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에 보인다고 모두 진짜는 아니다
2018년 여름, 처음으로 공주라는 도시를 '여행'으로 찾았다.
아주 오래전 수학여행으로 한 번, 공주 사대 과학교육과 원서 접수와 면접으로 두 번 다녀갔지만 기억에 남은 건 없었다.
여행으로 공주를 처음 찾았다는 표현보다 처음 공주를 찾았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하겠다.
당시, 한옥 게스트하우스 운영 새내기였던 봉황재 사장님의 친절한 안내와 함께 동네를 한 바퀴 돌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고즈넉함, 평화로움, 한산함, 조용함,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어슬렁 거리는 작은 호랑이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의 공주는 정말 예뻤다.
인상 깊고, 예쁜 공주 원도심 풍경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게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당연히 평화롭고 여유만만하던 고양이 공원이다. 그때 스쳐 지나갔던 고양이들이 지금은 가가책방의 일부가 됐다. 새로운 얼굴이 나타나도, 늘 보이던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가가책방은 한참 동안이나 술렁거린다.
다른 하나는 거대한 탑이다.
위용도 대단한 탑.
정림사지 오층 석탑을 복원한 듯 보이는 그 탑을 처음 봤을 때 이런 생각을 했다.
"역시 백제의 왕도다운 스케일이네."
기억에 남지 않은 건지, 봉황재 사장님이 얘기해주지 않았던 건지, 그 후로 오랫동안 그 탑을 지날 때마다 감탄하곤 했다.
그때는 그 정도 규모의 탑이 이런 평범한 공원에, 아무런 보호 장치도 없이 세워져 있다는 게 얼마나 어마어마한 미스터리인지 깨닫지 못했다. 진짜 미스터리가 그토록 가까이 있는데도 알아차리거나 의심하지 않다니, 나 답지 않았다.
합리적 의심을 제기하고 확인하는 작업을 했어야 하는데, 그때는 정말 공주 곳곳이, 공주를 찾는 순간순간이 놀라웠던 모양이다.
그 후로 몇 개월이 지났다. 겨울이 됐고, 2018년 12월에서 2019년 1월 사이에는 공주를 더 자주 찾아서 거의 매주 공주에 다녀갈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다. 몹시 의아한 광경을 목격했다. 어딘가에 사진이 남아 있을 텐데, 볼 때마다 한 마리 혹은 두 마리의 고양이가 탑의 기단 부분에 앉아 햇볕을 쬐고 있는 거다.
이상했다. 정말 이상했다.
"겨울이라 추운 건 당연하고, 돌이라면 겨울에 더 차가울 텐데 쟤들은 어째서 저토록 포근한 표정으로 무심히 잠들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정말 이상했지만, 차마 가짜일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 후로도 몇 번이나 지나면서 만나는 볕쬐며 잠든 고양이의 모습에 놀라고 다시 놀랐을 뿐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봄이 지나 초여름 무렵의 일이다.
그때는 가가책방 공사가 한창일 때였는데, 온갖 재료를 공수하느라 자주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탑 옆을 지나다 충격으로 멈춰 서고 말았다. 탑이, 어제는 아니어도 분명 불과 며칠 전까지 그 자리에 있던 탑이 사라진 광경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단 하루, 단 며칠 만에 그 커다란 탑이 사라지다니!
충격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그 소식을 혼자 알고 있을 수는 없지 싶어 져서 전화를 걸었다.
이제는 제법 베테랑이 된 봉황재 사장님 한테다.
전화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는 태연했다. 그걸 아직도 모르고 있었느냐는 뉘앙스가 팍팍 풍긴다.
그러면서 숨겨진 진실을 들려주었다.
그랬는지, 그전에 진실을 들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그 광경을 목격한 후에는 그 탑의 모든 것을 알게 된 기분이 됐던 기억은 확실하다.
종종 그 탑은 행사를 뛰러 간다고 했다. 일 년에 두 번쯤, 한 달이나 그쯤 사라졌다 홀연히 돌아온다는 탑.
