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월은 잔인해만 가는가

기억하고 기억에 새기며

by 가가책방

얼마나 심각하게 생각했느냐고 되물으면 대답이 궁해질 테지만 나는 제법 오랫동안 죽음을 생각했다.

죽느냐 사느냐를 생각한 순간도 있지만 그건 그야말로 순간일 뿐이다.


죽음이 무엇이며,

무엇이 죽음이고,

(나는 이 두 질문을 엄연히 다르게 느낀다.)

죽음이 바꾸는 현재와 죽음 다음에 살아갈 미래를 생각했다.


죽음 다음에 살아갈 미래를 생각한다는 점에서 이 죽음은 절대적 의미에서 내 죽음이 되지는 않는다.

엄밀히는 생물학과 법적 측면에서는 말이다.


죽음은 언제나, 어디에나 있다.

가까운 사람 혹은 그저 아는 사람, 이름만 아는 사람, 이름도 모르는 사람, 내가 모르는 죽음까지 언제나, 어디에나.

죽음이 나를 주인공으로 삼지 않았을 때, 조연이나 단역으로 삼았을 때 내가 어떻게 죽는지, 내 무엇이 죽는지를 오래 생각했다.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싶은 사람들은 거의 적이었고, 그들이 죽을 때 내 삶이 더 확고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언제나 죽어가는 건 사라지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들이었고, 살아있기를 원했던 사람이다.

그 모든 이들은 죽어가면서 내 안의 작거나 큰 부분을 함께 죽였다.

넓은 의미에서 생각하면 끊어진 관계는 모두 죽음이라고 봐야 한다.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서 끊어진 관계이거나 내 세상에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되어 끊어진 관계이거나 여전히 내 세상에 존재하지만 끊고 지내는 관계이거나 충격이나 어려움, 괴로움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그 모든 단절은 죽음인 거다.


서둘러 결론을 적어보면 나와 연결되어 있는 누군가의 죽음은 결단코, 한 순간도 지겨울 수가 없다.

앞서 적은 '차라리 죽어버렸으면 싶은 사람들', '적'조차 간단히 그 죽음을 두고 지겹다고 말할 수 없어야 인간이다. 오래 곱씹으며 통쾌해하기라도 해야, 수십 수백 번을 되뇌어도 후회가 없을 때 비로소 죽음을 바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고작 충동, 작은 미움, 옹졸한 복수로 죽음을 바라는 건 단순한 비극 외에 무엇도 될 수 없을 테니까.


생각이 없어서는 아닐 테고, 다른 생각이 너무 많이 앞세우는 바람에 망언을 토하고 마는 사람들아.

나는 당신들 죽음을 두고 결코 지겹다고 말하지 않을 테니 부디 숨을 거두시라.

수십 수백 번을 되뇌고 곱씹으며 오래 통쾌해할 자신이 있으니 제발 그리 하시라.

생물학, 법적으로 죽기까지는 바라지 않을 테니 우리 세상에 관계치 말고 사그러 지시라.

그렇게 이 세상이 싫다면 당신들 천국에서 오래오래 끼리끼리 행복하시라 말이다.


내게 사월은 참 좋은 달이었고,

몹시 다행스러운 나날 들이었을 텐데,

돌려주기까지는 바라지 않으니,

다만 너희야말로 가만히 있으라.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스케치 연습 100일 남짓에 돌아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