분석과 통찰이라는 수고를 들인다는 의미입니다. 뭔가를 보거나 사용하는 과정과는 또 다른 관점에서 대상을 바라보고 생각하게 만들더군요. 불과 2주 남짓 계속하고 있을 뿐이지만 책과 이야기를 바라보는 시선에 얼마쯤 변화가 생겨나고 있음을 느낍니다. 조만간 변화의 흔적들이 담긴 글들이 또 세상에 나오겠지요.


서론이 길었습니다.

자, 올해 처음 온라인 서점에서 무슨 책을 샀다는 이야기인가?

잃어버린시간을찾아서.png
술집학교.png
디디의 우산.png


올해 온라인 서점 첫 구매 도서는 이렇습니다.

민음사에서 출간하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7권과 8권이 드디어, 3년 만에 출간됐다는 소식을 듣고 콜렉터로서 사들이지 아니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9, 10, 11권 출간이 한두 해 안에 이루어질 가능성은 희박하기에 천천히 구매해도 아무 문제 없었을 텐데요.

지금 4권까지 읽은 상태인데 사실, 1년 넘게 읽기를 멈추고 있었더니 줄거리마저 잊어가고 있는 게 솔직한 이야기니까요.

그러나, 사는 데에 의미가 있는 책도 있습니다. 때로는요.

어느 서가의 장식이 될 지라도. 그렇습니다. 로망이랄까요.


정은문고 <술집학교>는 서울에 있었다면 자주 가던 동네 책방에서 샀을 책이지만, 예쁜 술잔을 사은품으로 주는 이벤트가 있어 함께 담았습니다. 아, '한정 이벤트'란 얼마나 커다란 매혹인지요. 마일리지를 지불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고르게 만드니까요. 책방을 열면 책방 한정 굿즈를 좀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굳혀봅니다.


창비 <디디의 우산>은 내용도 모르고, 출간도 아직이지만 함께 샀습니다. 기대하고 기다리는 분이 여럿 있더군요. 그 기대에 따른 호기심이 하나, 전에 좋았던 황정은 작가 작품의 기억이 하나. 함께 산 이유야 뭐, 만들기 마련이니까요.


2019년 계획은 올해도 많이 읽으면서 두 번, 세 번 읽고 싶은 좋은 책을 발견하는 겁니다. 막연하죠.

큐레이션 책방이 늘고, 각 출판사와 콘텐츠를 기획 유통하는 곳에서도 책을 알리고 재발견을 돕는데 열심이니 그 흐름에 슬쩍 올라타서 조금이나마 새로운 걸 더할 수 있다면 만족스럽겠습니다.


이제 정리해볼까요.

책을 사는 행위는 하나입니다.

한 번에 고르고 담아 샀죠. 하지만 적었듯 저마다 구매 이유, 추천 경로, 읽기 목표가 달랐습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콜렉터의 습성으로, 좀처럼 읽는 사람이 없는 책을 읽는다는 동기부여, 완간까지 시간이 있으므로 미룰 수 있다는 여지가 있기에 샀습니다.

<술집학교>는 사은품 이벤트의 유혹, 도대체 술로 무슨 이야기를 풀어낼까 하는 궁금증, 출판사에의 관심이 있어서 샀습니다.

<디디의 우산>은 출간을 기다리는 '아는 사람들'의 기대, 작가 이전 작품의 인상에 기대어 샀습니다.


마칠까요.

여기, 별건 아니지만 계획과 목표를 이야기하라고 하면 나름의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는 책 구매 행위가 있습니다. 책을 샀다고 모두 읽는 게 아니고 읽었다고 전부 만족스러울 수 없는 게 현실이라는 걸 경험으로 압니다. 지금 스스로에게 바라는 건 다만 사면서 먹었던 마음이 조금이나마 오래 견뎌주길, 사는 데 들인 비용이 아깝지 않은 읽는 경험을 할 수 있길, 올해에 사는 책은 오래 묵히지 말고 읽어가길. 이 정도일까요.


수억 년 전에 멸종한 고생대의 어느 이름 모를 물고기처럼 펼쳐지지 않은 채 화석처럼 한 해, 두 해를 보내는 책이 더는 책장에 늘지 않기를 바라며.


여러분의 2019년 첫 책 이름은 뭔가요?

그 이름을 불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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