그 탑은 돌이 아니라 플라스틱 재질의 그 무엇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그 옛날 얘기를, 지루하기까지 한 얘기를 왜 이제서 꺼냈을까.
세상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거나 알아차리지 못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할 뿐 결과에는 원인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이 얘기를 하게 된 사건은 지난 화요일, 5월 5일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가가책방 두 번째 공간 작업을 위해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그때 멀리서 익숙한 실루엣을 가진 탑이 낯선 차에 실려 있는 걸 발견했다.
"어라?"
나도 모르게 동영상을 찍으며 달리고 있었다.
차에 실린 건 고양이 공원의 가짜 탑.
심지어 두 대에 나누어 실려 있었는데, 위와 아래가 분리되는 거였다.
처음 알았다.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행사를 위해 이동할 때 차를 두 대나 필요로 할 줄이야.
심지어 한 대는 큰 화물트럭이었다. 둘이 합쳐 오층탑.
충격이었다.
멀고 흔들려서 잘 알아보기 힘들지만, 분명 그 탑이었다.
탑을 싣고 가는 차는 도망치듯 서둘러 떠나버렸다.
인사도 못하고 탑을 보내고 말았던 거다.
(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차들은 역주행을 하고 있었고, 좁은 골목길에서 우회전을 하느라 한참을 고생하다 내가 발견했을 때쯤에야 간신히 돌아 나가고 있던 듯했다. 바보.)
공주 원도심 고양이 공원, 당간지주 공원에는 행사 뛰는 오층탑이 있다.
놀랍게도 이 탑은 석탑처럼 보이지만 석탑이 아닌 동시에, 하나처럼 보이지만 하나도 아니었다.
5월 5일부터 공주 원도심을 찾은 사람들은 탑이 없는 고양이 공원을 지극히 당연한 풍경으로 기억하겠지.
아쉽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내 눈으로, 직접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현장을 찾아가 봤다.
진짜였다.
탑은 행사를 위해 어디론가 떠나버렸고, 탑의 무게에 짓눌려 풀이 자라지 못한 의미 없는 네모난 땅만 남아있었다.
이 정도에서 모든 미스터리가 풀렸을 거라 생각했다.
진짠 줄 알았던 탑이 사실은 가짜였고, 늘 그 자리를 지킬 줄 알았던 탑이 일 년에 두 번쯤 행사를 위해 자리를 비운다는 사실 정도까지 풀었으면 다 푼 게 아닐까. 아, 하나가 더 있었다. 심지어 분리되는 거였지. 겉보기엔 오층 석탑이지만 플라스틱이고, 플라스틱이지만 하나는 아니고, 오층이지만 다섯 개가 아니라 두 개로 분리되는 탑. 이제 정말 다 풀었다고 생각해도 되는 게 아닐까.
아니었다.
반전이 남아있었다.
밤이 되어야만 풀리는 반전이 말이다.
탑은 떠났어도 조명은 꺼지지 않았다.
무슨 일일까.
탑이 사라진 자리에는 이유 없이 웃자란 잡초만이 한껏 꽃을 피우고 있었다.
미스터리가 다 해소되기는커녕 하나 더 생겨나는 게 아닐까 싶다.
누군가는 이런 의문을 품게 되지 않을까?
"왜 하필 이 자리에 조명이 네 개나 있을까?"
공주 살이 16개월 차인 나도 풀지 못한 미스터리를 처음 공주를 찾은 사람이 풀 수 있을 리가 없다. 하룻밤 묵으며 공주 원도심의 낮과 밤을 모두 경험하지 못했다면 꿈에도 모를 일이겠지.
공주의 슬로건이라고 할 수 있는 문구가 있다.
"흥미진진 공주"
정말, 흥미진진한 공주다.
처음 왔을 때는 도대체 왜 공주가 흥미진진하다는 건지 미스터리다 했는데, 비로소 그 미스터리를 해결할 단서를 하나 더 얻었다.
공주 원도심 고양이 공원(반죽동 당간지주 공원)에는 탑이 있다.
그 탑은 일 년에 두 번쯤 행사를 뛴다.
행사 뛰는 탑의 미스터리.
미스터리는 끝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