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文)을 되찾으러.
말을 잃는 순간들이 있다.
할 말이 있지만 삼키고, 하고 싶지만 참는 그런 노력의 결과 찾아오는 순간이 아니라 말이 되어 나오지 않는 순간이. 생각은 뇌리를 끊임없이 두드려 울리지만 그것이 소리가 되지는 못한다. 간신히 단어를 떠올리고 발음하려고 해도 그 발음이 한 번에 되지 않아서 말을 더듬게 되는 순간도 있다. 종종 마을 투어 중에 그런 일이 벌어지기도 하는데 그 짧은 순간이 몹시 괴롭고 고통스럽게 새겨져서 한참을 곱씹고 되뇌는 날도 있다.
처음 몇 번은 그러려니, 그럴 수 있겠거니 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넘겼지만 한 주, 한 달. 그렇게 몇 달을 지내며 점점 그런 순간이 잦아지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되면서 이제는 제법 성가신 문제로 자라 버렸다.
"왜 자꾸만 말을 잃는 건가."
이제야 스스로에게 묻고 비로소 답해 본다.
일단 원인을 늘어놓아야 할 테니 분석적으로 사고해 보자.
첫째로 떠오르는 원인은 심리의 문제다. 확실히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어떤 요인 혹은 요인들이 어느 순간 심리적인 장애물 수준까지 커질 때 일어나는 현상 중 하나일 가능성을 상정하는 거다.
둘째는 물리적인 요인이다. 습관이나 생활 방식의 변화, 혹은 시간을 들이는 영역이 물리적으로 변화함으로써 말을 구사하는 표현력, 발화력(발화력이란 단어는 국어사전에 없는 영어식 표현이라 말하는 능력이라고 순화하는 게 좋지 않은가 했으나 표기의 편의를 위해 적음), 어휘력 등이 감소한 결과 말을 잃는 순간이 생길 수 있음을 염두에 두는 거다.
셋째는 사고 영역의 문제다. 사고하는 힘, 생각하는 힘이란 몸을 쓰는 일과 다르지 않아서 자꾸 쓰는 연습을 하지 않으면 둔해지기 마련이다. 고심하고, 깊이 사고하고, 연결하고, 결론을 내는 일이 드물어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예전에 말하는 방식,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순간순간 흐름이 끊긴 결과가 아닐까 의문을 품어보는 거다.
넷째는 말과 크게 상관없을 것 같은 영역, 쓰기를 그만둔 것이나 다름없이 지낸 생활의 문제다. 둘째에 포함될 수도 있겠지만 예전부터 말하듯 머릿속에 떠오르는 문장을 글로 옮기는 게 쓰기의 주된 방식이었기에 특별히 큰 영향을 받았을 것만 같은 부분이라 따로 떼어냈다.
원인을 더 분석할 수도 있지만 지금의 나는 자꾸 말을 잃는 경향이 있으므로 여기서 합리적 사고로 전환해 보자.
합리적이라는 건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않는다. 한때는 합리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이 나쁜 방식을 선택할 리 없다고 믿었지만 살아가며 경험해보니 합리적인 사고는 개인 혹은 집단이 생각하는 최선의 결과, 최상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많은 걸 포기할 수 있는 방식이었다. 정의롭지 않은 합리적 사고, 선하지 않은 합리적 사고를 흔히 목격할 수 있는 것처럼.
이번 합리적 사고는 갈등을 최소화하고, 요인을 외부에서 찾지 않는 걸 목표로 하려고 한다. 그러므로 첫째, 심리의 문제는 제외하자. 간단하게나마 이유를 적자면 흔히 스스로의 문제, 자신이 다르게 마음먹으면 변할 부분이라고 믿는 심리적 요인은 오히려 환경과 밀접해서 심리적 요인을 파고들다 보면 나 자신의 문제보다 주변 사람과 환경의 문제에 더 사로잡혀 연연하기 마련인 게 인지상정이기 때문이다. '그건 내 탓이 아니다'라는 유혹이 너무 커서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지 않는 방어 기제로 작동하기 쉬운 게 심리라는 생각 때문에 제외하려는 거다. 다르게 말하면 절망적이라거나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는 건 아니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건 내 탓이 아니다'라는 생각으로 잠시 피신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마음이 지쳤다면 주변 환경과 사람을 탓하면서 스스로를 조금 더 숨쉬기 좋은 자리까지 끌어올리는 일도 분명 필요하니까.
