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 쓰는 데 의미가 있다
2015년 9월에 브런치를 시작했다.
책을 읽고 꾸준히 감상을 남긴 경험 덕이었는지 작가 신청도 무리 없이 받아들여졌다. 지금 돌아보면 브런치를 시작하고 2년은 나의 브런치 시대 황금기였다. 조회수가 많은 글은 8만 회를 넘기기도 했다.
다 지난 일이다.
무대에서 내려온 기분이었다. 아주 오래전에 내려와서 완전히 잊혀버린 무명의.
사실 조회수는 별 의미 없는 숫자라는 걸 인정하려고 한다. 조회수가 많아도, 내가 시간을 들여 적어둔 생각과 고민을 들여다봤다고 볼 수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오히려 적지만 호기심 어린 댓글이 더 큰 의미로 다가왔다.
10년 넘게 글을 쓰면서도 늘 스스로에게 새삼스레 던지는 물음이 있다.
특별히 멋진 물음은 아니다. 글을 쓰거나, 쓰려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던졌을 질문.
"나에게 글쓰기란 무엇인가?"
앞으로도 다시 묻고 답하게 될 질문이다.
시간이 흐르고, 다른 사람을 만나며, 새로운 책을 읽거나, 오래전 읽었던 책을 다시 읽으면서 그 답이 달라질 거라는 걸 알지만 오늘의 질문에 답하기로 하자.
지금 나에게 글쓰기란 이런 의미를 지닌다.
첫째, 표현이다.
글을 쓴다는 건 글을 '잘 쓰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행위다.
종종 "어떻게 하면 글을 잘 쓸 수 있느냐?"고 묻는 사람과 만난다.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오래전부터 고정되어 있다.
"어떤 글을 쓰고 싶은가?"라는 되물음이다.
이 물음에 답을 할 수 있게 된 다음에야, '어떻게'를 생각해볼 수 있게 된다.
어떤 글이 쓰고 싶은지 말할 수 있는 사람에게 건네는 답도 고정되어 있다.
"일단 쓰기를 시작하고, 꾸준히 써보세요."다.
자신이 어떤 걸, 얼마만큼, 어떻게 쓸 수 있는지 아는 건 정말 중요하다.
무엇이 하고 싶은지는 말할 수 있지만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말할 수 없다면 하고 싶은 걸 이루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 표현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된다는 거다.
자신을 드러내고 표현하는 방법은 정말 많다. 중요한 건 자기에게 맞는 방법을 찾는 거다.
앞에서 '잘 쓰는 것'과 '글을 쓴다'는 건 전혀 다른 차원이라고 적었다.
'잘 쓴 글'이 '잘 표현한 글'이 아닐 수 있다는 얘기다.
잘 쓰기도 하고, 잘 표현도 하고 싶지만 욕심일 때가 많다. 이젠 정말 받아들일 때가 됐다.
그래서, 나에게 글쓰기란 잘 쓰기보다 잘 표현하기 위해 노력하고, 생각과 마음을 온전히 담아내기 위해 애쓰는 과정이다. 읽는 이가, 이 글쓴이는 이런 걸 말하고 싶었고, 저런 방법으로 표현을 하는구나 알아차릴 수 있도록.
글의 끝에 '글 쓴 나'를 알아차릴 수 있도록 표현하고 싶은 소망의 결정체다.
둘째, 기록이다.
어렸을 때 정말 하기 싫어하던 숙제가 있다. 물론 하고 싶은 숙제는 없고, 숙제는 다 하기 싫긴 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유난히 싫었던 숙제가 있는데, 곤충 채집이었다. 곤충 채집이 유난히 싫었던 건 곤충이 징그럽다거나, 불쌍해서가 아니었다. 곤충 채집에서 그치지 않고 핀에 꽂아 박제까지 시켰기 때문이다.
기록을 이야기하다 갑자기 박제 얘기를 꺼낸 이유는 글을 써서 기록하는 이유가 그 시간, 이야기, 경험을 박제하듯 고정하려는 의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기록이 필요한 건 과거의 나에 비춰 현재의 나를 들여다보기 위함이다.
기억은 자꾸 과거를 왜곡한다. 미화하기도 하고, 부정하기도 하며, 괜스레 억울한 마음이 되어 화를 내게 만들기도 한다. 자기 스스로가 스스로를 부정하게 만들어 버리는 거다.
기록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의미는 반성일 때가 많다. 사람의 생각은 살면서 경험하고, 배우며 달라진다. 과거에는 부끄러운 줄 몰랐던 일이 사실은 몹시 부끄러운 일이었음을 알게 되는 순간도 있다. 부끄러워서 지우고 싶은 글도 적지 않다. 너무 부끄러워서 지운 글도 적지 않다. 그럼에도 인정하거나 반론하면서 더 깊이, 다른 방향에서 생각하게 되는 기회를 얻은 경험이 많다. 과거의 기록은 박제되거나 죽어 있는 게 아니라 여전히 살아서 지금의 나를 알게 하는 거울이 된다.
