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속은 아무도 모른다
상상은 상상입니다.
현실이 되어야 비로소 실감하는 법이죠.
그렇게 될 줄 누가 알았을까요.
공간을 정하고 먼저 시작한 건 벽지를 뜯어내는 작업이었습니다. 오래되고 눅눅한 데다 겹겹이 냄새까지 배어 있는 벽을 처리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전부 걷어내고 다시 덮는 거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떼어내기 전에는 사실 그다음에 무얼 바르고, 어떻게 칠할지 하나도 정하지 않았습니다. 하다 보면 방향이 보일 거라고, 그때그때 최선의 방법을 찾을 거라고 믿었으니까요.
처음 벽지를 뜯던 순간을 떠올려 봅니다. 찌이익 소리와 함께 엄청난 크기로 떨어져 나오던 벽지의 위용이란.
정확히 헤아려보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일곱 겹이나 여덟 겹, 많으면 열 겹도 넘을 듯한 기분. 얇은 벽지였는데도 여러 겹이 쌓이고 불이 더해진 결과 단단한 합판을 만지는 느낌이었어요.
벽지를 뜯고, 뜯고, 또 뜯었습니다. 처음에는 잘 떨어지더니 벽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뜯기 어려워졌는데 그래서 시도한 방법이 물칠 하기. 물을 칠하고, 눅눅해지면 뜯고, 다시 물을 칠하고 눅눅해지면 뜯고, 그렇게 벽지를 뜯는데만 며칠을 보내야 했습니다.
벽지를 뜯으면서 흥미로운 걸 발견하기도 했어요.
이전에 이 공간에 머물며 삶을 채우고 시간을 보낸 사람들이 이야기를 건네듯이요.
그중에서 세 가지 정도만 들려드릴게요.
첫 번째는 벽지 너머에 뚫려 있는 문을 발견한 거였어요. 정말 예고도 없이 느닷없이 문이 나타났는데, 이 문은 심지어 옆방으로 통해있었습니다. 더 놀라운 건, 제 쪽에서 열고 들어갈 수 있었다는 거예요. 문 너머로 보이는 빛은 옆방에 사는 사람은 문의 존재를 알고 있음을 알려주었죠.
문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은 열 수 없고, 문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도 열 수 없는. 문 본래의 역할인 '통과'라는 과정을 수행하지 못하는 문. 잠깐 유혹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이 문을 열면 그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하는 궁금함이요.
다행히 유혹은 그리 강렬하지 않았고, 임시나마 스티로폼으로 막고 벽지 뜯기를 계속했죠.
두 번째는 절 같은 곳에 가면 볼 수 있는 화려한 색깔에 사원을 연상시키는 문양의 벽지가 뜻하는 바였어요. 나중에 옆집, 무궁화 회관 어른께 물어봤더니 이 공간과 그 옆 공간에 두 사람의 무속인이 머문 적이 있다더군요. 제법 아래쪽에 붙은 벽지라 최소 15년 전으로 추측되는데 새삼 이 공간을 지나쳐간 사람과 쓰임이 다양하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세 번째는 어떤 '낙서'였습니다. 사진을 보여드릴게요.
'미연'이라는 글자 보이나요?
아래에 찢긴 선은 어떤 얼굴을 그린 그림의 일부입니다. 정확히는 머리카락 부분이요.
연인이었는지, 짝사랑하는 누군가의 이름이었는지, 아니면 이 곳에 살던 아이의 이름이었는지 상상하게 되더라고요. 썩 잘 그린 그림은 아니었지만 애틋함이 느껴진달까. 차마 나머지 얼굴까지 찍어두지 못했지만 어떻게 생각하세요?
앞서 적은 문틀에는 20년쯤 전에 유행하던 빵에 들어있는 스티커도 붙어있었어요. 도대체 얼마나 오래전부터 이 공간이 나뉘어 있던 건지, 새삼 궁금해집니다.
며칠 동안이나 물 바르고 뜯기를 계속한 끝에 드디어 고지가 보였습니다. 더 더뎠던 이유는 벽지를 뜯으면서 합판으로 막혀있던 천정도 뜯어냈기 때문이었어요. 다음에 어떻게 할지, 나중에 복구하라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깊이 생각하지 않고 낮은 천정이 너무 답답하고, 세월과 함께 찌들어 있는 벽지를 완전히 제거하는 방법이 달리 없어서 택한 거였죠.
그리고, 이 모든 게 현명한, 아주 잘한 선택이었음이 나중에 밝혀집니다.
뜯어낸 벽지를 담으면서 깜짝 놀랐어요. 처음에는 50리터 봉투 하나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주 많이 부족했거든요. 그래서, 얼마나 나왔나 하면요.
150리터였어요.
그것도 꾹꾹 누르고 밟아서 담은 결과 겨우겨우 넣을 수 있었죠.
각 면이 3.6미터, 1.2미터, 1.8미터, 1.8미터, 2미터 정도였으니까 3.6*3.6 정도 되는 면적에서 나온 벽지가(심지어 두꺼운 벽지도 아니었음에도) 꾹꾹 담아서 150리터나 나왔던 거예요.
담으면서 새삼스럽게 '정말 여러 겹이 붙어있었구나' 싶었습니다. 정말 긴 시간, 많은 사람들이 이 곳에서 살았겠구나 하는 생각도 함께요.
벽지 뜯기를 끝냄으로써 진정한 공간 만들기가 시작됐어요. 우선 드러난 천정과 전선 처리가 시급했죠.
이미 비어있는 공간에도 더 비우고 덜어내야 새로운 시작을 준비할 수 있음을 배우는 과정이 됐습니다. 켜켜이, 두껍게 덮이고 쌓여서 치우기가 간단하지 않더라도 꿋꿋이, 끝끝내, 이겨내야 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요.
이제 진짜 시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처음 해보는 공간 인테리어 DIY와 간단한 실내 배선, 조명과 벽면 처리까지.
해야 할 일은 많고, 할 줄 아는 건 없던 제가 어떻게 책방을 만들 수 있었는지 다음 이야기도 기대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