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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가책방 Apr 15. 2019

권력을 가진 자와 죄인은 동의어다.

현란한 세상_레이날도 아레나스/을유문화사

어느 사잇길_펜 드로잉

프루스트의 마들렌, 세르반도의 용설란

이제부터 이야기하는 건 '정답'이 아니라 '방법 중 하나'라는 걸 먼저 밝히기로 한다.

어떤 책, 어떤 이야기들에는 특별한 접근 방식이 요구되기도 하니까.

 일단 달려들어 시작하는 걸 말릴 필요 없고, 자기에게 더 알맞은 과정을 거쳐  더 나은 결말을 맞이할 수도 있겠지만 다른 누군가의 방법을 참고하는 일마저 필요 없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  

 

 굳이 숨길 필요도 없으니 덧붙이자면 '나는 지금 겁을 주고 있는 거다'.

스페인 어를 모르니 제목 <현란한 세상>이 얼마나 적확하게 뉘앙스와 의미를 반영한 건지 판단할 수 없지만 '현란하다'는 건 '난무하다'와도 통한다. '난무'는 어지러운 모양을 의미하고 어느 한 지점, 시간, 주제로 수렴하지 않는 듯 보일 수도 있다는 거다.

 그림으로 이야기하자면 소실점이 명확해서 시선의 방향이 분명한 경우와 달리 시선이 작품 사방으로 분산되는데 각각으로 분산된 시점 어디서부터 시작해도 끊김 없이 나름의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을만한 경우다. 

  이 감상은 실마리가 보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 어디를 어떻게 이어나가야 할지 알 수 없게 되는 때. 

현란한 혼란 속에 길을 잃었을 때에 도움이 될지 모를 방법 하나를 남기려는 의도임을 밝혀둔다.


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마들렌은 화자를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이끌며 이야기를 시작하게 한다. 레이날도 아레나스가 <현란한 세상>을 시작하며 던진 단서는 '용설란'이다. 정확히는 1980년 7월 13일로 날짜가 명시된 작가의 말에 나오는 단서다. 아마 그전까지 작가가 숨겨둔 수수께끼를 제대로 풀어낸 사람이 없었거나 자기 작품을 둘러싼 억측에 가까운 문학 평론가들을 비웃어주기 위해 적은 게 아닐까 싶다.


 여기에 마르셀 프루스트의 마들렌을 언급한 건 <현란한 세상>의 주인공 세르반도 수사를 과거 혹은 미래의 어느 기억 혹은 순간으로 이끌어 가는 장면 속에 등장하며 세르반도 수사의 운명을 빗대거나 암시하기 때문이다. 

 용설란이 뭔지 모르는(나처럼) 사람을 위해 덧붙이자면 용의 혀를 닮았다 해서 용설이라 이름 붙인 난이다. 10년 이상 꽃이 피지 않아 1세기 만에 꽃이 핀다고 과장되어 회자되고 있다고(실제로 어느 뉴스 방송을 보니 '100년 만에 핀 꽃'하는 식으로 큰 화제가 되고 있었다). 용설란의 꽃은 용설란의 죽음 혹은 사멸을 의미한다. 꽃을 피운 용설란이 죽기 때문이다. 


 도다 세이지는 <이 삶을 다시 한번> 속 하나의 에피소드에서 식물이 꽃을 피지 못하게 하는 방법을 얘기한다. 

꽃을 피우지 않는 방법은 적당한 환경을 갖추고 알맞은 영양과 물을 공급하는 거다. 반대로 생각하면 적당히 가혹한 환경을 만들어주면 꽃을 피울 거라는 거다. 


 용설란과 꽃을 피우는 방법을 조합하면 <현란한 세상>에서 들려줄 세르반도 수사의 삶의 굴곡을 들여다볼 마음의 준비 1단계가 갖춰지게 된다. 한 번은 꽃을 피우고, 그 과정이란 어쩌면 몹시 가혹할 수 있으며, 두 번은 없으리라는 예감과 함께.

누구의 삶을 들여다보든 다르지 않을 텐데 마음의 준비 2단계는 인내심을 갖는 거다. 끝날 때까지 이야기를 따라가며 듣는 노력이 요구된다.

마지막 3단계는 다시 돌아가 보는 수고까지 감수할 수 있다고 마음먹을 필요를 인정하는 거다. 종종 어떤 이야기들은 이야기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끝나지 않고 처음으로 돌아가 몇 페이지에서 몇십 페이지까지 다시 읽을 때 조금 더 이해가 깊어지기도 한다. 

 <현란한 세상>도 그랬다.


여기까지가 내가 레이날도 아레나스의 <현란한 세상>을 읽은 방법이다. 

떠올리고, 예감하며, 마지막까지 동행하다 나 홀로, 스스로의 의지로 처음으로 돌아가 본 거다. 

