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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가책방 Feb 13. 2019

핑계 없는 무덤 없고 사연 없는 인생 없다.

[소설감상] 토마스 만/키 작은 프리데만 씨 

토마스 만.

언제부턴가 마음의 짐이 된 작가의 이름이다.

『마의 산』이라고, 읽어 본 사람도, 제목은 들어 본 사람도, 작가 이름 정도 아는 사람도 있을 그 소설 탓이다.


 여기엔 사연이 있다. 

어차피 읽고 싶었지만, 책도 샀지만, 어쩐지 읽지 못하고 묵혀둔 책은 얼마든지 있으니 솔직히 한 권이나 두 권 때문에 마음의 짐처럼 느끼는 일은 별로 없다. 그럼에도 그렇게 된 건 벌써 몇 년 전, 굳이 서울 국제 도서전에서, 굳이 출판사 부스까지 가서, 굳이 선물하기를 요구한 책이 바로 『마의 산』이라서다. 사실 누구한테 사달라고 했었는지는 잊어버렸다. 다만 당시 읽고 싶었고, 읽을 생각이었던 책이라는 기억만은 선명하다. 

 이런 방법도 써봤다. 

 좀처럼 손이 가지 않아 보이지 않는 데 꽂혀 있으면 영영 잊어버리게 될까 봐 눈에 보이는 곳에 꺼내 두었다. 매번 눈에 들어왔고 그때마다 묵직한 두 권의 책이 마음을 밟고 지나갔다. 눈에만 밟히는 게 아니라 용케 마음까지 즈려밟았다. 그렇게 2년 혹은 3년 아니면 그 이상이 지나간 거다.


마의 벽


 토마스 만은 마의 벽이 되어있었다.


 쏜살문고에서 출간한 「키 작은 프리데만 씨」를 사둔 지도 1년은 된 듯하다. 

대신 가볍다. 두께도, 무게도, 부담도. 

얼마쯤 녹이 슬어버린 톱니바퀴로도 충분히 마지막 바퀴까지 굴릴 수 있을 만큼.


 굳이 고전을 무거운 걸로 만들어 부담 끌어안기를 자처할 필요는 없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오히려 무거움을 덜어내는 방법을 늘려 보는 게 좋겠다.

출판사 기획 의도도 그런 걸까?

여기까지가 내 이야기다.


 소설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두 편이 실려있다. 

작은 판형으로 40페이지 정도 분량인데, 실제로 읽으면서 더 짧게 느꼈다. 

첫 번째 이야기가 표제작 「키 작은 프리데만 씨」다. 

알코올 중독 보모의 실수로 태어난 지 한 달만에 죽을 뻔한다. 

제목이 풍기는 뉘앙스 그대로, 살았지만 평생 불구로 살아야 하는 신세가 된다. 

신체만 불구였다면 다행이지만 세상과 사람들은 몸이 불편한 사람의 마음을 가만히 두지 않는다. 

드물게 장애를 극복해낸 듯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들 역시 마음의 멍을 피하지는 못한다. 

키 작은 프리데만 씨 역시 그랬다. 일찌감치 사랑을 포기한 키 작은 프리데만 씨는 비참해지지 않기 위해 사랑 없이도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믿음이 효과가 있었던지 30년이 지날 때까지도 키 작은 프리데만 씨는 행복하게 지낸다. 

 아시다시피 행복이 느닷없이 찾아오는 경우는 드물지만 불행은 곧잘 그렇게 한다. 키 작은 프리데만 씨에게도 불행은 그렇게 들이닥쳤다. 30년을 단련했으니 수월하게 견딜 수 있었을지 몰랐을 키 작은 프리데만 씨는 이번에는 스스로 거꾸러질 거라는 걸 알면서도 달려든다. 밀랍이 녹아 추락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태양을 향해 날아오르는 이카로스처럼.


두 번째 이야기는 「타락」이다. 토마스 만 첫 작품이라고 한다. 얼핏 '미숙하다'는 평을 쓴 걸 봤는데, 정말 어떨지. 

 '꼴사나운' 박사가 있다. 빈번히 빈정대거나 조롱하고 자주 이것저것에 비웃는 태도를 보이는 방탕한 서른 즈음의 젤텐이라는 의학박사다. 소설은 이 젤텐 박사가 들려준 어떤 '좋은 녀석'의 이야기다. 굳이 '단편 소설 형식'으로 얘기하겠다며 시작하는.

 '좋은 녀석'은 오래 순수함을 지킨다. 하지만 스스로 그렇게 했다기보다 그럴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순진무구했던 이 좋은 녀석은 어느 날 괴테 극장에서 '순진한 애인' 역을 맡던 배우에게 푹 빠져들기 시작한다. 극장 이름이 괜히 괴테가 아니었던지 메피스토 같은 친구 뢸링은 혼자만의 사랑으로 괴로워하는 좋은 녀석에게 이런저런 방법을 들려주며 부추기기 시작한다. 

