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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가책방 Feb 10. 2019

우리가 무언가에 빠지는 건 그럴 때가 되어서다

[소설감상] 편혜영/홀

 

 더 간단히 슬픔을 무마할 수는 있지만 슬픔을 줄여주지는 못하는 마음가짐이 있다. 

소위 현명한 사람, 인생의 선배들이라는 이들이 권하는 세상에 맞서는 태세. 

흘러가는 대로 버려두기 위함이 아니라 맞서고 이겨내기 위한 준비로써의 받아들임.

'수용'

어떻게 할 수 없었던, 누구의 잘못도 아닌, 그렇게 될 수밖에 없던, 그럴 때가 되어서 그런.

그저 그것뿐인.


 편혜영의 소설 『홀』은 절망적이라 해도 좋을, 깊고 깊은 고통과 고난의 구덩이에 불가항력으로 삼켜진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야기의 주인공 격인 오기에게 일어난 갑작스러운 사고가 불행의 시작이자 원인처럼 보이지만, 소설에서 줄곧 보여주듯 모든 일은 한 번의 실수나 한 순간의 사고로 시작되는 게 아니라 '그럴 때가 되었기 때문'에 시작된다.

 오기 어머니가 자살했기 때문에, 사업에 실패한 오기 아버지가 암으로 죽었기 때문에, 오기가 고아이기 때문에, 오기 아내 아버지가 외도를 했기 때문에, 오기 아내 어머니가 절반은 일본인이기 때문에, 오기 아내가 사실이 아닌 걸 사실이라 믿어버렸기 때문에, 오기가 외도를 했었기 때문에, 오기와 아내가 여행을 떠났기 때문에. 

 그리고, 생략된 '때문에'들. 

 끝없이 만들어 낼 수 있을 많고 많은 '때문에'가 더해지고 곱해진 결과가 오기의 비참인 거다.


 무마될 뿐 줄어들지 않는 슬픔을 마주한 채 살아가기는 용기만으로 견딜 수 있는 게 아니다. 세상과 소위 인생 선배라는 이들이 지혜라고, 현명함이라고, 이치라고 굳이 여러 이름을 붙여 수용하기를 전하고 가르치는 이유도 단순하다. 필요하기 때문이다. 자신과 세상을 납득시킬, 세상과 자신이 납득할 수 있을 만큼 정당해 보이는 이름들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그만큼 많기 때문이다. 

  오기도 오기 아내도, 오기 장모도 그랬다. 나름으로는 최선의 방법이라 믿고 택한, 사실이자 진실이라 여길 수 있던 이유들. 현재를 만든 '내 책임'을 최소화할 수 있는, 견딜만한 현실로 만들 수 있을 이유들을 받아들였다. 작가는 이러한 시도들이 실패할 수밖에 없을 거라는 걸 암시하듯 오기 아내에게는 어떤 책도 끝내지 못하는 숙명을 부여하고, 오기에게는 '아무리 애써도 끝내 정확할 수 없다'는 지도의 한계를 일깨운다. 

오기가 깨달은 것은 그것이었다. 지도로 삶의 궤적을 살피는 일은 불가능했다. 지도 없이는 세계를 이해할 수 없지만, 지도만으로 세계를 표현할 수 없다는 것에 회의가 들었다. _75페이지

 연구하고 오래 들여다본 결과 오기에게 남은 건 회의다. 가능성을 찾으려는 시도 끝에 남은 거라고는 확실한 불가능성뿐인 셈이다. 오기가 연구를 통한 진실 찾기에서 출세를 위한 전공 활용 방안 찾기로 방향을 전환하는 이유가 한계의 실감, 이해 불가능성이라는 흐름도 납득이 간다. 우리는 이미 진실과 전투의 최전선에서 신념이 꺾인 사람, 배신자, 변절자는 충분하고도 넘칠 만큼 알고 있지 않은가.

  인간은 애쓰는 동안 방황하기 마련이라지만, 세상은 충분히 방황하기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오해가 쌓여 만든 절벽과 절벽을 이어 줄 다리가 생겨나기 전에 무너지거나 떨어져 버리는 거다. 무수한 삶이 비극일 수밖에 없는 이유란 그런 게 아닐까.


  바닥을 치고 일어나라는 말은 얼마나 공허한다.

바닥이 어딘지 모르고, 보이지도 않고 떨어지는 구멍엔 끝이 없다. 바닥이 1미터 아래에 있어도, 1초 후에는 바닥에 닿게 되더라도 무작적 다음 순간을 믿을 수는 없다. 그래서 발버둥 치는 인간은 무엇이든 붙들려고 하기 마련이다. 그것이 거짓말이건, 기만이건, 위선이거나 위악이건. 그들의 최선은 비난받을 수 없다.

 모든 비난은 결과론일 뿐. 


작가는 이야기를 완전히 결말짓지 않는다. 마치 그다음 이야기는 자신도 알지 못한다는 듯, 무슨 일이 벌어지거나 벌어지지 않는 결말을 보고 난 후에 이 소설을 이야기하는 건 의미가 없다는 듯 말이다. 


 작가의 의도를 오해한 건지도 모르지만 두 가지 결말을 떠올렸고, 둘 사이에서 어느 쪽이 더 나을지를 잠시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말을 모르는 소설의 결말을 두고 깊이 생각해서 어쩌겠다는 건가.

결국 바닥이 보이지 않는 구멍에 떨어졌을 때처럼 '진짜 결말'에 닿기 전까지 영원히 진실 사이를 헤멜 텐데.


심심풀이로 시작해서 감상문을 풍부하게 해 줄 수도 있겠다는 기대를 품었던 그림 연습에 책 읽기보다 몰두한 채 한 달을 보냈다. 이런 결과가 나올 줄 누가 알았을까. 책을, 책 읽기를 무엇보다 즐기고 좋아한다고 믿었던 스스로에게 얼마쯤 배신감과 실망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나, 이 또한 결과론. 몹시 성급히 판단해버린 결과론에 지나지 않았다. 

책을 읽고, 감상을 적으며, 그동안 연습한 그림을 이용하고 있으니 크게 벗어나지 않은 셈이 아닌가 말이다.


홀, 종종 세상이 구멍을 숨겨 놓고, 함정을 만들고서는 빠뜨려 곤란하게 만드는 거라 원망하던 날이 있다. 

정체를 잡을 수 없는 운명이나 숙명과 싸울 수 없어 가족과 연인과 친구와 크거나 사소한 다툼을 벌였다. 


즐겁게 시작한 펜 드로잉의 선이 책과 선을 긋게 했다가 한 편의 감상에서 그림과 책을 이어주었듯 서로 다른 세상의 홀을 통과하는 우리에게 허락되는 순간순간의 대화 기회가 우리를 이어 줄 수 있으리라 믿고 있다. 

 

우리에게 부족했던 건 애씀이나 노력이나 용기가 아니라 대화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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