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마음으로, 애착이 기여를 낳는다는 믿음으로.
벌써 한참이나 나이를 먹었고, 오늘 한 살을 더 먹었는데도 여전히 처음이 많습니다.
더 놀라게 되는 건 앞으로도 처음일 그 무엇이 얼마나 남았는지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많을 거라는 확신이에요.
2020년 1월 1일, 오늘만 해도 처음인 게 몇 가지였는지 다 기억하기 힘들 만큼 많았습니다.
새벽 조금 일찍 일어나 첫 해를 보러 산에 올라봤습니다.
해발 239미터, 그리 높지 않은 산이지만 시야는 그 어느 때보다 멀리, 넓었어요.
아쉽게도 첫 해돋이를 볼 수는 없었지만 산 정상에서 아침 해를 기다리며 사랑하는 사람에게 소식을 전하고 처음 보는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새해 인사를 주고받는 경험은 충분한 가치가 있었어요.
일행들과 '저기 멀리 보이는 게 계룡산 같은데', '계룡에 룡은 용용자인데 계는 무슨 계지?', '닭계인가?'하고 있을 때 옆에서 듣고 있던 어떤 분이 닭 계자가 맞다며, 계룡산 산세가 마치 굽이치는 용의 형상에 머리 부분이 닭벼슬 같아 계룡산이라고 설명해 주셨어요. 거기에 덧붙여, 계룡산 자락 출신으로 높은 벼슬에 오른 사람이 많다며 그 이유가 산이 닭벼슬 모양이라서 라고 했죠. 일행이 '닭벼슬'이라 '벼슬'이라고요?하고 기가 막히다는 듯 웃으며 되묻자 오히려 진지하게 '그렇다'며, 계룡산 자락에 별이 몇 개인지 아느냐며, 계룡대를 가리켜 '고로 닭의 형상, 닭벼슬 모양이 출세를 상징'하는 데 이의를 제기하지 말라는 강경한 의사표시를 하셨죠.
일단, 인정.
처음으로 밝은 해 아래 공주보를 보고, 그 위를 달려기도 했어요. 북아프리카 지역에 로마 시대에 조성한 욕장의 타일 무늬를 만든 돌 조각도 처음으로 보고, 꽃대가 기린마냥 길다 해서 꽃기린이라 부른다는 꽃 이름도 처음 들었어요. 벌써 처음이 몇 가지인지 잊어버릴 지경이네요.
오늘 첫 손님은 늘 만나는 길고양이 친구들이었고, 첫 사람 손님들에게는 초한정 제작 굿즈인 가가책방 마스킹 테이프를 처음으로 판매했죠. 채 스무 개가 안 되니까 정말 초한정이죠?
처음으로 열 살이나 됐을까 싶은 아이에게 700쪽에 달하는 돈키호테 1권을 팔기도 했어요. 워낙 의욕이 넘쳐 보여서 도무지 말릴 수 없었어요. 정말, 멋진 일이죠?
또 무슨 일들이 있었더라.
고등어 문양 옷을 입은 길냥이 이름은 궁구미(궁금한 게 많은 호기심, 모험쟁이라서), 뒤에서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건 꼬리가 뚝 끊어져서 담미(담담한 꼬리)인데요. 궁구미는 인상이 착하고, 담미는 인상만은 깡패라서 담미가 더 센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동네 북이었더라고요. 처음으로 둘 사이에 형성된 서열을 확인하기도 했어요.
1월 1일부터 드로잉을 하는 경험도 처음이었는데, 더구나 처음 책방을 찾아온 손님들과 함께 그린 건 또 엄청난 처음이어서 올해도 즐겁게 드로잉을 할 수 있겠구나 하는 예감도 느꼈어요.
담담하고도 담백한 드로잉 클래스는 2020년 내내 계속될 예정이니 많은 관심 바라요.(책방에 오시면 누구나 해볼 수 있어요, 간단한 재료 제공 및 드로잉 팁도 함께!)
처음 책방을 열며 먹었던 그 마음으로, 어떤 책방은 최대한의 이익을 추구하는 공간이기보다 편안하고 아늑해서 사랑방 같은 공간이 되고, 그곳에 가면 어떤 식으로든 책과, 이야기와, 사람들과 가까워지는 공간이길 바라는 마음으로 2020년도 꾸려나가 볼게요.
애착을 품을 수 있도록, 그 애착이 선한 영향력이 되어 자연스러운 기여를 낳을 수 있도록, 그 기여가 관계를 다지고, 얽힌 마음을 푸는데 얼마간의 역할을 하게 되기를.
오래될수록 새로운 공간,
오랜 새로움,
가가책방은 2020년도 이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백 번, 천 번 들어도 넘치지 않는 기분 좋은 인사.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편안한 밤이길 바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