합리적으로 사고한 결과를 내놓자면 둘째, 셋째, 넷째 모두 지금의 말을 잃는 현상을 만드는 데 비슷한 비중의 책임이 있다. 비슷한 책임이 있다는 건 과정이고 그래서 내린 결론은 합리적으로 사고했을 때 가장 개선하기 쉬운, 조금이라도 개선했을 때 그 효과가 큰 일을 실행하는 거다.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알아차렸을 수도 있겠다. 네 번째 요인을 먼저 개선하기로 하고, 그 효과를 기대하며 합리적 사고의 결과로 나온 합리적 실천 방법 첫 번째로 다시 쓰기를 시작한 게 지금 적는 이 글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글을 쓰면서 오랜만에 머릿속에서 홀로 스스로와 대화하는 시간을 갖는다. 목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소리 내어 말할 때보다 훨씬 느린 속도로 스스로의 뇌리에 충분히 울릴 수 있을 만큼의 여유를 두고 한 단어, 한 문장을 이어 적고 있다. 오래 움직이지 않은 근육이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듯 생각의 속도도 글이 나아가는 속도도 조금은 답답하게 느낄 만큼 느리다. 그러나 합리적으로 사고해보면 조바심이 지금의 어려움을 개선하는데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이므로 배제하기 위해 애써본다.
사실 오늘 이 글을 쓰기 전까지 글감으로 모았던 단어들은 이런 거였다.
비판적 사고, 감성적 사고, 이성적 사고, 합리적 사고, 부정적 사고, 긍정적 사고 같은.
흔히 비판적으로 사고하는 사람은 부정적이라고 오해받는다. 논리적 사고나 이성적 사고는 합리적 사고와 유사하다며 긍정적으로 보면서 비판에는 부정적 시선을 보내는 건 이상한 일이다. 논리와 이성을 거쳤기에 비판이 가능해지는 것인데 비판을 위한 비판의 사례를 가져다가 비판은 나쁜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을 볼 때면 가슴 깊은 곳에서 갑갑함이 차오름을 느낀다. 뭉뚱그리자면 다 제 각각의 순간에 필요한 사고방식 들이다. 한 가지는 옳고, 한 가지는 틀린 그런 이분법이 사고의 방식에는 적용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공감의 문제와 해결의 문제를 나누고 싶다고 생각한다. 공감하고 이해하는 것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너무 많다고 생각하는데 자꾸 나쁜 사람이 되는 게 싫다. 꿋꿋하다고 해서 타격이 없는 건 아니다. 그래서 돌아봐야 했다. 돌아보고 회복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쓰는 시간이란 생각하는 시간과 더불어 언제나 나를 회복으로 나아가게 했으니까.
감성적으로 사고해야 하는 상황은 늘 어렵다. 특히 그 상황이 감정적 사고와 혼동하는 상황이어서 어떤 해결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끊임없이 동일한 모습으로 반복될 것이라고 예측되고 실제로 그 예측과 다르지 않은 일이 벌어진다면 더 어려워진다. 노력하지만 늘 노력은 부족하기 마련이고 부족한 노력은 없는 것과 다르지 않은 것이 되기 쉬운 게 감정적 사고의 현장이 다툼의 장이 되고 마는 이유이기에. 감성적으로 사고하면서 감정적으로 사고하지 않으며 일체의 판단이나 거부 없이 그 순간을 수용하는 일은 너무 어렵다. 그래, 나는 이런 말놀이가 그리웠다.
감정적 사고는 옳고 그름의 판단을 거부한다. 설득이나 이해의 요청도 거부당한다. 비판은 절대 해서는 안 되는 금기고 유일한 해결 방법은 수용하며 기다리는 거다. 사실 감정적 사고는 사고가 아니라 그냥 감정이다. 그래서 다만 받아들여야 하는 거다. 이렇게 글로 써보면 납득이 가는데, 실제로 갈등 상황에서는 그게 잘 안 된다.