 좋은 녀석은 좋은 녀석 답게 처음에는 그럴 수 없다고 한다. 물론 처음뿐이었고, 첫 번째 방법에 이어 두 번째 방법까지 실행한 좋은 녀석은 목적을 달성하고 행복의 정점에 이른다. 

 메피스토의 유혹에 넘어간 파우스트의 운명은 어땠던가? 

좋은 녀석은 좋은 녀석이었지만, 운명의 가혹함은 좋은 녀석조차 피해 가지 않는다. 

결국 좋은 녀석은 마지막까지 좋은 녀석으로 남지 못한다. 사랑했고, 모든 걸 바칠 수 있다고 믿었던 여자의 배신으로 타락하고 말았던 거다.


처음에는 두 이야기에 공통점이 표면으로 보이는 몇 가지뿐이라고 생각했다. 

처음 떠올린 의문도 '진정 순수한, 순진한 욕망은 있는가?' 하는 거였다. 

「키 작은 프리데만 씨」가 이성과의 사랑을 욕망한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거짓 행복에 스스로를 속이는 걸 그만두기를 욕망하고 있다는 생각과「타락」한 좋은 녀석이 자신이 품고 있는 이상적이고 순진무구한 사랑의 완성을 욕망하는 순진한 남자처럼 보이지만 결국 사랑을 소유하기를 욕망했던 거라는 생각이 뿌리였다.


그러다 문득, '어라?' 하는 의문이 생겼다. 

단지 거짓된 욕망이나 스스로를 속이려는 시도가 품은 비극성을 보이기 위해 썼다고 하기엔 너무 복잡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 키 작은 프리데만 씨와 타락한 좋은 녀석 사이에는 또 다른 공통점이 있었다.

둘 다 사연이 있다는 거다. 소위 마음의 상처로 남을 기억들 말이다. 

얼마나 치명적이고 절대적인지 여부를 떠나 그럴듯해서 핑계로 삼기 좋은 이유가 있었다는 거다.


 스스로 목숨을 끊거나, 세상과 여자를 비웃고 빈정대며 조롱하면서 방탕하게 지낼 수 있을 정도의 이유 말이다. 모두는 아니라도 세상의 절반 혹은 절반의 절반은 '그럴 수도 있다'고 인정하고 받아들여 줄 핑계를.


 키 작은 프리데만 씨의 불행한 삶은 분명 비극이었다. 그건 누구의 탓인가? 누구를 탓해야 비극이 아니게 되는가? 누군가를 탓해서 비극이 아니게 될 수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하겠다.

 타락한 좋은 녀석은 어떤가? 어려서부터 사랑과 관심을 받으며 자란 결코 나쁘지 않은 가문 출신의 남자와 누구나 다 아는 빈민촌에 사는 가난한 여배우. 사랑만 있으면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순진무구함은 순진할지는 모르지만 죄가 없지도 않다. 타락할 기회와 마주치지 않았기에 순수할 수 있었던 남자가 스스로의 고결함을 그럴 수 없는 타인에게 강요할 수 있는 걸까. 

 

 비겁했다. 두 사람의 상황은 분명 달랐지만 하나 같이 비겁했다. 

자신의 죽음과 스스로의 타락의 핑계를 타인에게서 찾았으므로.


 사인 없는 죽음이 없고 핑계 없는 무덤도 없다. 

그리고, 

풀어내면 소설 몇 권쯤은 거뜬히 풀어낼 수 있을 사연이 없는 인생도 없다. 

비겁하지 말자. 

비겁해질 수 있는 이유를 세상과 타인에게서 찾지 말자. 


우리 모두 얼마쯤의 불행은 알고 겪으며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토마스 만이 그랬다는데,

"난 불행이라면 약간 알고 있어요."라고.


 소설을 읽을 때면 늘 느끼는 거지만, 

꾸며낸 이야기 속에서 진실을, 거짓 속에서 사실을 발견하게 될 때 마음 한 구석이 덜컹하고 내려앉는다.


이 짧은 두 편의 소설도 그랬다.

부끄러움을 곱씹으며 부끄럽게 살지 않기를 다짐한다.


그림 연습을 하며 느끼는 한 가지.

실수했다고 실수에서 멈추면 실패가 되어버린다.

어디까지나 연습, 연습할 수 있는데 실패할 필요가 있을까.

마지막까지, 스스로 정한 어느 선까지, 스스로의 손으로 그려내면 그만이다.

 핑계의 여지는 어디에도 없다. 핑계의 필요가 없는데 여지가 어디에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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