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하기를 얼마나 겁냈던가
사랑을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낸 책을 읽었으니 하는 얘기다.
오래전이라면 오래된 이야기지만 지금도 완전히 이겨냈다고 말하기 어려운 기억이랄까 감정에 대한.
사랑을 생각할 때 먼저 떠오르는 기억 하나는 '겁쟁이'에 관한 거다.
그때는 얼마나 겁이 났던가.
사랑에 필요한 건 사랑 하나뿐이라고 낭만 섞인 이야기를 할 수도 있겠지만 조금만 복잡하게 생각해봐도 하나나 두 가지로는 터무니없이 부족한 게 사랑에 필요한 요소다.
터무니없다고 말한 이유는 가장 중요한 요소. 필수 불가결한 요소가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랑에 필요한 건 사랑인데, 그 사랑이 하나나 둘이 아니라는 이상한 이야기.
사랑하기 위해 사랑이 필요하다는 건 사실 누구나 안다. 타인을, 사람들을, 인류나 지구를, 우주를 사랑하려면 먼저 나를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하니까.
'사랑할 준비'라고 적은 이유는 '사랑하고 있어야' 하는 건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타인이나 사람들, 인류나 지구를 사랑하게 됐을 때 혹은 바깥세상 속 누구 혹은 어딘가에서 다가오는 사랑을 알아차리게 됐을 때에 맞게 준비가 되어 있으면 충분하다는 거다.
조금 부족한 부분이 있어도 사랑이 불가능한 건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준비하려는 마음', 준비할 수 있을 만큼의 준비, 간단히 얘기하자면 '여지' 정도는 있어야 한다. 이 여지야 말로 최소의 조건, 최소한의 필요조건인 셈이다.
일부러 복잡하게 적어봤다. 사랑은 참 단순하면서 복잡한 거니까.
이제 단순하게 얘기를 해보자면 사랑에 필요한 사랑은 스스로를 향한 사랑이다.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거나, 사랑해서는 안 된다거나, 사랑할 수 없다거나, 사랑하기 싫다면 사랑을 시작하기 어렵거나 거의 불가능하거나 아주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혹시라도 그 상태에서 어떤 친분이나 사귐의 관계를 맺더라도 사랑이 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사랑과 비슷해 보일 수는 있어도 그 마음들은 영영 서로의 사랑을 향해 열리지 못하고 전혀 다른 방향에서 전혀 다른 시간에 열릴 테니까.
겁쟁이 얘기를 하려고 했다.
자기를 사랑하는 것.
여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런데 이 용기는 스스로를 믿는데 뿌리를 두고 자란다. 스스로를 믿으려면 자신에게 애정을 가져야 하고, 그 애정은 뒤틀리거나 삐뚤어지지 말아야 한다.
누군가에게는 몹시 어려운 과제가 바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일 수 있다고 하면 이상하게 들릴까?
믿기 어렵다고 느끼거나, 농담이라고 생각할까?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악몽 같은 현실이다.
자기를 사랑하기란 얼마나 어려웠던가.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사람은 거의 모든 순간, 거의 모든 일에 겁을 내기 마련이다.
겁이 날 때의 반응은 사람마다 다른데, 강아지와 비슷한 면도 많다.
어떤 강아지는 겁이 나면 숨거나 도망친다.
어떤 강아지는 날카로운 소리로 짖는다.
어떤 강아지는 너무 겁낸 나머지 물기도 한다.
어떤 강아지는 다가오지도 멀어지지도 못하고 주위를 맴돈다.
더 많고 다양한 반응이 있을 텐데 내가 아는 건 이 정도뿐이다.
자연스럽게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게 된 사람들은 도무지 왜 그렇게 된 건지 이해할 수 없을 거다.
긴 시간에 거쳐 쌓이고 굳어진 감정 경험은 표현하거나 설명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간신히 얘기가 되어 나온다고 해도 이해시킬 수 있을 만큼 설득력 있게 표현하기 어렵다. 한 번 더 좌절하지 않으면 다행인데, "나는 전혀 공감되지도 이해할 수도 없다"는 솔직한 반응에 고심하던 마음이 한 번 더 꺾일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무리 하지도, 무리시키지도 말기를 권하고 넘어간다.
책을 여러 권 읽었다.
많은 책에서 가르쳐주기를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고 했다.
나를 사랑해야 하고,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사람에게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면 무엇도 시작되지 않는다는 말이 어떻게 들렸을지 상상할 수 있는지.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방법을 찾아보고 또 다른 책을 읽어 나갔다. 그렇게 해서 수십 권이나 되는 자기 계발서를 독파했을 때, 특이점이랄까 깨달은 게 있다.
자기 계발서는 중독성이 강하다는 거다.