얼마 전 주차 문제로 다툰 일이 있다. 다투려던 의도였다기보다 그 운전자의 주차 행태가 얼마나 비상식적인지 인지시키고자 했던 의도였지만 상대방은 왜 그렇게 감정적이냐며 그래서야 자기가 더 화가 난다며 오히려 손가락질을 당했던 사건이다. 음, 그 상황에 불을 부은 그 운전자의 민원인은 이렇게 말했다. "여자라서 무시하는 거냐."라고. 비상식적인 주차를 두고 잘못된 상황임을 인지시키고자 이야기를 하는데 '여자라서 그러냐'는 말이 나왔을 때 그 의외성에 순간 말을 잃고 말았다. 도저히 그를 이해시킬 자신이 없었다. 뒤이은 말에는 사실 허탈함과 좌절감도 느꼈는데 무슨 말이었는가 하면 "그래서, 지금 피해를 본 사람이 있느냐? 문제가 없는데 왜 문제라며 사람을 비난하느냐"는 말이었다. 비상식적인 주차 차량이 없었다면 그 자리를 통과해서 빠져나갔을 주차장이지만 비상식적인 주차 차량을 만나 그 운전자를 보고 그 상황의 비상식적임을 인지시킨 후 최초에 진행하고자 했던 방향으로 나아가기 전에 후속 차량의 진입을 염두에 두고 주차할 의도가 없었으나 마침 비어있던 주차 공간에 차를 세우고 비상식적인 운전자를 기다리다 언쟁이 된 이후의 상황에서 그 남자는 아무런 문제도 없는데 왜 그러느냐고 이야기했던 거다. 그랬다. 그 말을 하는 남자와 비상식적으로 차를 세우고 민원을 해결하러 간 운전자가 없었다면 아무 문제도 없을 상황이 그들로 인해 문제가 된 이후의 상황임에도 그는 그 상황이 문제없다고 하고 있던 거다. '여자라서 그러느냐'는 소위 갈라 치기 발언도 문제, 충분히 차량이 지나갈 수 있을 만큼의 공간을 두고 주차할 수 있음에도 통로 한가운데 주차한 후 차량의 시동을 끄고 비상등을 켜는 일조차 없이 문을 잠그고 민원을 해결하러 갔으나 남겨져 있던 전화번호마저 회사 대표번호 1588-이었던 차량의 운전자에게 이 상황이 문제 있음을 이야기하는 게 문제인 그런 상황이 있었다.
그 상황이 문제가 되지 않는 방법도 있었다. 감정적 사고에 공감하면 될 일이었다. 급한 마음과 주차 공간이 없던 상황을 완전히 예상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인 후 조용히 후진해서 볼 일을 보러 갔다면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비상식적인 주차를 실행할 수 있는 사람이 꼭 여기에서만 그렇게 주차를 할까? 합리적으로 충분히 의심해볼 만한 정황이다. 비록 당시 응급한 상황이 아니었고 급박하게 이동해야 할 사건이 있던 건 아니지만 다른 날, 다른 자리에서 응급한 상황에 비슷한 일이 벌어진다면 그때 일어나는 문제의 피해는 누구 몫이 될까. 그런 상황이 떠올랐기에 그날, 그 자리에서 화를 내지 않을 수 없었던 거라고 이제는 말할 수 있다.
감정과 직관도 존중받아야 한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의 문제, 상황일 때 우선되는 일이고 그 외 상황에서는 개인의 감정이나 직관보다 조금은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사고할 필요성이 있다고 느낀다. 그것이 쉽거나 어렵거나 관계없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거다. 앞으로 어느 날에 오늘처럼 구구절절한 사연을 늘어놓는 글을 쓰게 될지 모르지만, 그런 날이 부디 아주 드물었으면 좋겠다.
조금은 개운한 기분이다. 그런 기억들이 알게 모르게 말문을 막고 있었던 것처럼.
우선은 글을 되찾고, 읽는 시간을 되돌리고, 그 후에야 조금 더 생각하며 다듬어진 이야기를 시작해야겠다. 당분간은 처음 글을 쓰는 사람처럼 어지럽고, 어수선할 거라고. 미리 그 말을 해두고 싶었다.
그런 시간이 필요한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