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
지난 5월 말 잎사귀 하나 남기지 않고 잘려나갔던 버드나무들은 장마와 태풍을 이겨내며 힘껏 새 가지를 세상으로 내보냈다. 믿을 수 없는 회복력으로 잎을 새로 낳고 예전만큼 넉넉하지는 않아도 잠시 뜨거운 빛을 피할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그늘을 만들어 냈다. 손끝의 베인 상처 하나에도 피 흘리며 연고와 밴드를 찾아 호들갑 떠는 나는 상상하기 힘든 굳세고 강인한 모습이다. 강한 버드나무, 그 강함을 보여주기 위한 큰 그림으로 그들은 나무를 잘라냈던 걸까. 벌써 두 번째 잘렸다 회복하는 버드나무를 보며 나는 다만 감탄과 탄식 사이의 애매한 큰 숨을 내쉴 수 있을 뿐이다.
글을 쓰는 주기가 길어지면서 나는 점점 더 약해지는 기분이다. 몸도 약해지고 덩달아 마음도 그 어느 때보다 약하다고 느낀다. 내 몸이 아프거나 마음이 아프거나 무슨 문제가 있는가 할 수도 있겠지만 우리 중 누구도 혼자 살아가지 않으므로 약함과 아픔은 반드시 주변에 어떤 신호로 드러나게 되고 그 신호의 강하고 약함에 따라 번거로움이나 귀찮음에서 충격과 위험으로 언제든 모습을 바꿀 수 있으므로 나와 우리를 위해서 약함 혹은 약해짐을 관리해야 하는 필요가 생겨나는 것이다.
신호는 벌써 여러 차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났다. 집중력이 떨어지고, 목표 의식이 옅어지며, 당면한 문제 해결에 골몰하느라 조금 먼, 사실 멀지도 않은 일들에 소홀해진다. 소홀함이 이어지면 예민하고 날카로워지며 상처 입히며 상처 입는 일도 늘어간다. 단순히 날씨를 탓하려고 해도 벌써 아침저녁으로 선선해진 날씨가 '내 핑계 댈 생각 하지 말라!'라고 선언하는 것만 같다.
오늘 문득 지금의 나는 어떤 상태인가, 사전에서 단어를 찾는다면 무엇이 적당할까를 고민하게 된 건 마음에 심어둔 안전장치가 마침내 가동하기 시작했다는 의미다. 마음이 갈피를 못 잡고 혼란함이 이어질 때면 국어사전을 펼친다. 거기에는 엄밀하게 제시된 해석이 있고 그 해석과 마음을 맞추어 보며 잘 맞지 않는 부분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다 보면 마음이 풀어지는 것이다.
오늘 찾아본 마음의 단어는 약하다와 나약이다. 오래전 어린 날의 나는 제법 몸이 약했다. 추워질 무렵부터 기침을 시작해 겨울 내내 컹컹거리기 일쑤였고(지금 보니 후두염 혹은 기관지염이 잦았음을 알겠다) 만능이라 믿었던 항생제를 늘 과도하게 복용했다. 나중에야 항생제 내성이 오히려 약의 작용을 방해해 질병을 키울 수 있음을 알았지만 이후 거의 30년간 기침감기에 걸리지 않고 건강하게 겨울을 보내는 부작용을 경험했으므로 뭐라 나쁜 말을 하기도 어렵다. 이제야 하는 생각이지만 그때의 나는 몸은 약했어도 나약하지는 않았다.
약함은 나약함을 포괄하는 표현이다. 차이가 있다면 '나약'은 콕 짚어 '의지가 굳세지 못함'이라고 마음의 약함을 이야기한다는 점이다. 약함 가운데 특히 '의지가 약한 것'을 나약하다고 하는 것이다.
목적지가 없으면 길을 잃지 않는다고 한다. 어디로 가든 그 앞에는 오로지 가능성만이 있을 뿐이다. 설령 그 가능성이 큰 위험을 품고 있다고 해도 위험이 절망으로 이어지기 전까지 마냥 즐거울 수 있음이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나약해서 목적지를 모르고 너무 오래 걷다 보면 불안에 집어삼켜질 위험이 커진다. 적당한 목표, 목적을 스스로 제시하고 추구해야 하는 이유다. 이렇게 글로는 쉬운 게 실제로 내게 적용하자면 몹시 어렵고 괴로워지는 게 현실이다. 여러 제약들, 방해요소들, 도움 되지 않는 존재들, 싫은 일들이 자꾸 우리를 가로막는다. 해소되지 않는 불만들 화가 쌓여서 화약처럼 불붙을 준비를 한다. 방향이 없는 힘이 터져 자신도 타인도 세상도 상처를 입는다. 깊은 상처.
글을 쓴다면 좋은 것을 소재로 쓰려고 애쓰는 중이다. 좋은 생각이 더 많아지도록 그렇지 않을 수 있지만 그러한 면모가 더 커질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버드나무에게 배운다. 스스로의 막대한 고통을 견딜 수밖에 없던 슬픔에 공감하며 그럼에도 꿋꿋이 피워낸 잎이 가을바람에 맡기는 너그러움을 배운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해치지 않는 무해함. 나의 나약함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약함의 이유를 더 찾지 않고 조금은 굳세어지기 위해 마음을 다진다. 단어와 단어를 쌓고, 문장과 문장을 늘어놓고, 문단과 문단을 이어 조금 더 단단해지기로 한다.
이렇게 적는 것만으로도 조금 숨 쉬기가 수월해지는 걸 느낀다. 세상의 어려움들에 비하면 나는 너무 수월한 삶을 살고 있음을 깨달으며, 슬픔들에 안타까운 마음을 보내며, 나약한 마음으로 감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