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니다, 원도심 구조대.
벽지만 뜯으면 뭔가 시작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마는.
역시, 꼭 그렇지만은 않았습니다.
아, 시작되기는 했죠.
다만 작업이나 공사 시작이 아니라 이다음에 어떻게, 무얼, 어떤 방향으로 해나가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일이요.
뜯어낸 장면을 돌아보며 흐릿함을 핑계로 미화시켜 봅니다.
아,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은.
이해를 돕기 위해 평면도를 놓고 얘기를 해볼까 해요.
평면도 왼쪽에 입구가 있습니다.
들어가면 왼쪽에는 중간 벽이 세워져 있고 오른쪽에 두 짝 미닫이 문이 있어요. 그리고 안쪽 공간은 'ㄴ'자.
수치로는 5평 정도 되는 공간이지만 낮은 천정과 중간 벽이 있어 몹시 좁아 보였어요.
그래서 안쪽 천정을 철거하기로 한 거였고요.
지금까지 철거는 그냥 헐어내는 일, 부수기, 제거.
이런 식으로 단순히 생각했는데 직접 해보니 계속해서 정리를 하는 과정이 생겼고, 어디까지 얼마나, 어떻게 뜯어낼지를 순간적으로 결정해야 하는 일이 반복됐습니다.
혹시 DIY로 철거를 계획하고 계시거나, 인테리어를 직접 해볼까 생각하고 계신다면 '어디까지', '어떻게' 할지를 조금 구체적으로 정하고 시작하시길 권해요.
뜯어보니 천정에는 두 가지 스티로폼이 단열재로 쓰였더군요.
천정을 합판으로 가리고 벽지를 바르다 보니 마감이나 내부 정리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는지 목재를 마구잡이로 얽듯 이어 붙인 부분도 많았어요. 인테리어라는 게 보통 밖으로 드러나는 부분, 눈에 보이는 공간을 예쁘게 꾸미는 데 큰 비중을 두기 마련인 거겠죠.
처음에는 천정에 붙어있는 스티로폼은 그대로 둘까도 생각했어요. 하지만 엉성하게 붙인 접착제가 떨어진 곳도 여러 군데였고 무엇보다 오랜 시간 쌓인 먼지와 찌든 냄새를 없애려면 제거할 필요가 있었어요.
접이식 4단 사다리는 반죽동 247 카페 사장님께 빌렸어요.
이후 공사에서도 여러 차례 장비 지원과 조언을 듣게 됩니다.
천정 합판을 제거하고 난 후 드러난 각목 프레임도 다 뜯어내기로 했어요.
천정에 어떤 인테리어 작업이나 효과를 줄 계획은 없었지만 깔끔하지도, 튼튼하지도 않았고 위험해 보였거든요.
그렇게 한 땀 한 땀 철거를 하고 있을 무렵 전화가 한 통 걸려왔습니다.
- 인근 중화요리 집이 폐업을 하면서 내부를 정리하는 듯한데 그 과정에서 버려진 물건 중에 의자도 여러 개 있다. 필요한가?
공주에 책방을 준비하고, 생활하면서 마치 게임에서 비밀 퀘스트가 생성되고 수행하듯이 특정 타이밍에, 필요한 요소를 획득할 수 있는 사건들을 경험하게 됩니다.
필요한지 아닌지, 가져온다면 어디에 어떻게 쓸지 전혀 생각해본 적도 없이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의자 이벤트였지만 '이건 왠지 필요할 듯하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걸어서 3분 거리에 있는 현장을 찾아갔죠.
현장에는 잡동사니와 함께 쌓여 있지만 '아직 살고 싶다'라고 말하는 듯한 열몇 개의 의자와 뭔가를 부수는 소리가 섞여있었습니다. 열심히 부수고 계시는 아저씨에게 다가가 '의자를 가져가도 되겠느냐?'라고 물었더니 '다 가져가도 된다'라고 하셔서 다 가져가기로 했죠. 우선 두 개를 들고 책방이 될 공간으로 돌아왔습니다. 의자 두 개에 고작 3분 거리지만 좀 무겁더라고요. 그래서 빌렸습니다.
'아저씨, 리어카 좀 써도 될까요?'
'그럼요, 써요.'
흔쾌한 대답.
열심히 실어서 한 번에 다 담을 수 있었습니다. 가져가는 게 문제이긴 했지만 이 정도야 뭐, 앞으로 해야 할 일들의 예행연습 정도니까요.
의자를 싣고 있는데 다른 아저씨들이 차를 갖고 왔어요.
한 아저씨가 저를 보며 동행에게 묻더군요.
'의자 필요 없어?'
'없어.'
'불때기 좋을 텐데.'
'많어.'
조금 더 늦었다면 이 의자들은 더 이상 의자로 존재하지 못하는 건 물론, 세상에 나무로 남지 못했겠죠.
그렇게, 예상 못한 순간에 구조대가 됐습니다.
부수는 공간, 리모델링 공간에 어디든 나타나는 버린 물건 구조대요.
의자가 제법 많습니다.
이 의자들을 다 어디에 쓰게 될까.
공간이 작아서 다 쓸 수 없을 듯한데 괜한 욕심을 부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지만 뿌듯합니다.
의자를 의자로 남을 수 있게 했고, 버려져서 부서지고 태워져 사라질 운명을 유예했으니까요.
잘한 일인지, 아닌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겠지만 왠지 푸근한 마음이 됐습니다.
그리고, 오늘 일은 여기까지가 됐죠.
의자 몇 개를 옮기고 났더니 오래 안 쓰던 몸이라 체력에 경고등이 들어왔거든요.
철거는 내일로 미루고 오늘은 여기까지.
공간이 책방이 되기까지.
공간이 비워지는 동시에 공간을 채우는 일의 연속.
철거된 나무들과 구조된 의자.
이들이 모두 책방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