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지, 내가 아직 고양이를 잘 모르는 거겠다
가가책방 주변에는 고양이가 많다.
한때는 고양이로 가득한 섬에 사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고양이 공원은 신세계.
인간과 고양이가 조화를 이루며 서로 즐거움을 나누는 공간만 같았다.
볕 좋은 날이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잠을 자는 길냥이들.
여기는, 천국인가요.
몇 가지가 없다면 천국일 수 있겠다.
혹독한 추위, 강하고 오래 내리는 비 그리고 동의를 구하지 않고 다가오는 사람들.
발소리가 들리면 고양이는 몸을 일으킨다.
경계하듯 움직임이 있는 방향,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사람은 모르는, 고양이가 설정해둔 거리보다 가까이 다가오면 몸을 일으키고, 그보다 더 다가가면 돌아서 버린다.
조금 더 가까이에서 사진을 찍어보려고, 간식을 준비하지 못해 먹던 과자나 빵을 건네겠다고 다가서는 행동이 때로는 얼마나 경솔한 건지.
고양이를 계속 보고 있으면 조금씩 알게 되는 게 있다.
그중 하나는 표정이 전하는 메시지다.
호기심인지, 경계심인지, 호감인지, 두려움인지.
마치 낯선 사람 표정에서 직감하듯 깨닫게 되는 순간과 비슷하다.
조금 더 익숙해지면 고양이가 내는 소리 속 뉘앙스도 약간씩 구분하게 된다.
안으로 들어오고 싶은지, 배가 고픈지, 누구를 부르는지.
그리고 눈빛.
고양이에게도 눈빛이 있다.
오늘 이야기하려는 애석함이 이 순간에 있다.
인기척에 고개를 돌리는 순간 고양이 눈빛을 종종 이렇게 해석한다.
"누군데? 왜?"
다가오는가.
유난히 친근한 고양이들이 있다.
물론 소수다.
다수는 관전하고, 비슷할 만큼 다수는 거리를 둔다.
적어도 도망치지 않는 길냥이를 비율로 하면 10% 정도, 조금 박하게 거르면 5% 미만쯤 될까.
경계심이다.
애초에 돌아서는 계기도, 돌아보는 이유도 단순히 존재를 확인하기 위함이 아닌 '이 인간이 왜 그럴까?'를 판단하기 위해서일 듯하다. 이미 돌아서기 전부터 다가오는 게 인간인 걸 알았을 테니까.
한 밤 중 산에서 마주치면 가장 무서운 게 뭘까?
호랑이 같은 맹수?
한국 산에는 호랑이가 없다.
이렇다 할 맹수도 없고.
그럼, 유령이나 귀신 혹은 초현실적인 현상?
무서울 수는 있지만 아직 가장은 아닌.
가장 무서운 건 낯선 사람이라 한다.
곱씹어보면 왜 무서운지 깨닫게 되고, '가장 무서운'이라는 딱지를 붙여두기에 전혀 부족하지 않은 이유들을 자꾸만 떠올리게 된다. 그게 무섭다.
내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고양이들은 무슨 일을 겪고는 하는 걸까.
유난히 경계심이 강해지는 때가 있고, 멀쩡하던 고양이가 꼬리를 잃어버리고 나타나기도 하고, 어딘가 젖거나 털이 무언가에 엉켜서 돌아다니기도 하는 걸 종종 본다.
끔찍하기까지 한 뉴스들을 볼 때면 고양이 천국만 같은 이 곳에도 누군가 학대자 혹은 학살자의 광기를 숨기고 있는 건 아닐지 겁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한다.
길냥이가 경계심을 갖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사람인 나도 얼굴을 모르는 사람이 반갑게 인사하면 의아함과 경계와 반가움을 동시에 느끼는데 하물며 종을 초월해서 경계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하다.
가깝다고 느끼는,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도 경계심을 완전히 풀지 않듯 조금은 익숙한, 친해진 인간에게 마음을 열지 않는 고양이도 이해할 수 있다.
경계심은 서로를 위한 안전장치다.
인간은 고양이를 경계해 적당한 거리를 두고, 고양이는 인간을 경계해 선을 넘지 않는다.
이것이 길냥이와 인간의 적당한 관계 아닐까.
매일 열 마리 넘는 길냥이를 만나지만 나는 고양이를 잘 모른다.
너무 모른다고 해도 전혀 틀리지 않을 만큼 무지하다.
경계심이라 판단한 길냥이들 태도도 실제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어디까지나 고양이를 모르는 인간이 자기의 짧은 잣대로 재고, 판단 내린 거니까.
부쩍 추워진 오늘,
한 겨울 길냥이들이 어디로 가는지 문득 걱정 비슷한 생각을 했다.
먹이보다 물이 없어서 죽는 길냥이가 적지 않다는 얘기도 다시 떠올린다.
경계하는 길냥이에게 서러움을 느끼는 게 아니다.
나는 다만 조금 더 알아야 할 필요와 알고 싶은 마음을 다시 새기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