기록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는 이유다.
셋째, 말 걸기다.
지금도 그럴 때가 있는데, 모르는 사이에 혼잣말을 많이 했다고 한다. 어지간히 말을 걸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런 버릇이 없어진 게 아마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인 듯하다.
모든 글은 독자를 상정하고 쓰기 마련이다. 일기조차, 타인이 아니더라도 '미래의 나'라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고 살아갈 독자를 생각하며 쓴다.
"다시 읽어볼 생각이 전혀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종종 만난다. 실제로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글을 쓰기 전과 글을 쓰는 도중과 글을 쓴 다음의 '나'가 모두 같은 나일까? 글을 쓴다는 건 곧 읽는다는 거다. 쓰는 동시에 어쩔 수 없이 읽게 된다는 의미다. '다시 읽어볼 생각이 전혀 없다'면 쓸 필요도 없다. 머릿속에서 종이 혹은 화면으로 옮기는 순간 이미 읽고 있는 게 되니까.
결국 쓴다는 건 자신에게나 타인, 아는 사람이거나 모르는 사람들에게 말을 거는 행위다. 나는 그중에서도 수다스러운 편으로, 평소 실제로도 수다스럽다. 궁금한 것도 많고, 알고 싶은 것도 많고, 하고 싶은 말도 많다. 그조차 부족해서 이렇게 쓰는 과정을 거쳐 수고스러운 말 걸기를 하고 있는 거다.
넷째, 즐거움이다.
쓰는 건 그 자체로 즐거움을 느끼게 한다. 좋은 생각을 쓰거나 나쁜 생각을 쓰거나 쓰는 과정을 통해 무언가 변하는 걸 경험한다. 좋은 경험을 써도 좋고 나쁜 경험도 쓸 필요를 느낀다. 거기서도 뭔가 알아차리게 되기 때문이다.
글쓰기의 결과 생겨난 글에 사람들이 공감하고 이야기를 걸어올 때, 보람과 함께 즐거움을 느낀다.
뭔가 알쏭달쏭하고 애매모호하던 생각이 글을 쓰는 과정에서 조금이나마 분명해질 때, 몹시 화가 나는 일이나 유감스러운 사건을 적다가 실제로는 별 것 아니었음을 깨달을 때는 승리의 쾌감마저 느낀다.
정말 별로 하는 것 없이, 쓰는 것 없이, 필요한 것 없이 많은 즐거움을 안겨주는 일.
글쓰기가 그렇다.
구독자가 한 명 한 명 늘어서 2000명이 된 것도 몹시 즐겁고 보람된 일이다. 구독자란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해서 일희일비할 필요 없는 일상다반사지만 그럼에도 즐거운 건 즐거운 거니까.
스케치를 취미로 삼게 되면서 더 확실히 알게 된 게 있다.
꾸준히 하려면 재밌어야 한다는 거다.
게임에 빠진 아이를 가장 빨리 게임에서 벗어나게 하는 방법은 의외로 게임기를 없애거나 금지하는 게 아니라, 게임의 성과 혹은 과정을 '평가'하는 거라고 한다.
숙제를 내듯 달성할 목표를 제시하고, 그 목표에 이르는 과정을 시험하고 채점하는 일을 시키면 게임을 싫어하게 된다는 얘기다.
글쓰기에 큰 부담을 갖는 사람을 많이 봤다. 잘 쓰고 싶은 마음 때문에 쓰기를 시작조차 못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전에 '쓴다'는 행위 자체에 스트레스 혹은 압박감을 느끼는 사람도 있다. 글쓰기를 잘해야 한다는 압박 탓이다.
시작하며 적었듯이 글쓰기는 표현이다. 글은 잘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표현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잘 쓴 글, 논리적이고 기술적으로도 완벽한 글이 재미있는 경우는 많지 않다. 경직된 글은 읽는 사람마저 경직시킨다. 뇌를 경직시키는 음식이 뇌를 망가뜨리는 것처럼, 경직된 글은 글을 대하는 마음을 얼어붙게 한다.
경직된 글이 글을 대하는 마음을 얼어붙게 한다고 쓰면서 마음 한구석에서 서늘함을 느꼈다.
쓰면서 읽은 탓으로, 혹시 나 역시 그 범주에 들지 않았나 슬쩍 찔리는 마음이 됐기 때문이다.
만으로 4년 8개월, 햇수로 6년 차 브런치 작가는 잘 지내고 있다.
예전에는 대장물방울의, 다음에는 서동민의, 이제는 공주 원도심의 작은 책방 가가책방의 브런치를 구독해주시는 2,000명의 독자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앞으로도 즐겁게, 계속,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써나갈 힘이 솟아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