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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가책방 Jun 26. 2020

/질문들/ 감개무량이란 무엇인가

오늘 삶에 쉼표를 놓으며

감개무량하다는 말이 있다는 건 알고 살았다. 감개무량이 어떤 의미인지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감개무량함을 실감하며 살지는 못했음을 깨닫는다. 알기만 하고 살아가는 걸 실감하며 살아가는 삶과 견주어 보면 한 없이 하찮아지기가 쉽다. 거의 모든 삶의 순간을 새삼스럽게 느끼는 순간과 마주하고 보면.
 삶을 살아지는 삶으로 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살아가는 삶이 아니면 사라지는 삶이 되어버리니까.
                                                                                                                                                        - 서동민


 감개무량을 국어사전은 이렇게 푼다. 

"마음속에서 느끼는 느낌이나 감동이 끝이 없음."

 

 예전에는 절대 상상하기도 힘들었을 끝이 없는 느낌, 끝없는 감동을 실감하며 지내고 있다. 그야말로 끝이 없는 감동을 느끼며 살고 있다. 비로소 완전한 살아가는 삶에 들어선 느낌이다. 


 모호하게 쓸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줬으면 한다. 콕 짚어서 '이것 때문에 감개무량하다'고 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감개무량함을 느끼고 있음을 깨닫게 된 순간에 떠오른 얼굴이 하나나 둘인 줄 알았는데 들여다보니 열이나 스물이었음을 깨닫는 중이기 때문이다. 


 읽으면 읽을수록 미궁으로 속 미로를 헤매는 느낌에 빠질 수 있으니 자신이 없다면 여기서 그만 읽기를 권한다.


자, 감개무량하다는 건 이런 거다.




제법 오랜 시간을 살아지는 삶에 쏟았다. 마치 물에 빠진 사람처럼 살아지는 삶 속에서도 살아가기 위한 발버둥을 멈추지 않았다. 그러다 책과 만났다. 책은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마법의 거울 속에 비춰 보여주듯이 보여주었다. 그러나 영원한 마법은 없다. 알고 있겠지만 마법'만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사람도 없다. 삶은 언제나 요구한다. 마법이 아닌 마음을. 

 뒤틀리거나 삐뚤어지지 않고 온전히 애쓰는 마음을 말이다. 


  다행히, 온전히 애쓰는 마음을 완전히 잃지 않고 삶의 갈림길에 던져져 있는 줄 가운데 온전한 줄 몇 가닥을 붙들 수 있었다. 줄 몇 가닥을 붙들었다고 간단히 밝은 세상으로 끌어내지는 마법은 일어나지 않았다. 삶은 자꾸 살아가라고 요구했다. 살아가기 위해 치열해지라고 했다. 무엇을 위해 치열해질 것인지 늘 질문을 던지게 만들었다. 답을 내놓으면 그걸로는 부족하다고 했다. 더 애쓰라고 했다. 무엇을 위해 애써야 하는지 답을 주지 않으면서 스스로 한 없이 헤매도록 버려두곤 했다.


 세상은 많은 순간에 예의 바르게 굴었다. 무례한 말, 행동을 눈 감아주면서 앞에서는 입을 다물고 뒤에서 고개를 저었다. 스스로 고고한 줄 알고 살던 날에는 늘 세상을 탓할 수 있었다. 살아지는 삶을 살며 점점 사라지는 길로 나아가는 줄은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해 서슴없이 혀를 차보였다. 그런 날이 있었다. 제법 많았다.


벌써 10년 전이다. 솔직한 사람들을 만났다. 첫 만남에서 '좀 닥치라'고 말하는 사람들을.  요즘 말로 하면 '참교육을 시전'하는 사람들과 운 좋게 만난 셈이다. 그때부터 세상은 조금 더 숨 쉴만하게 느껴졌고, 살아갈 만 해졌으며, 훨씬 밝아졌다. 돌아보면 참 다행스러운, 흔히 기적이라 부를만한, 그날 이후.