그렇게 했을 때, 비로소 보이는 맥락이 있었다.


 <현란한 세상>은 세르반도 테레사 데 미에르 수사의 삶을 담은 이야기다. 실존 인물일 수도 있는 이 인물이 남긴 회고록을 바탕으로 했다고 하는데, 이런 얘기를 들으니 실존하지 않았을 듯하다는 생각에 무게가 실리는 인물이기도 하다. 

 

 멕시코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던 세르반도 수사는 유아기에 일어난 사건들에서 도망치듯 집 안에 박혀 있다 종소리를 따라 떠나게 된다. 그렇게 떠나 여행을 하다 어떤 신부와 만나게 되고 신부와 함께 어떤 도시에 이른다. 도착한 도시에서 어떤 부인이 화형에 처하는 모습을 보고 방황하듯 헤매다 수도원에 닿게 되는데 이 수도원에서 벌어지는 일은 그야말로 타락 그 자체다. 음란하고 천박하며 구역질 나는 짓을 태연하게 벌이고 있던 거다. 이 타락에 함께 하기를 거절한 죄로 감옥에 갇히는데, 이 거절 혹은 반항 또는 투쟁과 감옥, 탈출이 이야기에서 다양한 이유, 모습, 결과로 반복되고 되풀이된다.

 이러한 타락한 유혹을 이겨내며 자신의 신앙을 좇던 세르반도 수사는 운명적으로 과달루페 성모에 관한 계시를 받아 설교를 하게 되는데 이 설교가 신성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평생 쫓기게 된다. 거기에 덧붙여 세르반도 수사는 왕족과 권력자들 앞에 굴복하거나 하는 일 없이 신념으로 맞서게 되는데 그들이 노여워하는 게 당연하고 세상 어디에나 권력자 혹은 왕족이 없는 곳이 없었기에 어디로 도망치든 핍박받으며 쫓기지 않는 날은 기대할 수 없는 삶을 살게 된다.


 소설은 내내 의식의 흐름을 따라 시간과 공간을 거스르거나 뒤집기도 하고, 상상 속에서나 벌어질 일들을 태연히 현실로 그려내기도 하면서 수십 년의 시간을 이야기한다. 이야기가 유난히 복잡해지는 이유는 이 의식의 흐름 속에 사회와 세태, 세계에 대한 비관과 비판, 풍자와 폭로가 섞여 들기 때문이다. 


 작가가 작품을 통해 전하고 싶은 다양한 메시지, 단어와 문장에 숨겨둔 암시와 묘사들을 다 이해하려고 욕심을 부리면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는 이야기가 되는 반면, 어떤 장면이나 부분을 잘라내어 풀어볼 때 의미가 분명 해지는 부류의 소설이 되는 거다. 


 줄거리는 한 줄로도 줄일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집을 떠난 세르반도 수사가 평생 동안 겪은 핍박과 수난으로 굴곡진 삶과 혁명 완성을 위해 싸워온 이야기'.


간단하지 않은 게 당연하다.

평생은 하루나 이틀, 한 해나 두 해가 아니고 핍박과 수단은 한두 번이 아닌 데다 이유도 가해자도 다르며 어떤 혁명을 위해 언제, 무엇과 누구를 위해 싸웠는지를 한 두 문장으로 풀어낼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가 익히 배웠듯 역사는 승자의 기록인 동시에 권력자의 과거와 현재다. 권력에 맞섰던 한 개인의 투쟁을 온전히, 객관적으로 기록하고 기억하려는 권력자는 없을 것이므로 문제가 더 어려워지는 거다. 투쟁한 사람 본인이 남긴 회고록이라면 더더욱 불분명한 부분이 늘어나기 마련이다. 제목 그대로 '현란한 이야기'가 될 수밖에 없던 거다.


 내가 할 수 있던 건 마지막까지 수사의 이야기를 견디고 따라간 것과 한 번 더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 다시 들어본 것 정도다. 덧붙여 몇몇 문장에서 단어를 건져 올려 연결해보는 시도 정도일까?


그 시도를 조금 보여주는 걸로 감상을 끝내야겠다.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다 보니 감상까지 의식의 흐름대로 흘러가버리고 마는 기분이라서 말이다. 일단 감상은 여기서 끝이 난다.


 참고로 <현란한 세상>에서 다루고 있는 사건들 혹은 역사의 비극 중 몇 가지를 적어보면 이런 거다.

'아메리카와 흑인 노예'

'스페인의 식민지 개척'

'타락한 가톨릭 수도사들(ex 소돔)'

'혁명의 탈을 쓴 권력의 찬탈'

'멕시코 독립'

'프랑스혁명과 나폴레옹'

등등.


연결해본 건 이런 부분을 이런 식으로다.


