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기를 계속하는 동안 점점 하지 않게 되는 일들에 관하여
가끔 습관처럼 예전에 쓴 글을 다시 읽어보곤 한다.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았는지 모든 줄 끝마다 대여섯씩 찍은 말줄임표는 두 말할 것도 없이 없이 완벽한 오점이다. 글이 되지 못하고, 생각 단계에서 머뭇거리다 사라졌을 그 말들은 이제 다시 떠올릴 수도 짐작할 수도 없는, 그야말로 없던 것이 되고 말았다. 어쩌면 오래 곱씹으며 종종 새로운 길로 나아가기 위한 단서가 됐을지도 모르는, 혹은 쓸모없이 지면을 차지하고 말았을 그 말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처음 쓸 때는 두서는커녕 어떻게 써야 하는지 막막하다가 어느 시점을 지나면서 의식의 흐름을 따라 몇 백자, 몇 천자도 어렵지 않게 써낼 수 있게 됐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익힌 요령이 하나 있는데 그 요령의 핵심이 '인용'이다.
인용이란 '남의 말이나 글을 자신의 말이나 글 속에 빌려 씀(표준국어대사전)'이다. 방금 내가 인용을 풀이하며 작은따옴표 안에 다른 곳에 실린 글을 가져다 쓰듯 어디엔가 이미 존재하는, 누군가가 생산해 낸 말이나 글, 즉 저작물을 사용한다는 거다.
인용의 편리, 유리한 점은 여럿이다. 일단 쓰거나 말하고 싶은 그 무엇에 대해 쓰기 위해 들어가는 고민이 줄어든다. 고민을 다르게 적으면 노력이 될 텐데, 어떻게 풀어내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노력에 필요한 에너지를 다른 데에 쓸 수도 있게 된다. 이것이 큰 이점이다. 비슷하게 큰 이점은 타인을 설득하거나 책임을 피해야 하는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필요한 노력이 줄어든다는 거다. 유명한 사람 누구, 어떤 분야의 권위자 누구의 말이나 글을 인용한다면 비전문가이자 비전공자 혹은 유명하지 않은, 그러니까 저명함과는 거리가 먼 일반인인 내가 생각해 낸 말이나 글보다 더 설득력을 갖기 쉽다는 거다. 이걸 다르게 표현하면 '영향력'이라 하겠는데, 무명인이면서 일반인인 나의 영향력은 미미하나, 저명한 인사의 말은 우리가 흔히 보듯 흐름을 바꾸기도 한다. 그 정도의 차이가 있다.
또한 내가 글에 적은 표현이나 문장이 잘못된 것으로 밝혀졌을 때, 도망칠 수 있는 확실한 여지가 생긴다는 점은 에어백이나 다름없는 최후의 보루. '그거 내가 한 말 아니고, 그 유명인이 한 말이야.' 이거면 보통의 경우라면 심각하더라도 어떻게든 사과 정도로 무마할 수 있게 된다.
인용을 익히고 난 후 한참을 편하게 쓸 수 있었다. 들어가는 수고라면 무언가를 읽거나 들었을 때 쓸만하다 싶은 말을 기억하거나 기록하는 정도였고, 기억하기 어렵더라도 단서만 남겨두면 검색이나 찾아보는 게 가능한 정도면 충분했다. 적재적소에 잘 쓰는 능력 또한 대단한 것이다. 특히 평론가들의 글을 볼 때면 느끼는 건데, 왜 평론이라는 장르가 있는지 알 수 있을 만큼 독보적으로, 유려하게, 정말 자연스럽고 설득력 있게 쓰는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거다.
아마도 그래서였을텐데, 어느 시점부터는 인용을 하기 싫어지기 시작했다. 지금 얼른 떠오르는 이유가 두세 가지 있는데 첫째가 '권위' 때문이다. 글을 쓰는 사람의 무모한 승부욕이라고 해도 좋을 텐데, 권위 있는 누군가가 이미 상투적으로 쓸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걸 손쉽게 쓰는 데 더는 익숙해지고 싶지 않았다. 나부터가 권위에 지고 싶지 않았다는 얘기다.
둘째는 아무 의식 없이 가져다 쓰는 그 문장들이 사실은 누군가의 '저작물'이라는 걸 인지했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책의 본문을 베껴 글에 넣기도 했다. 이게 얼마나 무모하고 무식한 일인지 깨달은 게 몇 년 되지 않는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자신이 저작자가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어야 하며 동시에 자신이 저작권자라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저작물에 타인의 글이 들어가는 순간 저작권 사용이 시작된다는 것도 인식해야만 한다.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 생각이 없다면 신경 쓰지 않아도 좋다. 하지만 우리는 글을 쓰기로 한 사람이면서, 글을 쓰며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이기에 염두에 둬야 하는 거다.
셋째는 더 낫지는 않아도 내 생각을 표현해내는 나의 문장을 발견하고 싶기 때문이다. 정말 오래 생각하고 보니 이미 누군가가 쓴 말이더라는 것과 처음부터 그 말을 가져다 쓴 것은 단지 순서만 다른 정도의 가벼운 문제가 아니다. 그 순간의 발견, 깨달음이 우리를 계속 쓸 수 있게 돕는 동력이 된다.
인용을 아예 하지 않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여전히 부족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고민하는 과정을 거쳐 닿은 문장은 더 깊이 있는 울림과 의미를 품기 마련이다. 거기에 담은 의미, 내포된 진의를 읽는 이가 얼마나 알고 이해하게 돕는가는 숙달의 영역에 있다고 보고 하는 얘기다.
쉬운 글쓰기를 가르치는 사람들을 여럿 봤다. 일주일이면 책을 쓸 수 있다고, 일 년에 몇 권의 책을 쓴다고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건 우리가 쓰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잊어서는 안 된다는 거다. 만약 많은 책을 펴내는 게 목적이라면 저작권자들에게 동의를 구하고 적재적소에 담아내는 과정과 수고를 거칠 수도 있다.
한 번은 내 진심에 가장 가까운 이야기를 써보고 싶다면, 그 이야기들을 한 권의 책이든 여러 권의 책이든지에 담고자 한다면 염두에 뒀으면 한다. 정말 내 생각을 표현해 줄 한 문장을 위해 고민하는 시간을 보내는 경험. 그 경험 속에서 만나게 될 문장들이 안겨 줄 순수한 기쁨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인용을 금하노니, 자기 생각을 적어보자.
가끔 그래도 좋겠다. 그렇게 나아갔으면 좋겠다.
- 본문 제목은 정은문고 도서 <결혼을 허하노니 마오쩌둥을 외워라>를 응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