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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가책방 Apr 04. 2019

[북리뷰] 문학 해석이 시대를 해석한다

로맹 가리_흰 개/절망을 기르는 슬픈 복수에 희생당하다

로맹 가리_흰 개

책을 읽지 않는 독서가, 책을 고르지 않는 북큐레이터, 감상을 쓰지 않는 감상가.

지난 두 달에 설명으로 붙여두면 좋을 이름이 이렇게나 많이 있다.

간단히 줄이면, 어슬렁 거렸다랄까. 

어슬렁어슬렁도 괜찮겠다.


 그래, 나는 마치 오랜 시간을 들여 잘 훈련된 길 잃은 개처럼 어슬렁거렸다.

문제가 있었다면 집으로 돌아오는 방법은 훈련받지 못했다는 거다. 

주인이 되찾으러 오거나 새로운 주인을 만나기 전까지 들개나 유기견처럼 다만 살아남기에만 골몰하는.


 로맹 가리 <흰 개>를 만난 데서 운명이 뿌리고 지나갔을 냄새를 맡는다. 

마치 아직 인간으로 돌아오지 못한 듯이 냄새를 따라가서 흰 개를 만났고, 흰 개와 동행하다 보니 본래 있던 자리 가까운 여기쯤에 닿은 거다.

 그러므로, 돌아온 이후 처음으로 쓰는 감상에 흰 개가 등장하는 건 필연. 

다른 이름은 운명이다.


운명에 따라 여기로 돌아오게 되어있다는 걸 알았더라면 조금 덜 애썼을 텐데. 


개는 오래전부터 인간과 함께였다. 길이 들고 훈련을 받아 특별한 목적을 달성하도록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거의 언제나 그렇듯 특별한 목적은 모든 인간을 위하지 않는다. 

 사냥하는 쪽과 사냥당하는 쪽으로 나뉘듯이 훈련은 누군가에게는 이로움을 다른 누군가에게는 해로움을 의미하는 거였다. 


<흰 개>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잘 훈련된 셰퍼트 바트카(바트카는 러시아어로 '키 작은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라는 뜻)가 받은 훈련 결과도 그랬다. 한쪽에는 무한한 관대와 친교를 다른 한쪽에는 적대와 공격을 베풀었던 거다. 

 허락해준다면 스포일러가 될지도 모를 제목 <흰 개>가 의미하는 바를 여기 풀어놓고 시작하고 싶다. 

받아들이기 힘들다면 아래에 사진을 넣을 테니 여기까지만 읽기를 권한다. 

'흰 개'는 깊은 비극과 슬픔을 품고 있으니까.

 

사라진 공간 1_공주

<흰 개>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개는 하얀 개가 아니라 셰퍼트다.

'흰 개'는 흑인에게 극단으로 치닫는 통제되지 않는 증오를 품도록 훈련된 개.

너무 훈련이 잘 되어서 흑인이 근처를 지나기만 해도 날뛰며 짖을 뿐 아니라 늙어가면서도 증오가 희석되는 일 없이 내내 강렬한 공격성을 보이는 개를 흰 개라고 부른 거다. 

 하얀 사람들에게는 부러워할만한 최고 좋은 친구, 검은 사람들에게는 공포와 증오. 그게 바로 흰 개다.


로맹 가리 소설 특징이기도 한데 사실 읽으면서 이 이야기가 실제 '있었던 사건'인지 '허구'인지 갈팡질팡했다. 물론 사실과 허구가 섞여 있을 거라는 정도는 당연히 염두에 넣었지만 '어디까지 사실'인지 자꾸 궁금해졌다. 결국에는 '모두 있던 일'이라 생각하고 소설이 아니라 에세이로, 논픽션처럼 읽어버린 듯하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듯하다'는 기분이니까.


 연도와 날짜, 당시 미국과 프랑스 정세, 베트남 전쟁은 물론 아내 진 세버그와 실명은 아니더라도 실제 인물을 모델로 삼았을 등장인물들 설정과 사건.

마치 현실이 너무나 참혹해서 마주할 수 없을까 봐 허구처럼 꾸미려다 너무 현실이 될까 봐 적당히 망상 같은 상상을 섞어 내놓은 듯하다.


 소설 속 배경이 되는 주요 사건을 두세 가지만 적어보면 첫째는 마틴 루터 킹 목사 암살이고 둘째는 베트남 전쟁에 미군으로 참전한 흑인, 셋째는 흑인 인권을 위해 활동하면서 '니거 러버'로 불린 여배우 정도다. 

