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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가책방 Aug 04. 2019

닮은 사람, 다른 삶

그건 선택이었을까 운명이었을까

밀란 쿤데라 <향수>와 보후밀 흐라발 <너무 시끄러운 고독>.

이 책들에는 특별히 기억에 남은 일들이 따라다닌다.

 특별한 일은 아니지만 특별히 기억에 남은 일들이.


너무나 너무나 유명한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고, 몇 권인가 그의 작품을 찾아 읽었다. <농담>, <웃음>, <정체성>, <생은 다른 곳에> 그리고 다른 작품들을.

<향수>는 분명 밀란 쿤데라 소설이다. 하지만 처음 이 책을 손에 들게 된 건 <깊이에의 강요>, <비둘기>, <좀머 씨 이야기>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소설 <향수>와 착각한 탓이었다. 


표지 속 영문 IGNORANCE가 제목인 줄 알았더라면 착각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랬을 테지만, '향수'라는 단어가 떠올리게 하는 향기가 너무 강해서 생각할 수 없었다.


소설이 담고 있는 이야기를 생각하면 왜 '향수'라고 번역된 제목을 선택했는지 조금 의문이 생긴다. 시적 허용이었을까? 고향을 떠나 고향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남은 사람들이 무슨 일을 당하고 감당해야 했는지 모르는 사람의 이야기. 고향을 떠나 타향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느낄 '향수'와는 분명 다른 감정일 듯한데 말이다. 

 내가 고향을 생각할 때 가장 강하게 느끼는 감정이 향수이기보다는 두려움에 가까운 갑갑함과 죄의식인 것처럼.


밀란 쿤데라 <향수>에 얽힌 이야기는 그런 거다. 다른 작가의 전혀 다른 작품과 혼동했던 기억. 너무나 다른 결의 이야기에 조금은 당황했던 기억. 인물들이 느낄 혼란의 생생함과 작가가 느꼈을지 모를, 어쩌면 작가의 감정일지 모를 일말의 죄책감과 부채감.


보후밀 흐라발 <너무 시끄러운 고독>은 조금 더 세속적인 사건에 얽혀있다. 

좀처럼 책을 빌려주지 않는 편인데, 오랜만에 만난 지인에게 빌려주었던 책이 바로 <너무 시끄러운 고독>.

책이 너무 좋아서, 책 소개를 하고 난 후에 그 책이 너무 마음에 든다며, 읽어보고 싶다는 얘기에 선뜻 빌려줬던 거다. 하지만 그 후로 그 지인을 만날 일을 만들기 좀처럼 힘들었고 그렇게 된 걸 뭐, 그냥 선물한 셈 치기로 하고 말았던 거다.


 다른 기억도 있다.

아마도 <너무 시끄러운 고독>이 2016년에 작가들이 사랑한 책에 뽑혀 2017년에 큰 화제가 됐을 거다. 

우스운 자부심일 수 있는데 나는 그전에 <너무 시끄러운 고독>을 읽었고, 너무 좋았던 기억을 갖고 있었다. 언론에 소개된 책이라서, 베스트셀러라서 읽게 되는 모양은 왠지 싫은 걸 어쩔 수 없었으니. 이 자부심이 우스운 것이라도 나는 자부심이라 이름 붙이고 싶다. 


 밀란 쿤데라와 보후밀 흐라발은 모두 체코 작가다. 보후밀 흐라발이 10년 남짓 앞선 세대이긴 하지만 작품 활동을 시작한 시기나 사회주의 체코에 미움을 받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다만 둘의 운명이 크게 갈라진 건 시민권을 잃은 밀란 쿤데라가 망명을 선택한 것과 달리 보후밀 흐라발은 펜을 꺾인 채로 수십 년을 견뎌냈다는 거다. 그런 경험의 차이, 달랐던 태도가 <향수>와 <너무 시끄러운 고독> 속 주인공들처럼 너무 다른 운명과 태도의 인물들을 만들었던 거다. 


 국내에 소개된 작품수 차이가 크고 읽어본 작품도 밀란 쿤데라 쪽이 더 많지만 보후밀 흐라발이 만든 인물과 남긴 이야기가 더 깊고 진한 여운을 남겼다고 고백하고 싶다.


그런데, 밀란 쿤데라는 프랑스 망명을 택했다고 적어도 되는 걸까?

그 선택이 정말 밀란 쿤데라가 내린 선택, 밀란 쿤데라의 선택이었을까.

생각하면 생각해볼수록 점점 선택보다는 운명에 무게가 쏠리는 걸 느낀다.


'운명도 선택'이라며 단호하고도 멋들어진 결론을 내릴 수도 있겠지만, 어쩐지 이제는 그러면 안 될 것만 같고, 그럴 수 없을 것만 같고, 그렇지 않을 것만 같다.


혹시 <너무 시끄러운 고독>을 의미 있게 읽었다면, 밀란 쿤데라 <향수>까지 읽어봐 주기를 부탁해도 될까?

그 후에 그들의 삶이 서로 다른 선택으로 달라지게 됐다고 느꼈는지, 아니면 다만 운명이었다고 느꼈는지 알려줄 수 있을까?


 문득, 두 이야기를 나란히 놓아둔 풍경이 마음에 걸려 몇 글자 끄적여 본다.

세상에 그토록 무수한 단서들은 왜 정답보다 의문을 더하는 데 부지런한 걸까.


고독이 너무 시끄러울 수 있다는 아이러니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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