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일기를 써봅니다.
오랜만이다.
고작 화면 속 자판을 마주하고, 지금처럼 마음을 지나는 글자를 몇 개쯤 건져 널어놓는 일이. 한때는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고 수월했던 일을 왜 그렇게 힘들게 느껴왔을까. 망설이고 머뭇거리다 쓰지 못하는 시간을 보내고 그 시간이 길어지더니 어느 때부터는 고작 몇 글자, 몇 단어를 메모하는 일조차 힘겨워서 그만둬버렸다. 그렇게 오늘에 이르렀다.
힘들었다는 말을 고쳐야겠다. 힘들었다는 말보다는 생각하지 않게 됐다는 말이 더 무난하다. 아니다. 그보다는 생각이 없어졌다고 해야겠다. '힘들었다'는 그저 감정을 풀어내는 말 같고, '생각하지 않게 됐다'는 어쩐지 생각하지 않으려는 의지나 노력이 담겼을 것 같으니까. 그저, 어느 순간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생각이 없어'져 있었다. 이렇게 적는 게 더 옳겠다. 같은 시간을 다른 데 쓰는 일에 익숙해져 버렸다. 그건 마치 바다에 사는 물고기가 민물 속에서 숨 쉬는 것처럼 불편하지만 죽을 정도로 고통스럽지는 않은 상태다. 살아남아서 적응하게 되는 건지, 적응해서 살아남게 되는 건지, 그런 문제가 더는 중요하지 않은 나날들. 그런 날들이, 달들이, 세월이 지나갔다.
"무엇이 중요한가?"
물음을 던질 뿐, 답할 힘은 아직 채워지지 않았다.
그런 내가 일기를 쓴다. 정말 새삼스럽게, 진지하게, 감정적으로. 오래전부터 뭔가를 끄적여온 습관 덕에 뭘 쓰는데 계기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으로 몇 년을 살았다. 앞서 적었듯 숨 쉬듯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생각을 그저, 늘 쓰는데 무슨 특별한 계기가 필요할까.
사람은 변한다더니. 오늘의 일기에는 특별한 계기가 있다. 다르게 적으면 지금의 나는 뭔가를 쓰기 위해 계기가, 동기가, 큰 의미 혹은 결심이 필요해진 상태라는 거다. 심장제세동기, 심폐소생술 같은 응급처치 단계가 떠오르는.
나쁜 습관만 남아서 이렇게 자꾸 말을 돌린다. 자꾸 말이 겉돈다. 일기니까 이해하시오.
<일기시대>라는 책이 있다. 책방을 운영하면서도 한국 문학, 시에 무지한 편이라 이 책의 저자가 시인인 줄도 모르고 있었다. <책기둥>이라는 시집이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이라는 것도 몰랐다. <불안해서 오늘도 버렸습니다>라는 에세이도 이번 주에야 알았다. 시, 소설, 산문을 두루 쓰는 시인. 처음 떠올린 생각은 '천잰가?'다. 시, 소설, 평론을 다 쓰는 작가들은 천재라고 하는데, 비슷한 맥락에서다.
젊은 시인, 젊은 작가, 손편지를 독자들에게 보내는 일로 생활하는, 등단 이후 최단기간 김수영 문학상을 수상한. 많은 수식어가 붙는 시인이지만 무지한 내겐 그저 쓰는 사람으로 다가오는.
그 시인이 독자를 만나러 가가책방에 오는 날을 준비하며 몇 권을 책을 오가며 읽은 글이 계기가 되어 지금 이렇게 일기를 쓰고 있다는 얘기를 한다는 게 이렇게 길어졌다.
우습게도 두서가 없을까 봐 염려하고 있었다. 몇 번인가 쓰다 그만둔 이유도 마음에 들지 않는데 끝까지 쓸 수는 없을 것 같아서 별 것 아니니 포기하자는 도피 심리였다. 마치 공기에서 도망치는 육상 생물처럼. 죽어가면서 살아가는 데 무감각해지는. 막 떠오르는 생각을 적는데 두서가 있는 게 더 이상한 일인데, 무슨 대작가라고 그런 걸 핑계 삼았을까.
시인을 만나기 전에 다 읽어보겠다고 야심 차게 네 권이나 준비해놓고 시 몇 편, 산문 몇을 읽고 났더니 이제 와서 다 읽기는 힘들겠다는 생각에 대신 일기를 쓴다. 이 마음이 계기다. 일기를 쓰는, 한 때 숨 쉬듯 썼던, 이제 재활하듯 다시 쓰려는 한 사람이, 시인을 기다린다. 충분하지는 않지만 아주 부끄럽지는 않은 상태가 됐다.
지난 6월 가가책방이 만 3년을 맞이했을 즈음 쓰다만 글 일부를 가져와 본다.
오랜만에 쓴다.
지난 6월 9일.
가가책방이 만 3년을 맞았다.
동네책방이, 그것도 소도시에 자리 잡은 작은 책방이 3년을 채우다.
그러고도 여전히 계속 자리를 지킬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기대나 소원이 아닌 확신이라는 데 안도한다.
안도하다니.
기묘한 이야기지만 진심으로 안도하는 나와 마주한다.
오랜만에 쓴다를 두 달쯤 전에 적어버려서 이번 글의 시작이 오랜만이다가 됐다는 건 별로 안 궁금한 이야기겠지. 둘을 같은 글에 넣었더니 스스로 우스워져서 굳이 덧붙인다.
많은 아쉬움들이 있다. 멀리서 오는 시인님과 작가님에게 미안함도 있다. 더 많은 독자를 만날 수 있는 자리라면 어땠을까.
쓰는 사람이 많지 않은 것처럼, 읽는 사람도 적다. 만나는 사람은 그중 다시 일부.
그 안에 우리들이 있었다. 내일은 그런 날. 어라, 쓰다 보니 오늘은 그런 날. 오늘이 그날.
미리 인사해두자.
반갑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