영원한 것 - 현실
영원한 것은 서열이 있거나 명백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중략) 현실을 하나의 각도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각도에서 본다. 그런 상황고 각도에서 사실주의의 피해자들을 도외시해야 한다면 그것이 무슨 현실이겠는가?
15페이지
패스(pass) - 악행 
모든 수련 수사들이 옷을 벗은 채너에게 인사하려고 다가갔을 때 무언가 네 안에서 '패스(pass)'했고 수많은 빛으로 부서졌지.(중략) 악행은 즐기기를 원하는 그 순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에 얽매이는 예속성과 영원한 의존성에 있다는 것을 너는 잘 알고 있기 때문이지.
47페이지
권력 - 죄인
권력을 가진 자와 죄인은 성서의 언어로 볼 때 동의어다.
70페이지
연료 - 흑인
"연료 = 기관사가 외친다 - 연료가 없으면 도착할 수 없습니다."그리고 스물아홉 칸의 객차 한 칸이 텅텅 빈다. (중략) 그래서 흑인들을 사용하죠, 그들은 풍부하니까요. 이미 말씀드렸듯이 석탄과 가장 많이 닮았기 때문이죠.
279페이지
사기 - 완성
그를 다시 미치게 만드는 소란한 소리를 듣는 순간 갑자기 그의 전 생애 동안 사기를 당했다고 느꼈다. (중략) 모든 문명(모든 혁명, 모든 투쟁, 모든 목적)의 목적은 별자리의 완성, 변함없는 조화에 도달하는 것이다.
355페이지


감상을 마친 지금에야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사실 처음 몇 페이지를 읽었을 때, 이 이야기를 끝까지 읽을 수 있을지 스스로 의문을 품었다.

며칠, 몇 주를 미루고 다시 미뤘다. 무슨 투쟁, 무슨 혁명, 무슨 고난을 위해 읽어야 하는가? 스스로에게 자꾸 물었다. 로맹 가리의 소설 감상을 쓰면서 '문학 해석이 시대 해석'이라 적었었다. 이 소설, <현란한 세상>을 해석해낼 현실의 단면, 단서들이 필요했달까. 

 서사에 몰두했을 때 단면은 보이지 않았고 자꾸만 단서들을 놓쳤다. 그도 그럴 게 이 소설 속 시간은 묘하게 길면서 복잡한 데다 앞으로나 뒤로나 한쪽으로 흐르고 있지 않았다. 수백 년 전 이야기를 했다가 수십 년 전 이야기로 건너뛰는데 이야기의 주인공은 여전히 살아있거나 죽어가거나 죽어있는 거다. 

 서술의 주어도 자꾸만 달라진다. '나'였다가 '너'였다가 '그'가 되기도 한다. 누가 누구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이야기의 주체조차 분명하지 않은 셈이다. 


 시간이 뒤섞이고, 화자는 불분명하며, 분명 멕시코와 스페인, 영국과 프랑스, 이탈리아와 미국이라는 실존하는 나라의 역사를 반영하고 있음에도 어떤 역사의 단면인지 명확하게 밝히지도 않는 이야기. 주인공 세르반도 수사의 주적, 주된 핍박자로 등장하는 레온이니 누구니 하는 사람도 실제 존재했던 누군가를 빗대고 있는 듯하다는 정도를 추측해볼 수 있을 뿐 부족한 역사 지식으로 단서조차 붙들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읽기 어려운 게 당연했던 게 아닐까.


 비슷한 어려움을 겪었던 기억이 있는데 <뻬드로 빠라모>, <백 년 동안의 고독>이 가장 비슷하겠고, 훨씬 수월하고 재밌게 읽은 경우로는 나보코프의 <절망>이나 빅토르 팔 레빈 <P세대>와 닮았으며, 어렵기로는 모옌 <열 세 걸음>도 만만치 않았던.


 재밌으면서 신기한 건 다시 읽어보고 싶은 소설 리스트에 올리고 싶은 소설이라는 거다. 단순히 난해해서, 이해하기 어려워서 다시 읽어보고 싶다기보다 다음에 다시 읽는다면 그때는 조금 더 다른 걸 보고, 생각하며, 더 많이 이해하고 느낄 수 있을 듯하다는 기대를 품게 하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의 부족함을 절실히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문학을 해석하고 그에 비추어 시대를 해석하는 데 능숙하기는 어렵지만 스스로의 지금을 들여다보기에는 충분하고도 넘친다고 느낀다. 나는 조금 더 문학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긴장을 풀고, 해석이나 이해에 얽매이지 않으며 이야기를 이야기 자체로 즐길 수 있게 될 때, 조금 더 나은 감상가가 될 수 있을 테니까.


 현란한 세상을 읽는 동안 마음은 무거웠고 머리는 복잡했으며 눈은 어지러웠지만 그 또한 좋았다.

물론, 의미하는 바는 다르지만 나에게는 권력이 없으므로 그 죄가 무겁지 않을 것임에 안도할 수 있었음을 포함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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