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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가책방 Jul 05. 2020

이방인을 사로잡은 풍경, 이방인으로 떠나보내려는 행정

매력이 없는 도시에 머물 이방인은 없다.

공주에 책방을 연 지 1년.

가가책방은 별로 변한 게 없다. 변화라고 하면 공간이 하나 더 늘었다는 정도.

그에 비해 공주 원도심은 1년 사이에 상당히 많이 변했다.

 

 있던 집이 사라지고 주차장 몇 면이 더 생겼다. 없던 한옥이 생기고, 언제부턴가 흰 타일, 벽돌 타일이던 건물에 정체모를 회색 껍데기가 씌워진 모습이 자주 눈에 띄게 됐다.

 제민천도 제법 변했다. 제민천 물줄기 한가운데에 돌로 깎아 만든 아이들 상이 세워지고, 여름밤을 화려하게 수놓을 음악분수도 설치됐으며 거기에 맞춰 전망대도 생겼다.


 제법 큰 사건은 역시 지난해 12월 중앙분식이 자리했던 중앙독서실 건물이 헐린 일이다. 맞은편에 있는 중동오뎅집보다는 늦게 시작했지만 많은 이들이 찾던 곳이고, 공주에서 나고 자라며 학교를 다닌 기억이 있는 이들에게도 의미심장했을 건물은 불과 일주일 사이에 사라져 공터가 됐다.

 이 사건을 두고 두 목소리가 생겨났다. 하나는 공원 한 구석을 늘 가로막고 있던 마지막 건물이 헐려 속이 시원하다는 거였다.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다른 목소리는 상업 공간, 활용 가능한 건물이 거의 없는 공주 원도심의 상황과 추억과 기억을 공유하는 많은 사람들이 존재하는 건물이 헐린 걸 아쉬워하고 있는 목소리였다. 가가책방을 준비하면서 사업 공간을 구하는데 큰 어려움을 겪었던 기억에 깊이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일어난 사건을 두고 무엇이 옳다거나, 이렇게 혹은 저렇게 해야 했다고 말하는 건 별 의미가 없다. 오늘부터 공주를 찾는 사람들은 그 자리에 무엇이 있었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원도심 한가운데에 넓은 공원이 있었다로 공주를 기억할 테니까.

 사실 당간지주 공원, 대통사 지공원이라 불리는 이 공간이 처음부터 공원이었던 건 아니다. 자료 사진을 보면 몇 년 전까지도 집과 건물로 둘러싸여 있는 걸 알 수 있다. 심지어 사진 속 집들은 크고 멋지기까지 했다. 다만 지금은 사라지고 없을 뿐이다.


과거 당간지주 공원 모습/2013년 카카오맵 로드뷰 캡처

공주에서 일하고 살면서 느끼는 가장 큰 아쉬움은 10년, 20년 일찍 공주 원도심에 와보지 못했다는 거다. 그때는 지금보다 더 독특한 매력을 느끼게 하는 공간과 골목이 더 많았을 테니 말이다. 지금도 공주에서 교토를 떠올리는 사람들과 종종 만난다. 자그맣고 아늑하고 조용하지만 골목마다 이야기가 숨어 있는 공간.


 하지만 이런 생각은 별로 의미가 없다. 그때는 공주를 몰랐고, 언젠가 공주에 살게 될 거라고는 꿈꿔보지도 않았으니까. 수많은 사건과 공간을 경험하면서 지금의 내가 된 후에야 비로소 공주의 매력을 발견할 수 있었으므로 그때 왔어도 그저 불편한 도시로 기억했을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예전에 그랬다면 이라거나, 그러지 않았다면이라는 가정은 그만두는 게 여러모로 좋다는 거다. 대신할 수 있는 걸 조금 더 생각하는 게 더 낫다. 예를 들면 앞으로 더 사라지고 부서질 공간을 지키고, 기억하기 위해 목소리를 내고, 방법을 찾는 것 같은 일 말이다.


 만약 내가 영화관을 자주 찾는 사람이었다면 공주에 머물 생각을 하지 못했을 거다. 단지 원도심에 극장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지금은 상상할 수 없지만 한 때 원도심에는 극장이 세 개나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가자 오래된 극장은 확인된 것만 1930년대에 지어졌다. 이름도 유명한 공주 갑부 김갑순이 충청지역 곳곳에 지은 극장 중 하나였던 거다.

 처음에는 공주 극장이었다가 아카데미극장으로 이름을 바꾼 그 공간의 지금 모습은 이렇다.

