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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가책방 Sep 08. 2019

[북리뷰] 소설과 독자에 대하여

딸에 대하여_김혜진

자, 소설을 써볼까.


여섯 시다. 

불안에 떠는 창이 소란을 피우는 바람이 성급하게 잠을 깨워버렸다. 

일기예보에서는 남쪽 나라에서 태풍이 올라온다고 했었다.

남쪽 나라, 남의 나라 태풍이 왜 우리나라까지 올라와서 단잠을 깨우는 건가. 

다시 잠들기도 애매한 시간이다. 

누굴 탓하기도 애매한 상황이다. 

덕분에 조금 일찍 집을 나설 준비를 한다. 

늦을 걱정을 던다.


호들갑이, 소란이, 성급함이 결국 걱정을 덜어준 셈인데 개운치가 않다. 

밤이 되면, 밤이 깊어지고 나면 수십몇 분 설친 아침잠이 아쉬워질 테고 그때는 남쪽 나라, 남의 나라에서 태어나 이미 사라지고 없을 태풍 이름을 곱씹게 되겠지.


 토요일 이른 아침, 고속버스터미널이 유난히 한산하다. 

이것도 태풍 탓이겠지.

링링이라고 했나, 신나게 춤이라도 출 수 있을 리듬을 갖고 있으면서 남의 나라, 터무니없이 많은 사람의 일상 리듬을 부수며 올라오는 건 무슨 블랙코미디인가. 

 때 없이 울리는 재난문자가 정작 재난을 피하기 힘든 이들에게 닿을 일 없다는 건 또 무슨 웃지 못할 일이고.

 버스는 위협적으로 울리는 진동과 경보음에 어울리지 않게 태풍의 눈을 향해 불어 들어가는 바람보다는 느리지만 바람만큼이나 빠르게 고속도로를 달린다. 

결과, 오히려 평소보다 빨리 목적지에 닿는다. 

남쪽 나라, 남의 나라에서 태어나 우리를 향해 올라오는 태풍이 뿜어내는 바람 소리만큼이나 위협적인 경보음에 세상이 주춤한 덕이다.


 공주는 오히려 맑다. 

얼핏설핏 구름 사이로 해가 나기도 한다. 

재난 문자도, 태풍 경보도 남의 나라 얘기만 같다. 

그 시간에 누군가의 집이 부서지고, 누군가의 방이 잠기고, 누군가의 숨이 끊어지는 걸 모르는 동안은 말이다.

 시내도 한산하다. 

평소보다 수월히 집에 닿는다.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청소는 무엇인가.

타인을 위한 청소다. 

가족이나, 친구나, 애인이나, 동생들처럼 마냥 타인이 아닌 이들을 위한 청소는 수월한 편이다.

타인을 위한 청소를 하면서 그 사실을 몸에, 마음에 새긴다.

그 누군가 얘기한, '타인은 지옥이다'는 말은 부정할 필요 없는 진실이다.


 남의 나라에서 완전히 멀어져 우리나라에 더 가까워진 태풍이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창문 하나 열지 못하게 만드는 바람. 

바람만으로는 가까운지 멀리 있는지 확신할 수 없기에 더 두려워진다. 

무엇이 부서지고, 날아가고, 깨어지고, 망가지고, 빼앗기고 있는지 겁내는 게 이상하지 않다.

결국 평소 하지 않던 안부 전화를 몇 군데에 건다.

우리나라, 우리의 나라는 아직 무사하다.


 타인들이 도착했다.

설명과 안내가 자꾸 뒤섞인다.

남쪽 나라, 남의 나라에서 올라온 태풍 탓이다.

바람이 세상을 소란하게 하고, 소란한 세상이 마음을 어지럽힌 탓이다.

부족하거나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말하고 집을 나선다.

내 집에서 나와 남의 집에 묵으러.


 덕분에 늦은 점심인지 이른 저녁인지 애매한 밥을 먹는다.

이건 또 누굴 탓할 수 있을까.

