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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가책방 Jul 12. 2019

꽃 다시 피듯, 사랑으로 돌아가자 우리.

벨 훅스 <All about Love>, 올 어바웃 러브.

안녕하세요. 북큐레이터 가가C입니다. 

 철의 시대나 빛의 시대.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우리 사람과 사람들의 삶에서 최고 관심사 자리를 두고 벌어졌을 투쟁에서 사랑이 승자의 왕관을 내어준 적은 한 번도 없었을 것만 같습니다. 

 참혹한 전쟁도, 수십 년이나 이어진 원한도, 최상의 권력이나 부유함도 사랑을 꺾지 못했습니다. 한 때, 한 순간은 패배하는 듯 보이던 사랑이 어느 사이엔가 승자가 되어 다음 사람, 다음 세대로 이어졌죠. 


 부와 권력은 사랑을 질투했기에 마치 자신들이 더 강하고, 사랑은 오래전에 패배해 버려진 듯 보이려고 애써왔습니다. 하지만 그런 시도들은 누구도 사랑 없이 살아갈 수 없음을 분명하게 보여줬을 뿐이고, 사랑 없이는 허무와 공허를 이겨낼 수 없음을 증명하게 됐죠. 


 사랑은 없는 곳 없이 어디에나 있고, 그 강도, 정도, 범위에 제한이 없죠. 관계를 가리지 않고, 시대까지 넘어서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막강했던 사랑이 이제는 거의 패배할 위기에 놓인 듯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혐오와 몰이해, 뒤틀린 애정과 오해가 지금처럼 완전하게 협공에 성공했던 적이 없었으니까요.


 느닷없지만 로맹 가리를 좋아합니다. 

로맹 가리는 <자기 앞의 생>의 시작과 끝에 이렇게 묻고, 이렇게 답하죠.

"사람은 사랑 없이 살아갈 수 있나요?"

"사랑해야 한다."

이렇게요.


'사람은 사랑 없이 살아갈 수 없으므로, 사랑해야 한다'라고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것만큼 중요한 게 있죠. 바로 사랑이 무엇인지 아는 것입니다. 

사랑을 바로 알지 못하면 사랑이 아닌 걸 사랑으로 착각하거나, 사랑일 수 없는 걸 사랑이라며 억지를 부리는 일을 벌이게 됩니다. 정도가 덜하면 슬픔이 되고, 정도가 심하면 절망하게 하는 잘못으로 나아가게 하죠.


 우리는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서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된다고 믿어왔습니다. 어느 시대까지는, 어느 순간까지는 의도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그런 능력을 갖출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어떤가요?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사랑하며 사랑 속에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나요?


 그랬으면 싶습니다. 그럴 수 있다면 더 좋을 거라고요. 

누군가의 삶은 어떤지 알지 못하지만 적어도 '내 삶'에서 사랑은 저절로 자라나서 자리를 지켜낼 수 있을 만큼 강해지지 못했습니다. 오랜 시간을 보내며 애쓰고 배우며 노력한 후에야 사랑에게 작은 자리를 만들어 줄 수 있었죠. 


 사랑을 이야기하는 소설, 철학, 인문, 에세이 등등, 제법 많은 책을 읽었습니다. 마치 지식을 쌓고 실제 세상에 적용하면서 검증하듯 더딘 걸음을 걷기도 했죠. 지금 생각해보면 꼭 그런 과정을 거쳐야만 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우연히, 어쩌면 운이 좋아서 그나마 지금의 자리에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 마음도 있거든요.


 벨 훅스라는 작가의 이 책 <All about Love>, 올 어바웃 러브는 독서 모임에서 함께 읽게 된 책이었습니다. 새삼 사랑을 정의하고 이야기하는 책을 읽을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서 읽었지만 읽으면서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막연하게 생각해왔던 사랑에 가장 납득할만하고 공감되는 정의 하나를 얻었다는 확신이요.


 작가는 이 책을 왜 썼을까?

그건 아마도 작가 자신도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던 시간을 보냈고, 그 시간이 충분히 혹은 지나칠 만큼 고통스럽고 힘겨웠으며, 어떤 정의에 닿은 후에야 비로소 '사랑의 정체'를 알아차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자신이 그런 시간을 보냈기에, 비슷한 이유 혹은 저마다의 이유로 사랑을 두고 힘들어하고 고민하는 이들에게 작은 조언이나마 건네기 위해서요.


