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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콘텐츠와 콘텐츠의 미래

결론은, 나다울 것

by 가가책방

나는 종종 내가 어디에 있는지 잊어버리거나 어디로 가야 하는지 잃어버리고는 한다. 그래서 가끔 이렇게 멈춰서 어디에 있으며, 어디까지 왔고, 어디로 가는 게 좋을지 생각해보고는 한다. 지금이 그러기에 적당한 때라고 믿는다.



2015년 9월 브런치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한 후로 오늘까지 4년 조금 넘는 기간 동안 쓴 글이 599편이다.

그동안 쓴 글을 돌아보자는 생각으로 통계를 확인하고, 앞으로 무얼 쓰면 좋을까, 어떻게 써야 할까를 적으려다 599라는 숫자를 발견했다.

대략 53개월이니까 한 달에 10편, 3일에 1편은 쓴 셈이다. 참,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아서 이렇게나 쏟아냈던 걸까. 그러고도 하고 싶은 말이 여전히 잔뜩 남은 걸 보면 나는 정말 말이 많은 사람인 모양이다.


통계를 보니 또다시 궁금해지는 게 있다. 도대체 저 <날개, 저주받은 자 혹은 깨달음을 얻은 자의 상징>을 제목으로 쓴 글이 어떻게 8만 넘게 조회됐던 걸까?


저 글은 <빨강의 자서전>이라는 소설의 감상문이다. <빨강의 자서전>의 중심은 신화 속 헤라클레스의 열두 과업 중 열 번째 과업인 '게리오네스의 소'에 등장하는 괴물 게리오네스다. 왜 제목이 빨강의 자서전인가 추측하자면 게리오네스의 소가 붉은색이었기 때문이겠다. 돌아보면 저 글을 썼던 당시에도 왜 그렇게 조회수가 높아졌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기억하는 건 다음 홈페이지 첫 화면에 노출됐다는 사실뿐이다. 왜 게시됐는지, 기준이 무엇인지, 누가 봤는지 전혀 모른다고 봐야 한다.

아마도 저 글을 본 사람들도 지금의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았던 듯하다. 만약 글이 좋아서였다면 냉정하게 생각해서 저렇게 적게 공유됐을 것 같지 않다. 댓글도 2개밖에 안 되는데 하나는 아마 내가 쓴 답글일 거다. 참고로 지금 이 글은 한 달 조회수가 10회 정도에 그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2위는 어떨까? 제목으로는 글을 쓴 나도 무엇에 대해 썼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찾아보니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라는 하루키의 에세이 감상문이다. 참고로 1월 한 달 조회수는 2회다. 조회수가 4만에 근접한 글이 지금은 한 달에 2회 정도만 조회된다는 건 시간이 지남에 따른 관심사 혹은 흥미가 달라졌기 때문일까?

3위도 궁금해진다. <소공녀>의 감상문이다. 1월 한 달 조회수는 7회다. 첨부된 사진은 책 표지뿐이고 인용을 포함해도 2,000자 정도로 비교적 짧다.


4위는 <너의 마음이 안녕하기를>이라는 에세이 감상문이다. 1월 한 달 조회수는 4회다. 첨부된 사진이 5장 정도에 비교적 짤막한 문장들로 첨부한 페이지에 주석을 달듯이 썼다.


5위는 그 당시 이렇게 읽어도 좋겠다고 생각해서 적어본 책 읽기 방법론이다. 1월 한 달 조회수가 90회 정도로 50개월 동안 비교적 꾸준히 읽힌 글이 아닐까 싶다. 음, 이 차이가 하나의 계시, 인사이트가 될 수 있을까.





조금 더 깊이 생각해보고 싶은 마음에 확인 가능한 다른 통계도 가져왔다. 이번에는 공유 많은 순서다. 특히 눈에 띄는 건 공유와 조회수에 필연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거다. 심지어 공유와 조회 비율이 1 : 3 이상인 글도 눈에 띈다. 참, 신기한 일이다.


공유 111회로 1위가 된 <비판적 신문 읽기를 권함>은 <신문 읽기의 혁명>이라는 책을 읽고 쓴 글이다. 그 전에도 전혀 달랐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2016년은 특히 언론, 뉴스를 조금 조심스럽게 접하고 대할 필요를 느낀 해다. 그 필요가 나 개인에게 그치지 않고 사람들에게도 유용할 거라는 믿음으로 썼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조회수는 높지 않았다. 고무적인 건 1월 조회수가 15회로 전체 조회수를 생각하면 여전히 읽는 사람이 있다는 거다. 그리고 열 명 중 한 명은 공유했다는 데에도 의미를 부여해 본다.