남쪽 나라, 남의 나라에서 올라온 태풍은 벌써 옆 바다를 지나 윗동네로 향했다고 한다. 

그 사이에 어느 학원 간판이 떨어지고, 누구네 집 차양이 날아갔다고 한다.

별 일 아니다.

누가 죽은 건 아니니까.

밥을 먹는데 속보가 들어온다.

집계된 피해 속에 사망자가 들어있다.

남의 나라 얘긴 줄 알았더니 우리나라 얘기가 됐다.

내가, 우리 가족이, 우리가,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안심한다. 

이것이 인간인가 물어보지만, 이것이 인간이다 답한다. 

이것이 인간이다.


 밤이라 그런지 바람도 잔다.

밤이 깊을수록 바람은 잔잔하다.

책방은 늦게까지 불을 밝혀두었다.

심야책방 예행연습.

그렇게 부르기로 했다.

누구를 부르기 전에, 누구와 함께 하기 전에 해봐야 하니까.

해보지 않으면, 해두지 않으면 분명 알아차리지 못하고 엉성하게 흘려보내기 쉬우니까.

마치 어긋난 일기예보에 기상청을 탓하듯, 기대와 다른 시간에 실망해버리기 쉬우니까.

뿌듯이 세 시간을 채워 한 권 읽기를 마친다.

사실 그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다.

고양이가 있었다.

나를 부르는 고양이가, 저녁을 먹으러 온 고양이가, 저녁을 먹고는 나들이 대신 책방을 지켜주는 고양이가.

세상 모든 고양이에게 저녁을 먹일 수는 없어도 찾아오는 고양이에게는 신선한 한 끼를 맛있게 내어주고 싶다.

고작, 그 정도다. 

남쪽 나라, 남의 나라에서 태어나 수백 킬로미터나 떨어진 다른 나라까지 여행하며 무수한 흔적을 남기고는 스스로는 흔적 없이 사라지는 태풍이나 다르지 않다.

명확한 한계와, 확실한 마지막.

그 사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길냥이 둘에게 신선한 저녁을 한 끼 내어주는 일.

그 정도다.


 하루를 마친다. 

정확히는 읽기를 마치고, 쓰기를 마친다.

지금까지 쓴 이 글은 소설일까.

사실은 현실이다.

현실을 얼기설기 엮어봤을 뿐이다.

몹시 엉성해서, 무얼 말하려는지, 어떤 감정을 전달하려는지 읽기 어려운 되다만 그 무엇이다.

가가책방을 지키는 고양이 '아야'

 여기서부터는 감상이다.

이어서 써보자.


 엉성하게 하루를 엮어본 이유는 <딸에 대하여> 역시 명백히 현실에 존재하는, 존재한다고 말하기도 부끄러울 만큼 지극히 당연하고 어디에나, 누구나 보고, 느끼고, 경험하고, 냄새 맡고 있을 적나라한 현실 속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소설을 지었다기보다 현실을 지었다고 해야겠다.


현실은 이미 현실인데 현실을 갖고 지은 이야기가 소설이 되면 현실에서 조금 멀어지기도 한다.

덕분에 핍진한, 숨 막히도록 절박한 이야기에 숨이 막히지 않을 수 있게 된다.


핍진한 소설은 언제나 버겁게 읽힌다.

버거운 소설을 굳이 감내하며 읽을 필요를 느끼지 못할 때는 언제나 피해 다니는 이유다. 

버겁고, 숨 막히고, 감추고 덮어두었던 흉한 현실을 머릿속에서 가슴까지 한껏 머금었다 토해내야 하는 과정을 무수히 반복하는 시간을 왜 자처해서 견뎌야 하는가.


 그것은 적어도 아직은 나의 이야기가 아닌 남의 이야기인데.

바쁨, 즐거움, 슬픔으로 막아둔 고통의 물꼬를 스스로 터놓을 필요가 어디에 있는가.


 <딸에 대하여>를 말하는 게 아니다.

삶에 대하여 말하고 싶은 거다.

인간과 세상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거다. 