 또 하나는 작가가 생각하기에 세상이 사랑을 너무 막연하고 추상적인 것으로 취급하면서 불확실하거나 불완전한 사랑, 때로는 일그러지고 잘못된 감정이나 애정까지 사랑이라고 믿고 괴로워하는 사람을 잔뜩 만들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런 고민을 두고 시름시름 앓는 이들에게 "그건 사랑이 아니"라고, "그런 건 사랑이 아니"라고 말해주기 위해서요.


 책 속에서 작가는 자신이 사랑을 정의 내리기 위해 찾던 과정과 시행착오를 보여줍니다. 처음부터 자신은 사랑을 알았고 사랑을 잘할 수 있었다는 확신이 아니라 자기 역시 몰랐지만 찾기 위해 애썼던 결과 찾을 수 있었다고요.


 그렇게 사랑의 정의를 찾던 작가가 마음에 드는 사랑의 정의를 발견한 곳은 스캇 펙의 책 <아직도 가야 할 길>에서였습니다. 스캇 펙 역시 에리히 프롬에게서 영감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는 사랑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사랑이란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의 영적인 성장을 위해 자아를 확장하고자 하는 의지가 발현될 때 존재할 수 있다."


작가가 책 속에서도 언급하지만 사랑은 '빠지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확장의 의지'가 발현되어야 하는 선택이라고요. '영적인 성장'이라고 하면 종교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여기서는 종교적 의미보다는 내면의 확장된 자아를 의미하는 표현입니다. 자아가 있고, 선택이 있으며, 의지가 존재할 때 비로소 사랑을 할 수 있게 되는데 중요한 건 한 사람만을 중심으로 하는 게 아니라 상호적이라는 겁니다. 스토킹, 그루밍, 단순히 쏟아붓는 애정은 사랑이 아니라는 거죠.


 사랑의 매, 사랑해서 미워한다, 사랑하기에 가둔다, 사랑해서 죽는다.

이러한 예들은 사랑이라고 할 수 없게 됩니다. 다른 누군가나 자기 자신을 파괴하는 감정, 물리적 행위와 태도는 때때로 동정을 얻기도 하지만 어떻게 포장하더라도 사랑일 수 없다는 거죠. 


 비로소 지금까지 왜인지 불편했고, 이건 아닌데 싶었던 감정의 응어리가 풀리면서 궁금증이 해소되는 듯했습니다. 술에 취하면 가족에게 폭력을 휘두르지만 술이 깨고 난 후에는 눈물로 사죄하며 사랑한다고 말하는 남편을 옹호하며 '이 사람은 아파서 그래'라거나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내가 이해하고 포용해야지'라거나 '내가 더 잘하면 이 사람도 달라질 거야'라는 막연한 기대는 벨 훅스의 정의를 따르면 결코 사랑일 수 없던 거였죠. 


 "당신이 말하는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왜냐하면에 이어 말할 수 있는 대답을 완성할 수 있게 된 거죠.


사랑이라면 이래야 한다는 생각은 지금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랑이라면 이래서는 안 된다는 확실해졌죠.


 완벽한 책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절반 정도까지는 작가의 삶과 경험이 압축되어 만들어낸 밀도 높은 메시지를 전하는 힘을 유지하지만 후반으로 가면 범위는 물론 관점까지 크게 넓어지면서 응집력을 잃은 듯 보였거든요.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독서 모임에서 함께 읽은 책이라고 했죠. 신기한 건 저마다 이 책을 전혀 다른 관점에서 읽었고 공감하는 지점이 다른 건 물론 공감하기 어려웠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는 거였어요. 더 솔직히 얘기하면 공감하기 어렵다는 말에 놀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생각해보면 참 다행스러울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어떤 경험을 했는가, 고민이 무엇인가, 무엇을 생각하는가에 따라 같은 책, 같은 문장도 다르게 읽히는 법이잖아요. 


진짜 사랑을 경험하지 못해서 힘들었던 사람의 고백.

이것이 사랑일까 아닌가를 고민하면서 힘든 시간을 보낸 경험

가족에게서 연인에게서 친구에게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물리, 정신적 폭력에 노출됐던 사람.

