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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가책방 Dec 27. 2019

난감한 책에 맞서는 방법 1

책에 지지 않으려는 독서인의 자세에 관하여

책을 이길 셈으로 책을 읽는 사람이 많지는 않을 거라 생각한다.

애초에 책을 상대로 이기거나 지는 게 성립할 수 없다고 보는 게 현명하다.

그럼에도 종종 호승심을 불러일으키는 책과의 만남을 피할 수 없는 순간이 있다.

어떤 순간들이 있는지, 그런 순간들에 적어도 지지 않기 위해 어떤 마음을 먹으면 좋을지 궁리해 보기로 한다.


물론, 별로 쓸 데 있는 시도 같지는 않다.

오히려 몹시 쓸모없을 듯한 기분, 거의 틀리지 않을 예감이 강하게 밀려든다.

그럼에도 쓸모없음의 쓸모를 응원하는 마음으로, 시작하려고 한다.


 적어도 책에 지지 않으려는 독서인의 자세에 관하여, 그 첫 번째, 난감한 책에 맞서는 방법을 시작한다.

이해를 돕기 위해 예시를 활용할 예정이다.

예시에 사용되는 책은 예시일 뿐, 예시로만 봐주면 좋겠다.

그럼 시작.


순서에 별 의미는 없다. 마침 최근에 읽게 된 책에서 예를 발견했을 뿐임을 미리 알려둔다.

번역서를 번역해서 읽어야 하는 책 예시.


우선,

영어를 영어로 번역해버리는 경우다.


 왼쪽 사진 속 윗 단락 마지막 줄을 보자.

우리 존재가 살아가는 거품 밖에서 일어나는 스펙터클로 보게 된다

번역서를 한 번 더 번역해야 하는 가장 빈도 높은 예라고 생각되는 부분이다.

 


스펙터클은 번역하면 '광경, 구경거리' 정도가 되겠다. 본문에 적용해보면 이런 문장이 되지 않을까?


'우리 존재가 살아가는 거품 밖에서 일어나는 구경거리로 보게 된다.'


굳이 혼란을 줄 의도가 아니라면 '스펙터클'이라고 적을 때보다 '구경거리'라고 적을 때 의미가 더 단순하고 명료해진다. 정말 그런지 아닌지는 앞쪽 문맥을 살펴주길.

 

다음으로, 

유사한 의미로 쓰인 표현을 반복해서, 그러나 다른 형태로 적는 경우다.


마찬가지로 왼쪽 사진인데, '지구', '시스템'을 언급하면서 쓴 유사해 보이는 표현이 둘 있다.

'인지적 도약'과 '사고의 도약'이 바로 그렇다.

맥락을 보면 '인지적 도약'을 해야 하는 이유는 어떤 '사실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인지적 도약을 '통해', 사고의 도약을 '통해'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는 거다.

문단 전체를 다듬어 이해를 도와줄 수 있는 문장들로 바꿔줬더라면 어땠을까. 

 

 최근 인문학, 과학 분야 도서를 별로 읽지 않은 탓인지, 해당 분야 도서 독해력이 떨어진 걸 실감한다. 하지만 독해력이 떨어진 부분을 감안해도 이해하기 쉽지 않다는 건 '사실'이 아닐까 싶다. 뉘앙스를 알아차리는 것과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는 건 형태는 유사해도 본질이 다르다. 특히 이 책처럼 어떤 주제를 두고 찬반,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전달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면 더욱더 분명하게 알아차릴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세 번째로, 

사실 관계가 불분명한 경우다.  

 오른쪽 사진, 두 번째 문단에 '가즈오 이시구로'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아는 사람은 아는 이름일 텐데,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가즈오 이시구로가 맞다. 해당 문단에서 언급하는 나가사키 주민들에 관한 소설은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로 번역된 출간 되어 있다.

 

 문제가 되는 문장은 이거다.

 

두 번째 원자폭탄이 일본에 투하되고 몇 년 후, 가즈오 이시구로는 나가사키 주민들에 관한 소설을 썼다.

 

우선 알고 있거나, 찾아볼 수 있는 사실들을 적어보자.

1. 두 번째 원자폭탄이 나가사키에 투하된 건 1945년 8월 9일이다.

2.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는 가즈오 이시구로 1986년 소설이다.

3. 가즈오 이시구로는 1954년 11월 8일에 태어났다.

4.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는 나가사키 주민들에 관한 소설이다.

 

네 가지 사실을 알고 나면 분명 궁금하게 느낄 부분이 생겼을 거다.

예를들면, 이런 거.


'두 번째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몇 년 후 가즈오 이시구로는 소설을 썼을까, 아니면 태어났을까.'


40년 정도의 시간은 '몇 년'정도라고 말할 수 있다고 얘기한다면 할 말이 없어진다. 하지만 상식적으로 40년 정도의 시간을 몇 년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원문에 어떻게 썼을지 모르지만 위 문장은 이렇게 했을 때 더 자연스럽게 된다.


예를들면, 이렇게!


'두 번째 원자폭탄이 일본에 투하되고 몇 년 후 태어난 가즈오 이시구로는 나가사키 주민들에 관한 소설을 썼다.'

 

어느 쪽이 더 이해가 쉬운지, 의미가 또렷한지는 읽는 이의 판단에 맡기기로 한다.

 

어쩌면 번역자는 가즈오 이시구로가 언제 태어났는지, <부유하는 세상의 화가>를 언제 썼는지 모르고 있을 수도 있다. 번역은 했지만 사실 관계를 파악해볼 생각까지는 떠올리지 못했을 수 있다. 편집자는 가즈오 이시구로를 알고는 있었지만 번역자가 어련히 잘 알아서 했을까 하고 생각했을 수 있다.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있는 건 오직 당시 편집을 하고 번역을 하던 당사자들 뿐이다.

 그러나 그 결과 혼란에 빠지는 건 그 후, 어느 순간인지 모를 때에 책을 읽게 되는 독서인들이다.

그러니까 이럴 땐 이렇게 하자.

 

1. 외국어를 한국어로 번역한 책이라고 해서 번역이 끝난 건 아니라고 생각하자.
2. 한국어처럼 보이지만 한국어가 아닐 수 있음을 염두에 두자.
3. 한국어를 또 다른 한국어로 번역을 해보자.
4. 의구심을 품고, 가설을 세우며, 검증해 보는 방법도 나름 재미가 있다.
5. 그렇게 하면 버겁던 독서가, 잡히지 않던 이해가, 하나도 없던 흥미가 하나나 둘쯤 생길 수 있다.

 

첫 번째 시간은 여기까지다.

오늘은 번역서를 번역해서 읽어야 하는 어려움을 맞아 난감해졌을 때를 다뤄봤다.

번역이 절대적으로 옳은 건 아니다.

한국어로 바뀌었다고 해서 번역이 끝난 것도 아니다.

그러니 책에 지지 않으려는 독서인들.

난감한 순간에 난감한 채로 책을 덮어버리지 말자.

시원하게 건너뛰면 건너뛰었지, 뭔가 진 것 같은 찝찝함을 남기지 말자.

책이 늘 옳은 건 아니다, 물론 '나'가 항상 옳을 수도 없다.

하지만 독서는 '우리'의 흥미와 재미를 위해 존재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재미 아니면 흥미.

하나는 꼭 찾는 책과의 시간 되길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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