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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문 앞에서 고양이를 키워?'라며 고개를 돌렸다

나는 고양이를 먹이고 고양이는 나를 키운다

by 가가책방

작은 도시, 좁은 동네라면 크게 다르지 않을 텐데 어느 정도 지내다 보면 매일 지나다니며 만나는 사람 1이나 3, 조금 많으면 5 혹은 11 정도와 오가며 인사하고 지내게 된다.

책방이나 가게, 매장을 꾸리는 사람이라면 주변 사람들과 원만한 관계 유지가 더 중요해지기 마련이고.

공주에서 작은 책방을 열고 조금씩 힘을 내보는 과정에 있기에 조금 더 신경 쓰는 부분이기도 하다.


책방은 북향이고 공간 너비는 스테인리스 샷시 문 네 개 폭이다.

작다 보니 밖을 내다보면 지나는 사람의 표정, 제스처, 때로는 목소리까지 흘러든다.


오늘 적어보려는 얘기는 그 문 너머를 지나던 동네 어른 한 분에게서 흘러나온 작은 목소리와 고개를 돌리는 몸짓이 촉매가 됐다.


목소리 : "왜 문 앞에서 고양이를 키워?"

몸짓 : 간판을 대신하는 둥근 상 너머를 한참 유심히, 찌푸린 표정으로 쳐다보다 오른쪽으로 휙 고개를 돌리며.


북향이라 낮에는 책방 안을 유심히 들여다보면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알기 어렵다.

안에 사람이 있는 걸 알아도 사람보다 가게 문 앞에서 지저분한 모습으로 사료를 먹는 고양이에게 더 관심을 가지셨겠지만 말이다.


처음 그 목소리를 듣고, 몸짓을 봤을 때는 속으로 "키우는 거 아닌데요?"하고 되뇌고는 '왜 고양이에 진저리를 치시는 걸까?' 갸우뚱하고 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이번에는 반대쪽으로 걸어오면서 간판을 대신하는 둥근 상 너머를 힐끗 거리며 지나가시는 거다. 그때도 여전히 고양이는 그 자리에 있었다. 힘겨운 식사 시간을 끝내고 앉아 쉬는 거였다. 그리고 얼마쯤 시간이 지났을까 다시 반대쪽에서 나타나더니 마치 그러지 않으면 허전함이라도 느끼듯 간판을 대신하는 둥근 상 너머를 유심히 쳐다보는 거였다.

고양이는 가고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마땅치 않은 듯 찌푸린 표정은 남아있었다.


고양이에게 해코지를 하고 심지어는 학대하거나 잔인하게 죽이는 사람들이 있다는 얘기를 종종 접한다.

왜 그런 걸까.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지고, 벌이는 걸까.

오늘 얘기 주제는 아니니 원래 이야기로 돌아가기로 한다.


좋게 생각해보면 걱정을 표현하는 방법 하나가 아닐까 싶다.

더럽고, 무서워 보이는 고양이가 가게 앞을 지키고 있으면 들어가려던 사람도 막을 거고, 그러면 장사를 못할 거고, 장사를 못하면 생계가 힘들어질 거고, 살아남지 못할 테니까.

게다가 먹으며 흘린 사료로 지저분해질 수 있어 가게 이미지도 나빠질 수 있으니 걱정되지 않을 수 없었을 거다.

고양이를 싫어하는 이유는 얼마든지 있다.

지저분해서, 병을 옮길까 봐, 소리가 무섭고 시끄러워서, 쓰레기봉투를 찢어놓아서 등등.

잘 아는 건 아니지만 고양이는 매우 청결한 동물이라고 알고 있다.

구제역을 포함해서 동물에게 치명적일 수 있는 질병 중에 인체에 감염되는 건 그 가지 수가 적을 뿐 아니라 기본 위생 관리만 잘해도 예방할 수 있는 게 대부분이다.

소리가 무서운 건 어쩔 수 없는데, 종종 오싹함을 느끼기도 하니까 말이다.

발정기에 들리는 발작적이고 위협적인 소리도 피하기 어렵다. 하지만 최근에는 중성화된 고양이 숫자도 꾸준히 늘고 있으니.

고양이 급식소를 유지하는 이유가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는 쓰레기봉투를 찢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충분한 음식을 먹고 배를 채운 고양이는 좀처럼 쓰레기봉투를 찢지 않는다.

당연하게도.

쓰레기봉투를 찢어서 고양이가 싫다면 찢지 않도록 예방하는 방법인 고양이 급식소를 환영해야 할 텐데 그렇지 않다는 건 고양이가 그냥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해코지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누군가로 인해 주변 어딘가에 늘 고양이가 머물고 있을 가능성이 높아지는 게 싫을 수도.


뭐, 그렇다는 이야기고 사실 정말 하려던 얘기는 다른 거다.


"왜 문 앞에서 고양이를 키워?"라는 말을 듣고 난 후 한참 뒤에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다.

'키우는 거 아니다'는 생각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 생각은 '고양이가 나를 키워준다'는 거다.

나는 고양이를 먹일 뿐이고, 키우는 건 고양이가 아닌 나 자신이라는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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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방에 밥을 먹으러 오는 고양이, '아야'와 '다정이'는 소리를 낸다.

자기가 왔음을 알리는 소리, 밥을 내놓거나 간식을 내놓거나 물을 바꿔달라는 소리, 그냥 반가워서 혹은 인사를 대신해 내는 소리, 다양한 소리를 내며 찾아온다.

그때마다 나는 감정을 배운다.


반가움, 안심, 다행스러움, 애틋함, 어여쁨, 안쓰러움, 아쉬움, 고마움.

지금도 아야와 다정이의 서로의 소중함을 확인하며 기뻐하던 모습을 발견하던 순간을 떠올릴 수 있다.

그 모습에서 느낀 건 우리가 흔히 단절, 거절, 미움, 모욕 따위의 이유로 삼곤 하는 벽을 넘어선 따뜻한 마음이었다. 잃어버렸다고, 사라져 간다고 생각하던 감정을 낯선 길냥이들에게서 찾았던 거다.


문 앞에 고양이가 있다고(실제로 통로로 쓰는 문은 한쪽 옆에 있고, 고양이 급식소는 중앙에 있다) 들어오기를 꺼리는 사람이라면 이 공간과 연결되지 못할 사람이라 생각한다.

책방을 찾아온 분들 대부분은 고양이 아야(아파서)를 발견했을 때 꺼내는 첫마디가 '고양이다'였고, 다음 말이 '아파 보여, 어떻게.'였다.

무서워 보인다고(털빛이 카오스에 눈이 노란색이다) 얘기한 분은 있지만 싫다거나, 징그럽다거나, 더럽다고 얘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물론, 표현하지 않았을 뿐일지 누가 알까마는 적어도 겉으로는 그러지 않았다는 거다. 예의가 있다는 거다.


고양이를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기도 하지만, 다른 방향, 각도, 관점에서 다시 생각해보게 되는 일이 적지 않다. 인간의 관점에서 볼 수밖에 없다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가까이에 고양이가 있다는 건 분명 긍정적 효과를 얻는데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심하게는 '왜 밥을 주느냐'며 '자신이 할 생각은 없지만'"없어져야 한다"고 얘기하는 분도 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봐도 세상에 고양이가 없다면,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될까.


오늘의 결론은 나는 고양이를 먹일 뿐, 나를 키우는 건 고양이고, 세상에 고양이가 없다면 몹시 슬프고 쓸쓸할 거라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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