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가책방 일지] 좀처럼 잊히지 않는 풍경

익숙하고 너무 당연하지만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 풍경이 있다

by 가가책방
KakaoTalk_20200512_223255680_18.jpg 평화로운 털뭉치들

책방을 여는 날이든 쉬는 날이든 아침에 집을 나서서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정해져 있다.

털뭉치들 밥을 챙기는 일.

지난 이른 봄, 고양이 공원에서 소나무를 뽑아 옮기고, 나무를 다시 심는 공사가 있은 후 고양이들이 공원에 머무는 시간이 줄었다. 대신 가가책방 앞 좁은 잔디밭에 누워 있거나 방금 주차한 차 아래서 쉬는 날이 많아졌다.

왜 고양이가 차 아래에 머물기를 좋아하는지는 아직 풀지 못한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다만, 추측하기에 안전하다고 느끼는 게 아닐까 할 뿐이다.


좀처럼 잊히지 않는 풍경과 마주한 날도 그랬다.

집을 나서서 고양이 공원을 지날 무렵, 종이 박스를 한 가득 싣고 걸어가는 할머니를 봤다.

박스를 싣기도 하고, 걸음을 도와주기도 하는 유모차를 닮은 걸 밀며 느릿느릿 걸어가는 할머니의 뒷모습을.

조심조심 할머니를 피해서 지나쳤다.


책방에 도착해서 문을 열었을 때, 식사 시간에 맞춰 식객들이 어슬렁거리며 나타났다.

특히 담미는 책방 주변을 거의 떠나지 않으면서 끼니를 위해서건 얼굴을 보이기 위해서건 자주 나타나 책방 안을 넘나 든다.

KakaoTalk_20200512_222955141_26.jpg
KakaoTalk_20200512_222955141_28.jpg
'어서 왔냥, 밥은 먹고 다니냥', "님이 나오셔야 들어가죠"

고양이 밥을 챙기는 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밥 주기를 마치고 나서 전등 설치를 도와달라는 부탁이 있어서 철물점에 연장과 재료를 사러 갔다.


가는 길에 먼저 만났던 할머니의 뒷모습과 다시 만났다.

200미터쯤 될까.

별로 힘들어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지만 고단함이 전해졌다. 오랜 세월 고생하고, 힘들여 일한 탓으로 굽어버린 허리와 빈손으로 다니거나, 뭐든 소일거리를 만들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부지런함이 공존하는 풍경에서 자꾸만 부모님을 떠올리고 있었다.


한 번 더 조심조심 지나쳐서 철물점으로 향했다.

다시 만날 거라 생각 못했던 할머니와 세 번째 마주친 건 돌아오는 길에서다.

이번에는 한참 시간이 걸렸던 것 같은데, 할머니는 아직 400미터도 더 못 가고 있었다.

처음으로 본 얼굴은 뒷모습만큼이나 고단해 보였다. 옷차림은 깔끔하고, 얼굴도 말끔했지만 몹시 힘겨워 보였다.


아침 이른 시간, 불과 15분 정도 사이에 세 번이나 마주친 할머니의 모습.

벌써 며칠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공주에 책방을 시작하면서 인상 깊게 느끼는 풍경 중 하나는 자전거 타는 나태주 시인의 소탈함이다. 더울 때나 추울 때나 자전거를 타고, 거의 매일 같은 시간, 같은 길로 출근하고 퇴근하는 모습.

시인인 줄 모르고, 그저 동네 할아버지겠거니 하고 지나다가 나중에서야 나태주 시인인 걸 알고 놀라는 사람도 여럿 봤다. 시인과 하루에도 몇 번씩 지나치고 마주친 날도 있다. 하지만 그런 날조차 느릿느릿 박스를 싣고 가던 할머니의 모습과 마주한 날보다 강렬하지 않았다.


할머니의 뒷모습이 서글프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서글픔은 그리 크지 않았다. 오히려 컸던 건 의아함이다. 왜, 어디로, 어떻게 그토록 천천히 가고 있는 걸까? 왜 그렇게 가야만 했던 걸까.

이야기는, 다시 이해의 문제로 돌아왔다.

KakaoTalk_20200512_222955141.jpg 가가책방과 화실 소규모와 어느 할머니의 방

오래된 물음이 있다.

"왜 그런 걸까?"

이해할 수 없다고 느끼는 것들을 이해하고 싶었다.

사람이, 세상이 어째서 그렇게 움직이는지 알고 싶었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최근에야 실감하게 됐는데, 수십 년이나 되묻던 질문을 조금 내려놓게 된 건 최근의 일이다.

세상 모든 걸, 이해하려고 애쓰면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지 이제는 거의 완전히 포기해버린 거다. 이해할 수 없는 건 이해할 수 없는 거다. 왜 일어나는지 알 수는 있지만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 알 수 없는 일들이 벌어져도 받아들이거나 흘려 넘길 수 있게 된 거다.

걸음이 느린 할머니와의 만남은 내 경험의 일부가 됐지만, 할머니의 삶이 어땠는지, 지금의 삶은 어떤지, 앞으로 어떨 것인지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음을, 이해의 영역에서 완전히 동떨어진 현상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음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됐달까.


우리 모두는 같은 시간을 살면서 다른 시간을 산다. 문장은 모순되어 있지만 모순 없는 사실이다.

누구나 나이 들기 마련이다. 허리가 잔뜩 굽고, 걸음이 느린 할머니의 모습에서 애잔함을 느끼는 것도 저마다의 모습으로 나이 들어갈 우리의 훗날을 받아들이는 과정의 하나겠지.

KakaoTalk_20200322_012544782.jpg 아야, 마지막 모습

다른 얘기다.

아야를 마지막으로 본 게 벌써 두 달 전이다.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아 병원으로 구조했다는 얘기를 전해 들은 지도 두 달이 지났다.


지금은 어느 정도 아야의 죽음을 예상하고, 받아들이고 있다. 그게, 나라는 인간이다. 오히려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건 다정이다. 차라리 아야의 죽음을 목격했다면 받아들였을 텐데, 여전히 종종 찾아와 아야를 찾던 울음을 울 때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다른 고양이들은 아야의 공백에 완전히 적응했다. 특히 4형제는 아야의 영역을 완전히 자기들 것으로 만들었다.

동네 고양이들을 다 때리고 다녀서 다정이를 '엄마한테만 다정한 깡패'라고 부르던 때도 있었는데, 이제는 힘을 못쓰고 동네 북처럼 맞고 다닌다. 그렇다고 어느 쪽을 미워하거나, 가엾게 여기기만 하지는 않는다. 그들에겐 그들 세계만의 법칙이 있고, 언제까지나 방관자일 나는 그들의 세계를 존중해야 하니까.


좀처럼 잊히지 않는 풍경.

아야가 존재하던 세계의 풍경도 그 안에 들어 있다.

언젠가 잊히겠지만, 소멸하지 않도록, 여기 남겨둔다.

거기, 그때, 아야가 있었다.

다정이와 함께.

단골손님.jpg 2019년 06월 아야와 다정이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