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썼던 편지
오래전 일이야. 깨어나서 전날 쓴 걸 읽어보면 감정에 휘둘려버린 스스로가 부끄럽던 아침이 잦았어. 부끄러움에 오그라드는 손가락을 잘라내는 마음으로 애써 담담하게 굴었지. 이제는 화해해야겠어. 진심은 부끄러울 수 없다는 걸 아니까.
사람보다 책과 가깝고, 살아있는 사람보다 죽은 작가의 말을 믿었지. 대화보다 감상문에 쓸 단어 고르기에 더 마음을 쏟았고, 스핑크스가 그랬듯 자기만 아는 문제를 내놓고는 풀지 못한 사람들에게 벌을 내렸지.
우습게도 ‘나의 진심’을 영원히 알려주지 않는
2020년 1월 17일의 나는 여기까지 쓰다가 그만두었다. 제목은 '밤에 쓰는 편지', 부제는 '내일에게'다.
새로운 생각을 떠올릴 자신이 없어서 예전에 썼거나 쓰다만 글들을 자꾸 들여다본다. 그럴 때마다 지금 나의 단순하고 담담함에 놀란다. '내가 이런 생각을 했다니. 전혀 기억나지 않아!' 하며 부끄러움과 아쉬움이 교차하는 비명을 지른 적도 많다. 물론 속으로만.
앞서 옮겨 적은 글의 마지막 줄 다음에 이어질 말을 오늘의 나는 떠올리지 못한다. '나의 진심'이 무엇이었는지 '영원히 알려주지 않는'건 누구인지, 왜 ' '나의 진심'을 영원히 알려주지 않는' 앞에 '우습게도'를 적었는지 알 길이 없음에 조금 막막함을 느낀다.
예전에 쓰다 말았던 글을 다시 읽으려니 쓰던 사람이 읽는 사람이 되어있는 것이다. 내친김에 독자의 기분을 내보기로 한다. 쓰다만 글을 이어 적으며, 감상문으로 삼는다.
우습게도 '나의 진심'을 영원히 알려주지 않는 지난밤의 나. 진심을 적으면서도 부끄러움을 느꼈던 건 왜였을까. 이 마음이 진심이란 게 부끄러웠던 걸까, 진심이 아닌 마음을 진심이라 적었던 게 부끄러웠던 걸까. 문득 부끄러움과 닮았으면서 전혀 다른 '수치'라는 말이 떠올라.
부끄러움이란 말을 곱씹어보면 낯설고 어색해서, 그 모습이 익숙한 나처럼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아서 생겨나는 감정 특유의 신맛이 남아. 하지만 수치는 두 번 깨물기 싫을 만큼 입맛이 써. 상상만으로도 몹시 억울해지는 맛이 나. 나의 잘못, 내 탓, 과오, 돌이킬 수 없음, 평생의 실수, 일어나지 않았어야 할 일들. 부끄러움이 저절로 일어나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라면 수치는 뒤집어 씌워지는 폭력 같았어. 그래서였을 거야. 사람보다 책을 가까이하고 살아있는 사람보다 죽은 작가의 말을 신뢰했던 이유는.
부끄러움은 부끄럽지 않아. 부당하게 강요하는 수치에 굴복하는 게 부끄러울 뿐이야. 이제 알겠어.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 부끄러움을 아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었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이 수치를 짊어져야 한다는 걸. 스핑크스가 내놓은 문제를 풀지 못하고 단죄당한 사람들처럼 알아야 하는 걸 알기를 거부한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한다는 걸.
담담한 척 늘어놓는 나의 글과 마주하는 건 여전히 부끄러워. 내일 아침이면 전날의 감정에 휘둘린 나를 질책하며 후회하겠지. 그럼에도 다시 한번 적어야만 해. 부끄러움을 아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게 부끄러운 거라는 확신. 부끄러움을 모르는 이에게 수치를 안겨야 한다는 사실.
우리의 하루가 안녕하기를.
오래 전의 내가 된다는 건 몹시 어렵다. 그날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떤 일이 있었는지 확실히 알고 있다고 해도 오늘의 내가 그날 나의 기분이 되기는 불가능하다. 이어적은 글은 결국 오늘 나의 생각이고 마음이다. 수월할 것 같아 예전에 쓰다만 글들을 이어 적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했는데 단 한 번의 시도가 벌써 버겁다. 내 마음은 왜 자라지 않았는가. 그날의 기억과 생각이 오늘 나를 만드는데 분명 얼마만큼의 기여를 했을 텐데 그날의 나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글을 쓰는 이유 중 하나가 그날의 나, 내 생각을 남기기 위함이었다. 확실하게 남겨왔다고 생각했지만 부족했던 모양이다. 진짜 마음이 무엇이었는지, 무슨 말을 하려던 건지 결국 알지 못하고 글을 맺었다. 그럼에도 다른 도리가 없다. 다만 계속 써나갈 수 있을 뿐이다.
- 3년 7개월 만에 일단락 짓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