몇 번인가 언급한 적이 있는데 스스로 부족하다고 느끼는 부분이 있는 사람들 혹은 더 완벽해지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가장 쉽게 찾고 접하는 게 자기 계발서다. 거기서는 이미 자신을 계발하는 데 성공한 사람들이 자기 방식, 자기 삶, 자기 이야기를 풀어놓는데 이미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개인의 경험이나 특징은 간과되고 '성공한 방법'이라는 성취에 주목하게 된다.
이른바 달콤한 솜사탕이다.
솜사탕은 무척 커 보인다. 부풀려졌으니까. 그리고 달콤하다. 설탕인데 아무렴. 하지만 솜사탕을 먹어 배부름을 느끼려면 어마어마한 양을 먹어도 먹다가 칼로리를 소모하는 바람에 포만감을 느끼는 날은 찾아오지 않을 거다. 오히려 다량의 설탕을 지속적으로 섭취한 결과 다른 병까지 얻기가 쉽다. 보이지 않는 병만 얻으면 다행인데 다량의 당분, 지나친 당분 섭취는 외모의 변화까지 부른다. 정말 최악이다.
최근 큰 논란이 된 이슈 중 하나로 취업을 미끼로 자신들의 콘텐츠를 호평하는 글을 쓸 것을 강요받았다는 얘기가 나왔다. 독 중에서도 최악의 독에 걸린 셈이다. 성공한 자들, 동경하던 저자들에게 강요당하고 배신당한 마음을 어디에서 치유할 수 있을까. 자기를 작고 약하게 여겼던 사람이라면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듯한 고통에 시달리지 않을까.
대부분 자기 계발서들이 독자를 착취하게 되는 건 자신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간단하고 쉬운 방법만 적용하면 모든 게 해결될 것처럼 선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는 모든 개인의 상황과 환경, 경험이나 조건이 다르기에 신중하고 세심한 접근이 요구되는 일을 그냥 무작정, 하면 된다는 무모한(그들은 긍정이라고 말하는데) 태도를 부추기는 거다. 한두 번 중도에 포기하게 되면 보통 좌절하게 되는데 흔히 말하는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몇 번쯤 실패해도 무너지거나 흔들리지 않지만 반대편에 가까운 사람들은 크게 무너지는 일이 적지 않다.
운이 필요해지는 순간이다. 불공평한 일이지만 운은 아무나 찾아가지 않는다. 행운의 여신은 뒷머리가 없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지나가버리면 잡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운이 필요하지만 언제나 지나간 다음에 깨닫는 게 운이 없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운 없는 사람은 영원히 글렀다고 생각하며 포기해야 할까.
나를 사랑할 수 없던 긴 시간 동안 포기하고 지냈다. 도대체 용기를 내라고 하는데 왜 용기를 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던 시간이다. 완전히 포기하고 지낼 수 있다면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다는 신비한 마법의 주문이 현실이 되어 거의 무감각하게 지낼 수 있다. 무감각하게 지내도 살아있는 거라면 분명 잘못 살고 있다고 말하기 어려운 무한대의 자유로움을 누리기도 한다(그렇게 보이거나 느끼는 것뿐이라고 해도). 물론 문득문득 깨닫게 되는 순간까지 막을 수는 없다. 가끔 혹은 종종 침울해지던 이유다.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에서 자기 계발서를 거쳐 운 이야기까지 했다.
시작은 겁쟁이였는데, 왜 여기까지 오게 된 걸까.
스스로가 스스로를 사랑할 수 없다고 믿으면서 자기 계발서나 전적으로 타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조언을 따르려다 실패하는 일을 거듭하게 되었을 때 특별히 운이 좋지 않다면 영영 겁쟁이로 살아가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니까 고작 이 한 문장을 쓰려고 지금까지 주야장천 얘기를 늘어놓았던 셈이다.
용기와 솔직함하면 떠오르는 생각의 하나인데 솔직할 수 있는 사람은 보통 강자다. 물리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감정적으로 강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지 않다면 솔직할 수 없거나 솔직하기 어렵다. 무슨 일을 당할지, 어떤 일이 벌어질지, 그 일이 벌어졌을 때 자신이 감당하거나 해결할 수 있을지 믿음도 자신도 없는데 어떻게 무모하게 솔직해질 수 있겠나.
솔직할 수 있다는 건 이후의 위험도 감내하겠다는 용기와 책임감이 있다는 거다. 겁쟁이는 용기가 없어서 겁쟁이인데 솔직함과 인연이 닿지 않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말이다.
이쯤에서 겁이 없어진 계기를 떠올려 본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단지 운이 좋았던 거라 생각한다.
압도적인 독서량과 경험, 게다가 헛소리를 늘어놓는 이를 자기들 앞에 붙잡아두고 새벽까지 진심 어린 조언과 심오한 철학을 풀어낼 수 있는 사람들과 만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있을 법하지 않은 행운인가 말이다.
사실 스스로에게 한 번 더 실망하고 끝날 수도 있었다.