 조금 더 솔직하게 살기 시작했다. 하고 싶은 걸 더 많이 했다. 해야 하는 건 조금 미뤘다. 하고 싶어서 해야 하는 건 조금 더 자주 했다. 읽고 쓰고 이야기 나누는 데 익숙해졌다. 충분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부족하지 않았을 뿐이지 충분하지는 않았으니까. 어떤 부분, 영역, 일, 시간이 넉넉해졌을 뿐이지 삶 전반이 여유로워진 건 아니었으니까. 


 조금 더 나아갔을 때, 또 다른 사람들을 만났다. 좋은 꿈을 꾸는 사람들, 키워나갈 각오와 그 각오를 견딜 수 있을 만큼의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과. 그 사람들과도 자주 만나고 이야기 나누고 어울렸다. 


 솔직하다는 건 약점을 만드는 요인일 수 있다. 하지만 때로는 솔직하지 않은 게 손해가 되기도 한다. 상상하지 못할 만큼 크고 거대하고 엄청나서 회복 불가능에 가까운 손해를 만드는. 그런 실수를 저지를 줄 모르는 사람과 만난 것도 그즈음이다. 


 그사람과의 만남은 또 다른 만남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책방이 만들어졌다. 그 책방이 '가가책방'이다. 누덕누덕 기운, 서툰 솜씨로 만든 작고, 좁은 공간. 하지만 작아서 좋았다. 부족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스스로 만들 수 있었다. 가가책방을 혼자 만들었다고 말한 날이 많았던 듯한데 고백건대 결코 혼자 만든 공간은 아니다. 재료 조달, 번뜩이는 아이디어, 보챔, 강제 오픈이 있어서 가능했던 거다.


 벌써 1년이다. 1년 동안 10년보다 더 많은 일이 일어났다. 마치 지난 9년이 살만한 집을 짓는 과정이었던 것만 같다. 가가책방이 열린 사건이 집 짓기가 끝났다는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집만 있다고 그 안에 들어가 살 수는 없다는 건 세 살 짜리도 안다. 살아가기 위해 꼭 필요한 살림과 도구, 요소들이 있는 법이니까. 혼자 지은 집이 아니어서 다행이다. 이미 그들 속에서, 사람들 안에서 살아가기를 시작하기에 충분한 것들을 얻은 다음이었으므로. 


 수월하기만 한 건 아니다. 간단히 넘어선 듯 보이는 일조차 간단하지 않았고, 번번이 쏟아지는 질문세례에 귀 기울이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일일이 답하는 일에 지친 날도 적지 않으니까. 하지만 실망보다 더 큰 위로와 기쁨 역시 사람들이 가져왔다. 

 가벼운 말 놀림, 경솔한 시늉은 흔하기는 했어도 깊이 파고들지 못했다. 드물게 만나는 진심과 소중한 이들의 마음이 나를 지켜내기에 충분했으니까.


 가가책방의 두 번째 공간, 가가서서도 그렇게 만들었다. 

함께.

그리고, 아이가 태어났다. 

비로소 마음속에서 느끼는 느낌이나 감동이 끝이 없는 순간에 닿게 했다.


 이것이 나와 우리의 감개무량이다.

감개무량함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나에게는 없다. 다만 과거를 거슬러 돌아보며 기록하는 게 고작이다. 

실감한다는 건 산다는 거다.

살아지는 삶 속에서의 실감은 진실하기 어렵다. 거의 모든 실감이 스스로 우러나기보다 외부에서 찾아든 순간의 자극으로 만들어지니까. 마치 사막의 고온 건조한 날씨가 신기루를 만들어 내는 것처럼 말이다.


 앞으로 오랜 시간을 들여 오늘과 내일, 앞으로의 끝없는 감동과 느낌을 기록할 수 있는 언어를 찾아다니게 될 자신을 예감한다. 그것이 앞으로의 감개무량이 될 테지.


 이것이 오늘의 감개무량함이다.

오늘의 삶에 쉼표를 찍으며, 크고 깊은숨으로 돌아본다.


당신의 감개무량함은 무엇인가.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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