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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 혹은 슬픔에 한계가 있는가

기쁨과 슬픔 속에서

by 가가책방

감정적인 이야기를 할 생각은 없다.



분석적인 편이다.

기쁨 혹은 슬픔 또한 예외는 아니어서 기뻐하기 어렵고, 슬퍼기도 어려워한다.

그러니까, 어려운 사람이다.

굳이 기쁨이나 슬픔에 한계가 있는가를 묻고 답해보려는 이유로 '뭐든 어렵게 만들어 버리는 편'이라는 답보다 더 어울리는 답을 못 찾겠다.

분석의 한계다.


혼란스러움을 덜기 위해서라는 이유를 달아 결론을 먼저 적기로 하자.


기쁨에는 한계가 없다.

슬픔에는 한계가 있다.

기쁨이나 슬픔에 '끝'이 있는가 없는가는 답하기 어렵다.

지금까지 경험을 돌아봐도 안다고 말할 수 없다.

한계는 좀 다르다.

한계란 정도의 문제고, 정도는 지금까지의 경험, 느낌, 생각들을 돌아보면 얼마쯤 가늠할 수 있게 되니까.


기쁘기만 하거나 슬프기만 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기쁨을 느끼면서도 슬플 수 있고, 슬픔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으니까.

그럼에도 한계의 관점에서 기쁨과 슬픔을 나눌 수 있었던 건 어떤 특정한 요소를 삶에 대입해봤기 때문이다.

그것도 몹시 극단적인 요소, 죽음을 말이다.


삶에 죽음을 대입하면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기쁨은 죽음을 가져오는가.

슬픔은 죽음을 가져오는가.


이 질문이 가능하다면 거꾸로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죽음은 기쁜가.

죽음은 슬픈가.


지금까지 타자의 죽음이 기뻤던 적은 없다.

거의 모든 죽음이 거의 항상 슬펐으니까.

죽음은 슬펐고, 슬픔이 종종 죽음을 가져오는 걸 봤으니까.


한계가 있고 없고를 가른 결정 요인은 죽음을 가져오는가와 죽음으로 끝이 나는가 두 가지다.

기쁨이 죽음을 가져오기 어려울 거라는 생각과 기쁠 때 죽음을 떠올리기 힘들었다는 경험이 근거다.

슬플 때 죽음을 떠올렸던 경험과 슬픔이 죽음으로 이어진 사람들이 또 다른 근거다.


간단히 적으면 죽음이 슬픔이나 기쁨의 한계를 결정짓는 요인이 되는가에 대한 답으로 '그렇다'일 때 슬픔을

'아니다'일 때 기쁨을 내놓겠다는 얘기다.


사실 죽음은 슬픔에 한계를 새기지 못한다.

오히려 슬픔의 총량을 키워 한계 또한 높이거나 넓히는데 기여하니까.

거꾸로 죽음은 기쁨에 한계를 새긴다.

더 이상 그로 인해, 그 존재와 함께 새로운 기쁨을 만들 수 없으니까.

과거의 기쁨이 슬픔이 되기 쉬운 죽음 이후의 시간 이야기다.


이미 한참 전부터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어졌겠지만 인내심 깊은 당신을 위해 성실히 이야기를 이어가기로 하자.


처음에 얘기하고 싶었던 건 기쁨에는 한계가 없다는 거였다.

설혹 죽음이 찾아온다고 해도 삶의 모든 순간 속 기쁨은 사라지지 않을 거라는 얘기 말이다.

시간이 흘러 죽음에 무뎌진 후에는 조금 더 기쁨에 의지해 살 수도 있을 거라는 기대를 더해서.

하지만 얘기를 하면 할수록 죽음이 존재감을 키우는 걸 느껴야 했다.

죽음.

얼마나 거대하고 막막한 이름인가.

누군가의 죽음 이후에도 기쁨은 여전할 거라고, 슬픔보다 오래갈 거라고 확신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확신이라기보다 소망에 가까운, 어쩌면 기도라고 해도 좋을 결론이었던 거다.

슬픔에는 한계가 있기를, 기쁨에는 한계가 없기를.

여전히 살고 있고 살아있다.

살아있기에 기쁨을 느끼고 살고 있기에 슬퍼하면서.

기쁨이나 슬픔에 한계가 있는가 없는가 하는 한가하기까지 한 질문을 던지고 답하면서.


분석적인 탓이다.

심심할 때면 결론 없는 글을 끄적이며 마음 가닥가닥을 가르고 나누고 쪼개 보는 오래된 습관 탓이다.


별 일 없이 산다.

슬퍼도 산다거나 기뻐서 산다기보다 별 일 없으니까 산다는 게 더 일상에 어울리는 말이 아닐까.

한계, 사실 그건 아무것도 아니다.

한계에 부딪히기 전에는 그 존재를 알 수 없고, 한계에 부딪힌 다음에는 존재가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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