그 외에 사랑으로, 사랑이 이유가 되어 결코 자신을 사랑할 수 없었던 이들.


이런 이들의 이야기, 경험, 생각, 정의에 공감하기 어려운 건 크게 두 가지 경우일 겁니다.

하나는 공감 능력이 떨어지는 무감각한 사람일 거고, 다른 하나는 그런 경우를 경험하지 못했고 진짜 사랑 속에서 충만한 사랑을 받으며 살아온 사람이요.

 다행스러웠다는 건 두 번째 의미였습니다. 충분한 사랑, 잘못되고 어긋나고, 뒤틀린 가짜 사랑이 아니라 진짜 사랑을 받아왔기에 자연스럽게 타인에게, 가족에게, 아이에게 베풀 수 있는 사람인 거라고 생각 했거든요.


 그 어느 시대보다 사랑 이야기로 넘치는 시대.

무얼 봐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발견하는 시대.

정말 사랑으로 가득해 보이는 이 시대에 사랑으로 고민하고 아파하는 사람들, 때로는 절망하는 사람들이 이토록 많은 건 왜일까요.

 이유가 하나나 둘은 아닐 테고, 간단히 해결해주는 마법 같은 처방도 없겠지만 분명한 건 사랑이 동사가 아니라 명사로, 하는 게 아니라 빠지는 걸로 인식되고 있다는 거죠. 빠져버렸기에 어쩔 수 없고, 동사가 아니기에 의지나 노력을 더해도 달라지지 않는다고 믿어버리기 쉬우니까요. 


 사랑이 그토록 쉬웠다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진짜 사랑이 그처럼 흔하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지금까지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고, 앞으로도 그리 간단하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더 나은 길을 선택하고, 더 나아지기 위해 애쓰는 의지를 더한다면 '나'와 '우리'의 세상에는 조금은 더 사랑이 늘어나게 될 거라 믿습니다. 꿈같은 생각, 거짓말 같은 이야기, 허황된 바람이라고 말해도 좋습니다. 단순히 바라기만 하지 않고 할 수 있는 한 모든 방법을 더해 사랑을 찾고 사랑하기 위해 애쓸 생각이거든요.


 사람은 사랑 없이 살 수 없다고 믿습니다.

사랑은 삶을 더 나은 것으로 만들어 주었으니까요.

우리가 사랑이라고 믿었던 행동이나 감정, 지금 사랑이라고 믿고 싶은 태도나 행위라도 사랑이 아닐지 모른다는 의구심이 든다면 조금 더 의지를 보태어 알아가야 한다고 생각해요. 조금 더 알아갔을 때,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확신이 생긴다면 바로잡기 위해 마음을 터놓고 함께 시도를 해보고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매달리지 않아야 한다고요. 


 사랑은 결코 비극적이지 않습니다. 흔히 우리가 쏟고 매달리던 감정의 영역, 일방적이며 즉흥적이고 폭력적이기까지 한 애정은 한 번도 사랑이었던 적이 없었던 거죠. 사랑으로 가는 길의 한 갈래, 사랑을 이루는 한 조각 퍼즐, 사랑의 한 부분일 수는 있지만 아직 사랑은 아닌 거라고요.

 

 지금 사랑하고 있나요?

그럼 스스로에게 물어보세요. 

"나는 사랑을 하고 있는가?"

지금 사랑하지 않고 있다고 믿나요?

그럼 이렇게 물어보세요.

"나는 사랑 없이 살아갈 수 있는가?"


봄이 가고, 여름이 한창인데도 지고 피는 꽃이 있습니다.

노랗기도 하고, 빨갛기도 하고, 보랏빛을 머금기도 하고요.

영원한 사랑은 없을지 모르지만 사랑은 영원할 수 있습니다.

말장난이냐고요?

아니요.

지금의 저는 영원한 사랑과 사랑의 영원함을 어느 정도는 구분할 수 있게 됐다고 믿고 있어요.

어디에 마음을 두는가.

사랑에서 무엇을 바라는가.

사랑이 어떤 것이라 믿는가.

질문을 하고 답하기를 거듭하면서요.


 사랑은 변할 수 있고, 때로는 돌아오지 않기도 합니다.

동사니까요. 

선택하고, 의지를 더함으로써 나아가는 거니까요.


 사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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