그래서 무엇이 달라지는가.

오늘 밤 눕게 될 낯선 잠자리에서 입맛이 쓸 때까지 혐오와 차별과 권리를 곱씹어야 할까.


 소박한 바람이 있을 뿐이다.

부정하지 않기.

긍정까지 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부정하지 않기와 긍정하기는 전혀 다르니까.


 타인을 부정함으로써 스스로를 긍정할 수 있다는 믿음에 근거가 없음은 역사가 증명한다.

남쪽 나라, 남의 나라에서 태어난 태풍이 우리 삶을 송두리째 흩어버릴 수 있음을 부정할 수 없는 것만큼이나 명확하고 명백하게.

 그렇다고 우리 중 누군가가 우리 중 누군가에게 남쪽 나라, 남의 나라에서 태어난 태풍처럼 그들의 삶을 파괴할 권리를 가질 수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어느 바다의 변덕으로 태어나 알지 못하는, 원한도 미움도 없는, 누군지도 모르는,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도 깨닫지 못하는 태풍과 사람은 엄연히 다르니까.


자신이 마치 태풍이라도 된 듯 구는 사람들이 있다.

바다마저 휘젓는 강한 세력을 믿고, 자기 앞에 흩어지고 쓰러지는 무력한 세상을 비웃으며 즈려밟듯 전진하는 사람들.

고요하고 평화로운 태풍의 눈이 전부인 세상 속에 살며 변화와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소설은 허구인가.

독자는 소설에서 무엇을 보는가.

소설을 허구로 읽고, 있을 수 있지만 있지는 않은 비현실이라 믿어도 괜찮은 걸까.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하루를 짓는다.

당연히 누구나 자신의 하루를 엮는다.

그래서 누구나 내일이 되면 소설이나 다름없이 떠올리고 회상할 삶, 한 페이지의 주인이 된다.

다른 사람의 삶과 얽히면 삶은 더욱더 소설에 가까워진다.

그러니까, '우리 삶'을 들여다보는 타인이 보기에 말이다.


 소설을 읽는 독자처럼 살았다.

때로 그 선에서 갈등하고 고민하며 괴로워하기도 했다.

사실 '했다'라며 과거로 치부하기에는 이르다.

여전히 매일 선 안과 밖을 넘나들며 살고 있으니까.

어쩌면 우리 안에 선을 그었다가, 우리 밖에 선을 그었다가 하며 독자다운 변덕을 부리는 게 일상이니까.


 남쪽 나라, 남의 나라에서 태어난 태풍 링링은 남의 나라, 어느 하늘 혹은 어느 땅 위에서 흩어져 사라졌다.

흔적 없이라는 말을 붙이기에는 터무니없는 비를 남기고 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그럼, 링링은 사라진 건가.

'할퀴었다'라고 하는 바다와 땅.

'빼앗겼다'라고 하는 삶과 숨.

'사라졌다'라고 하는 터전과 재산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데.


 비일상이라고 말하기 전에 생각하자.

비일상이라고 말하는 일상도, 비정상이라고 말하는 정상도 모두 현실에 있으니까.

앞서 소설을 써보겠다며 선택한 하루 속 사건, 이야기들이 실제로는 하루의 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음을 기억하자. 여기 적지 않았다고 우리가 살아낸 하루의 어떤 사소한 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는 것처럼.

딸에 대하여_김혜진/민음사

작가의 말을 읽으며 조금 놀랐다.

불과 얼마 전에 비슷한 글을 썼던 기억이 떠올랐으니까.

'이해 불가능', 사실 오랜 시간 인간과 세상과 타인과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애써왔다고 생각했던, 그 결과 조금은 인간을 이해할 수 있게 됐다고 믿었던 오만이(아직은 오만이라는 말 외에는 달리 표현할 말을 떠올리지 못한) 깨졌음을 인정하기 시작했으니까.

 그럼에도 애써야 한다고 믿고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니, 내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애쓰고 반성하고 다시 애쓰는 그 정도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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