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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가책방 Feb 17. 2021

천일야화도 하룻밤부터.

세상에는 불편한 편안함도 존재한다

 아무리 긴 이야기에도 시작과 끝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보통 사람들의 시작은 대개 우연히, 어쩌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다. 준비를 하려고 하면 좀처럼 시작되지 않던 모든 게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는 순식간에 일어나 버리는 거다. 

 삶이란 게  그런 건가보다. 무언가에 떠밀려 가는 게 아니라, 누군가에 이끌려 하루하루 나아가는 일.


부제 : 어느 여름날 아침 눈을 떠보니 살아오며 하룻밤도 묵어본 적 없는 작은 도시의 60년 된 한옥 게스트하우스였던 건에 대하여.


  2018년 7월, 지인이 공주에 한옥 게스트하우스를 열었다. 엄밀히 말하면 지인의 지인인 그는 모르는 사람이 보기에는 느닷없이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위험 속으로 스스로 뛰어드는 모험가, 탐험대장 같은 사람이었다. 얼핏 계획이 없어 보이던 그의 행보에 다 계획이 있었음을 이제는 안다. 

 아직 세계가 평화롭던 시절이라 사람들이 모이고 다니는 데 어떤 제약도 없었다. 우리는 대장을 따르는 대원들처럼 마을을 다니며 들려주는 이야기를 듣고, 보고, 먹으면서 일박 이일을 온전히 머물렀다. 

 

 솔직히 처음 서울에서 버스를 타고 공주터미널에 내렸을 때는 당황했다. 수도권 외곽의 어느 흔한 위성도시의 도심 풍경처럼 보이는 넓은 도로와 주변에 가득한 아파트가 만들어내는 스카이라인이 익숙하면서도 낯설어서 기대에 어긋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택시를 타고 금강을 건너는 동안 여기가 공주구나 싶은 기대하던 풍경과 마주하면서 안도했다. 나중에 알게 된 흥미로운 사실도 있는데 그때 택시를 타고 건너던 다리가 한강 이남에서는 가장 오래된 철교였단다. 


 한옥 게스트하우스, 봉황재 사장님은 택시를 타려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했다. 

"황해 세탁소 가달라고 하세요."

 사실 우리는 반신반의했다. 세탁소 이름을 말하면 거기에 내려준다고?

 그래도 무슨 이유가 있겠거니 하고 황해 세탁소로 가달라고 했다. 10분쯤 걸렸을까, 오른쪽에 황해 세탁소가 보이고, 택시 기사는 차를 세웠다. 

 공주가 이런 도시다.


 그때는 몰랐지만 처음 금강을 건너던 그 날, 모든 게 시작됐다. 이후로도 까맣게 몰랐고, 지금도 내일 당장 무슨 일이 시작될지 모르지만 이미 시작된 거였다. 

 

 기묘한 경험이 이어졌다. 백제 고도라고 하는 도시의 원도심에서 일본의 대표적 관광도시, 마찬가지로 고도인 교토의 인상을 받기도 하고, 수백 년 전부터 충청 지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도시답지 않게 오래된 집이나 건물, 큰 나무가 없다는 것도 신기했다. 무엇보다 기묘한 건 공주가 누구를 통해, 어떤 곳을 다니고, 무엇을 보고 듣느냐에 따라 정말 흥미진진하거나 정말 실망스러울 수도 있는 도시라는 점이었다. 우리에게는 공주의 매력을 발견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는 대장이 있어 다행이었던 거다. 어쩌면 오늘 공주로 여행을 왔다 실망한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반면에 다른 어디에서도 할 수 없는 특별한 경험을 하고 돌아갔을 수도 있다. 그런 일이 일상처럼 흔한 곳이 바로 공주다.


 

봉황재, 모던 한옥, 게스트하우스


 봉황재 드로잉을 다시 보고 깜짝 놀랐다. 2019년 1월 9일이라니. 벌써 2년 하고도, 1개월에 일주일 전이다. 새삼스레 '시간을 돌아보게 하는 건 기억이 아니라 기록'임을 깨닫는다. 그때가 벌써 2년도 전이라니. 지금 이렇게 기록해둔 걸 다시 몇 년 후에 읽게 되면 또 놀라겠지.

 

 코로나 19 장기화 이후 여행이 위축되면서 공주를 찾는 사람이 줄어들었던 시기가 있다. 하지만 의외로 그 시기는 길지 않았다. 왜냐하면, 공주의 매력 중 하나가 한적함일 만큼 조용하고, 한가롭게 여행을 즐기려는 이들에게는 적합한 도시이기 때문이다. 가가책방도 무인운영으로 방식을 변경한 이후로 주말에 많이 찾아오던 사람들이 평일에 찾아오기 시작했다. 사람들도 도시도 시대와 상황에 적응하기 마련이다. 그런 변화를 명확하게 확인하고 느낄 수 있는 곳, 그곳이 공주다.


 2018년 7월 이후 봉황재에 세 번 더 묵었다. 네 번인가? 아무튼, 그렇게 됐다. 처음 머물던 날의 낯선 설렘은 점점 옅어졌지만 익숙함이 주는 자연스러움과 새삼 알게 되는 숨은 이야기들에 가슴이 뛰었다. 그리고 처음 봉황재 사장님이 그랬던 것처럼, 만나는 사람들과 책방을 찾아온 이들에게 그 이야기를 전해주는 일도 즐거웠다. 


 이 모든 인연과 사건이 시작된 곳, 봉황재의 존재가 새삼 고맙다. 

오늘 밤에는 누가 머물고 있을까. 

나와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오늘 머무는 그 사람들도 공주의 숨은 이야기와 매력을 발견했으면 싶다. 

더 적으면 너무 감상적인 이야기가 될 듯하니 여기까지만 하기로 한다. 60년 된 한옥이 70년, 80년, 세월을 보내며 자꾸자꾸 만 부푸는 이야기보따리가 되길. 그렇게 오래, 그 자리에 남아주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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