공주 아카데미극장

역사나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 사실상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보면 그냥 위험한 흉물이 되어 있는 거다. 2년 전 처음 봤을 때는 그래도 이 정도로 상태가 나쁘지는 않았다. 방치의 결과 어느 시점을 지나면서 급속도로 상태가 나빠진 탓이다.


 이 공간과 관련해 전해 들은 가장 아픈 기억은 가족과 관련된 이야기다. 혈육과의 기억을 떠올리게 해주는 유일하게 남은 공간, 그게 이 흉물스러운 극장이 품고 있는 이야기 중 아주 작은 조각이다.


 극장으로의 기능을 잃어버린 후에는 공연장으로 썼다고 한다. 당연히 그 공연 무대에 선 사람들의 기억도 첩첩이 쌓여있을 거다. 그렇게 공유되고 있는 기억이 소중하지 않다면 이 도시의 무엇이 소중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누군가는 건물 수명이 다해서 구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말한다고 한다. 하지만 다수의 건축가는 다른 얘기를 한다. 지키고, 구하려고 한다면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는 거다. 결국 오래 방치되어 흉물이 된 건물이 눈엣가시가 된 이들의 목소리를 수용하는 동시에 보존이나 수리보다 더 쉽고 간단해 보이는 철거를 선택한 건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취미로 그린 드로잉 열아홉 번째 공주극장 아카데미극장

 어설픈 솜씨에도 극장을 그려 남긴 이유는 하나였다.

극장 앞에 붙은 현수막에 '붕괴위험'이라는 문구가 있었기에 그 문구로 유추해보면 조만간 철거 수순을 밟게 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행정이란 그렇게 움직이는 게 아닌가, 민원을 해결하고,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의 의사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이번에 공주극장 아카데미극장 이야기를  찾아보면서 일제시대에 지어진 극장들의 말로에 관해서도 알게 됐다. 그중 가장 흔하면서 비극적인 결과는 원도심의 유서 깊은 극장을 철거한 자리가 주차장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예산이 그랬고, 대전이 그랬다. 하나 같이 '중앙극장'이라는 이름이 붙은 걸 보면 원도심 내 중요한 자리에 있었을 텐데, 중요한 자리에 있던 결과가 주차장이라니. 슬픔까지 느낀다.


 공주에서 지내면서 가장 의아하게 느끼는 점은 역사적인 위상에 비해 터무니없이 부족한, 거의 없다시피 한 근현대 건물의 존재다.

 공주제일교회, 중동성당, 역사영상관.

법원검찰청 건물은 공주에 정착하기 직전에 헐렸다.

그 자리에 지금은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세무서가 신축되고 있다. 콘크리트 슬라브 위에 기와를 얹은 기이한 건축양식으로.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하는 말이 있다.

공주에 왜 정착했는가에 대한 대답이다.

공주에는 공주만의 독특함이 있다. 그것이 분위기라고 해도 좋고, 느낌이라고 해도 좋고, 풍경이라고 해도 좋다. 그런데 그 분위기, 느낌, 풍경을 만드는 공간, 건물, 이야기가 사라진다면 굳이 공주에 머물 이유도 없어진다. 이방인을 사로잡았던 풍경이 사라지고 난 후에는 처음의 이방인으로 떠나야 할 거라는 거다.

 


지금 바라는 한 가지는, 오래, 조금 더 오랜 시간 공주에서 책방지기로, 공주에 애착을 느끼는 사람으로, 시민으로 살아가는 거다. 아직 보여주고 싶은 것이 많이 남아 있고, 함께 하고 싶은 일도 잔뜩 있으니 더 많은 사람과 함께 즐길 수 있도록 말이다.


 아카데미극장이 어떤 모습으로든 사라지지 않고 남았으면 한다. 그 자리에 불분명한 목적을 갖는 근본 없는 건물이 생겨나는 걸 보게 되는 날이 서둘러 오지 말기를 바란다. 무엇을 지을 때도 신중해야겠지만 무엇을 부수려 할 때는 신중에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 번 사라지고 나면 절대 돌이길 수 없다.

 한 사람의 어른이 세상을 떠나면 세상이 잃어버리는 역사가 얼마나 많은가, 그런 어른이 잔뜩 모여 있던, 나고 자라며 가족과 사람들과 함께 했던 공간이 사라진다면 우리가 잃어버리는 역사는 얼마나 크고, 가치 있는 것일까.


 신중했으면 좋겠다.

신중할 수 없다면, 최소한의 보존에 그치며 더 잘 살려낼 수 있는 누군가를 기다려줬으면 한다.

언젠가 우리 아이가, 새로 만난 사람들이, 그 자리에서 함께 어울리며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갈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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