2위는 조회수 4위였던 글인데, 공유하기 편한 형태였던 걸까, 아니면 비교적 사진 첨부가 많아 읽기 수월하다고 느꼈던 걸까. 음, 적당한 이미지를 함께 배치하는 게 읽을 때 덜 부담될 듯싶긴 하다.


3위 <시작은 한 자루 펜이었다>는 취미로 계속하고 있는 드로잉을 시작한 계기를 적은 글이다. 미술, 그리기 문외한이었지만 취미로 재미를 붙여 꾸준히 하다 보니 나아졌다는 경험과 그 경험으로 이끌어준 사람을 소개했다. 재밌게 썼을 거란 생각이 든다. 즐겁게 하는 일에 대해 쓰는 건 분명 즐거웠을 테니까. 조회수에 비해 공유수가 압도적으로 높은 게 눈에 띈다. 1월이라 뭔가를 시작하려는 사람들에게 자극이 됐던 게 아닐까 싶다.


4위 <핑계 없는 무덤 없고 사연 없는 인생 없다>는 토마스 만의 짧은 소설 두 편이 담긴 <키 작은 프리데만 씨> 감상을 적은 글이다. 어떻게 분석하면 좋을지 도통 모르겠다.


5위 <내가 있을 곳을 찾고 있어>는 말 그대로 간단하게 쓴 리뷰다. <아무도 없는 곳을 찾고 있어>라는 책 리뷰인데, 당시 공주를 오가면서 공간을 꾸려볼까 하는 생각을 하던 때라서 읽고 썼던 게 아닐까 싶다. 조회와 공유 비율이 3 : 1로 조회수에 비해 공유수가 많은데, 공유하는 데에는 꼭 분량이 문제 되는 건 아니지 싶다.



조회 통계와 공유 통계만 가지고는 사실 어떤 유의미한 관계 혹은 결론을 이끌어내기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다. 결국엔 지금처럼 계속 쓰거나, 어떤 주제나 이슈에 맞춰 쓰는 쪽으로 궁리를 시작하게 될 거다. 운이 좋아서 메인에 노출되거나, 에디터의 마음에 드는 소재를 다뤘거나, 읽는 이들의 공감을 얻어 크게 공유가 발생하거나 하지 않는 한 많이 읽히면 1,000회 정도라고 생각하는 게 적당하지 싶다.


지금까지 쓴 글들은 대부분 그때, 누군가에게 '필요할 것 같아서'가 아니라 '그냥 쓰고 싶은 걸' 쓴 거다. 혹은 '아무도 말하지 않으니까 나라도 얘기해야지'하는 조금은 오만한 관점에서 쓴 글도 많다. 지금 돌아보면 참 불필요한 짓을 했구나 싶어 지기도 하지만 당시에는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다는 차원에서라도 쓸 필요가 있다며 스스로 동기를 부여했었다. 참, 그러지 않아도 좋았을 텐데.


만약 나 혼자 기록하고, 나 혼자 알고 싶은 이야기였다면 이렇게 공개되는 페이지에 적을 필요를 못 느꼈을 거다. 결국 무언가를 쓰고, 발행한다는 건 더 많은 사람이 읽고, 공감하거나, 생각하거나, 반대하거나, 의견을 제시하거나, 동의해주기를,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더 컸을 거다. 스스로를 속일 필요는 없다. 이미 세상은 다 알고 나만 모르는 진실일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무조건 많이 봐주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누군가, 필요했던, 공감하는, 생각하지 못했던, 우연히, 그런 누군가에게 발견되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자기 기록의 의미도 작지 않다. 나는 쉽게 잊어버리는 사람이라, 반성해야 할 무엇이거나 꼭 기억하고 싶은 어떤 일, 생각까지 자주 잊어버리고 말기에 기록은 여러 모로 내 삶을 풍요롭고 풍부하게 만들어 주고 있다고 믿는다.


좋은 콘텐츠가 무엇이고, 콘텐츠의 미래가 어떠할지 예상할 수도 있고, 얘기할 수도 있지만 결국 어느 분야에서 활동하고, 무엇을 주제로 삼고, 누구를 독자로 삼느냐에 따라 달라질 거라는 게 현명한 답이 아닐까. 결국 나는 앞으로도 스스로가 만들어 낼 수 있는 최선을 내놓기 위해 애쓸 뿐이라는 게 결론이다. 오직 나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콘텐츠까지를 바라지는 않는다. 다만 조금씩 나에 가까워지는, 조금 더 나다운 글을 쓸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할 뿐이다.


결국은 나 다워야 하니까. 나답지 않은 건 오래 하지 못할 테니까.

계속하기 위해서라도 점점 더 나다워지기 위해 애쓰고, 스스로에게 실망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조금씩 더 나은 내가 되고 싶으니까.


나를 잃어버리기 쉬운 세상에서, 나로 살며, 나로 존재하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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