 

나는 로맹 가리만큼 '작가와 작품을 분리해야 하는가?'라는 의문에 답하기 망설이게 되는 작가를 알지 못한다. 내공이 부족해서도 그렇지만 작가 로맹 가리를 빼고 로맹 가리 소설을 해석하려고 하면 도무지 엉뚱한 방향으로 밖에 나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로맹 가리 소설에 작가 로맹 가리를 대입해서 읽곤 하는 이유다.  

 참고로 덧붙이자면 <흰 개> 첫 장에 등장하는 '교살자 피트'라는 별명이 붙은 7미터짜리 비단뱀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로 내놓은 소설 <그로칼랭>을 읽어보라.


 로맹 가리는 러시아에서 태어난 유태인이면서 프랑스 국적을 얻어 전쟁에 나가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으며 미국인 영화배우 진 세버그와 재혼했다. 

 인종 차별과 지긋지긋할 정도로 인연이 깊은 사람이 바로 로맹 가리인 셈이다. <흰 개>는 써야 했고, 쓰여야 하는 이야기였던 거다.


 이 소설을 발표할 당시 프랑스 문단에서 로맹 가리는 퇴물처럼 취급받았다. 뭘 쓰든 평가절하에 이래서 비판, 저래서 비난을 들었던 거다. 하지만 로맹 가리 사후에 평가는 반전됐고 유일하게 두 번이나 공쿠르 상을 수상한 신화 주인공이 됐다. 만약 문학 해석이 시대 해석을 반영한다면 당대와 현대는 어디가, 어떻게, 얼마나 달라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충분한 시간에 충분한 정보까지 더해진 다음에는 시대가 더 흘러도 평가가 바뀌지 않게 될까?


 이렇게 생각해보자. 과거에는 대학 교재로 채택되기도 하고 명사가 추천도서로 소개했던 책이 이후 작가 이력이나 행보가 밝혀지면서 평가가 뒤집혔다면 이건 사람들이 달라졌다고 봐야 할까 단지 시대가 변했을 뿐이라고 생각해야 할까?

 사람이 달라졌다면 무엇이 그들 인식을 바꾸었을까?

시대가 변했다고 한다면 정보 해석이 달라진 걸까 정보 전달 속도와 범위가 달라진 걸까?


 이 물음들은 사실 정답을 정해놓고 시작하는 답정너(이미 정답이 나와있음)식 물음이다.

해석과 평가가 달라지는 건 어떤 특정한 조건이 변해서가 아니라 많은 조건 중 어느 하나 혹은 여러 가지가 변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렀기에, 인식이 바뀌었기에, 충분한 정보가 적당한 순간에 부족하지 않을 만큼 전달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시대에 동일한 문학은 존재할 수 없는 게 된다.

 읽는 이가 사는 시대가 달라진다면 동일한 텍스트라고 해도 문학 해석은 시대를 반영해 달라지니 말이다.


 같은 사건, 역사 속 사실을 두고 다른 해석을 내놓는 사람들을 매일 본다.

문득 다른 해석이 낳는 갈등과 분쟁이 좀처럼 해결되지 않는 이유, 솔직히는 해결 불가능한 상황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해석 문제가 아니라 믿음 문제인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정보가 더해지고, 인식이 바뀌면서 해석은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믿고 싶은 게 있을 때, 그렇게 믿어야만 자기 삶 속 많은 시간을 쏟아부은 노력들이 진실로 남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부정함으로써 자신을 긍정할 수 있게 되는 아이러니.

흑인을 증오하면서 흰 개로 불리는 셰퍼트처럼 말이다. 


 로맹 가리는 인종 차별을 상징하는 표상이 되는 흰 개를 보며 절망하며 슬픔을 느낀다. 하지만 정말 슬픈 건 절망하는 인간이 아니라 흰 개의 삶이 아닐까. 망가지지 않으려 해도 망가질 수밖에 없도록 길들고, 회복하고 싶어도 회복하지 못하도록 훈련된 비극 그 자체니까. 


 문학에서만 생각해본 거지만 문학을 통해 얻어낸 해석이 엇갈리거나 부딪히는 건 아직 행복한 일 아닐까 싶다.

슬픈 건 문학을 읽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일.

더 슬픈 건 겨우 만난 그 사람조차도 대화나 소통이 불가능함을 깨닫는 일.

무엇보다 슬픈 건 대화도 소통도 불가능해진 사람이 바로 나였음을 알아차리게 되는 일.


 나는 겨우 '무엇보다 슬픈 일'이 현실이 되지 않도록 애쓰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감상을 마침. 

사라진 공간 2_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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