나는 안 된다고, 왜 나만 안 되는 거냐고, 스스로를 탓하고 비난할 수도 있었고 그 반대로 타인과 세상을 탓하고 비난할 수도 있었지만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았다. 돌아보면 그건 용기는 아니었다.
오기였던 거다. 용기와 종종 헷갈려하는 게 객기다. 객기보다 조금 나은 게 오기라고 할까.
보통 용기에는 확실한 근거가 존재한다. 하지만 객기에는 전혀 근거가 없다. 오히려 터무니없는 쪽에 들어간다. 하지만 오기는 적절한 순간에 적당한 정도로 부리면 용기와 비슷한 효과를 누릴 수 있다.
이건 꿀팁일 수 있는데 때때로 오기를 좀 부려도 괜찮겠다 싶으면 좀 끝까지 오기를 부려보기를.
(물론, 이건 특별한 경우라 타인에게 적용해도 되는지 의문을 품고 있다)
용기 없는 사람에게 솔직해진다는 건 약해진다는 걸 의미한다.
지금은 앞서 적었듯이 솔직할 수 있다는 건 용기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인다.
겁쟁이들이 가장 많이 하는 오해는 용기 있는 사람들은 강하기만 할 거라는 게 아닐까 싶다.
용기가 있다는 말은 위험을 감수하겠다는 각오를 내포한다.
겁쟁이는 더 갖지 못하더라도 잃어버리지 않기를 바라고, 용기를 내보는 사람은 갖고 있는 걸 잃을 위험이 있더라도 자신이 바라는 걸 얻게 될 가능성에 건다. 도박처럼 희박한 가능성에 스스로를 내맡기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잃게 되더라도 되찾아 오겠다는 각오, 되찾아 올 수 있다는 확신을 품고 다닐 때 용기를 낼 수 있게 되는 거다.
용감한 척했지만 누구보다 겁쟁이였던 적이 있기에 말할 수 있다.
사랑을 생각할 때면 무엇보다 먼저 떠오르는 몹시도 겁많았던, 겁쟁이의 시간.
다 가진 것처럼 허세를 부리기도 했다. 그러다 운 나쁘게도 강자들에게 걸려 박살이 났고 운 좋게도 그때 오기를 부린 덕에 조금 더 단단한 나를 만드는 디딤돌 쌓기를 시작할 수 있던 거다.
관계를 생각할 때 제일 먼저 떠올리는 소설은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다.
닉 캐러웨이에게 아버지가 했다는 얘기.
"누군가를 판단할 때는 모두가 자신처럼 모든 기회를 누릴 수 있던 게 아님을 잊지 말라."는.
사랑을 생각할 때 제일 먼저 떠올리는 소설은 로맹 가리의 <자기 앞의 생>이다.
"사랑해야 한다."는.
그리고 변하고자 하는 노력을 생각할 때 제일 먼저 떠올리는 괴테 <파우스트> 속,
"인간은 애쓰는 동안 방황하기 마련이다."라는(파우스트 박사가 구원받는 게 못마땅하지만).
어쩌면 사랑을 생각할 때 겁이 먼저 나는 걸 느낄 누군가가 있다면.
겁이 나는 게 얼마나 당연한 지 스스로에게 알려줬으면 싶다.
타인을 판단하는 일도 서두르거나 섣불리 하면 안 되지만 스스로를 판단할 때도 섣불리 결론짓지 않도록 하고, 사람은 누구도 사랑 없이는(그 사랑이 어떤 모습으로, 누구와의 관계 속에 있든) 살아갈 수 없으며, 모두가 방황하며 자신의 길을 찾기 위해 애쓰고 있음을 알아줬으면 한다.
이제는 사랑을 생각하면서 겁쟁이를 떠올리지 않는다.
사랑은 뺏거나 빼앗기는 관계도, 성공하거나 실패하는 관계도, 지배하거나 지배당하는 관계도 아니기에.
자신이라고 스스로 인정하는 자신이나, 자신이 아니라거나 혹은 자신이길 바라는 자신이 있다면 스스로 용기 내어 꾸준히 애써줬으면 좋겠다. 여기까지 쓰는 동안 한 시간 반이라는 시간이 지났는데 잠깐 조는 사이에 'ㅏ'가 여섯 줄은 늘어서는 사태가 벌어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스스로를 드러내길 두려워 말되,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만 드러내는 연습을 꾸준히 해나가길 권한다.
'ㅏ'나 줄줄이 누르며 졸고 있던 나는 잠들기로 하는데, 어쩌면 아침에 일어나 이 글을 읽을 아침의 내가 지금 졸면서 마무리를 서두르는 나를 원망할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며.
사랑에는 자신을 인정하고 바꾸며 지킬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함을, 그 용기가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도와줄 수 있음을,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대등한 자리에서 타인과 세상을 끌어안을 수 있음을.
- 오래전에 겁쟁이였던 가가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