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랍게도 책 읽기는 계획이 아니라 생활에서 시작해야 계속된다.
책방을 하면서 더 자주 듣게 된 질문이면서 대답하기 참 어려운 질문이 있다.
"요즘엔 무슨 책 읽으세요?"
언뜻 생각하면 그야말로 요즘 읽고 있는 책 제목을 부르면 될 것 같지만 '책방을 하는 사람'이라는 자각 탓인지 뭔가 한 권이나 두 권이 아니라 좀 더 여러 권을, 추천할만하다거나 어떤 요소가 재밌다거나 하는 얘기 혹은 지점을 굳이 더해서 답해야 할 것 같은 생각에 '요즘 예전보다 부쩍 책을 덜 읽는 나'의 모습에 자격지심을 느끼게 되기 때문에 어려워지는 거다.
해도 스트레스, 안 해도 스트레스라면 안 하는 쪽을 택하는 사람으로서 읽어도 스트레스, 안 읽어도 스트레스라면 안 읽는 걸 택하면 될 텐데 그게 잘 안 되는 건 도무지 어쩔 수가 없다. 그래서 변명을 섞어 되도록 솔직하게 요즘 별로 책을 많이 읽고 있지 않으며, 눈에 띄거나 머릿속에 떠오르는 예전에 읽었거나 읽다 말았던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는 식의 답을 내놓고는 한다.
책방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보통의 사람들보다 책 욕심(읽기와 소유하기 모두에서)이 더 많은 게 보통이고 그렇기에 더 많이 읽고 더 자주 읽겠지만 그보다 더 많이 읽는 사람도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고, 책방의 운영 방식이나 철학에 따라 그 분야와 숫자도 큰 차이를 보인다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다.
보통의 회사원일 때 더 규칙적으로 일관되게 시간을 낼 수 있었고 그 시간을 활용해 적게는 백여 권에서 많게는 삼백 권 이상도 읽었기에 지금 읽어내는 책의 권수, 분량은 비교하자면 터무니없이 줄어든 게 맞다. 머리를 좀 덜 써서 그런지 기억력도 나빠지고 사고의 방향성이나 체계에도 답답한 구석이 늘었다. 이게 단순히 책을 덜 읽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덜 집착하고 더 나태하게 생각하는 삶의 태도 변화 때문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분명 그런 변화들이 있는 건 사실이다. 그래서 나 역시 매년 올해는 조금 더 읽어보자, 이런 분야도 도전해 보자 하며 다짐을 한다.
책방을 하면서 보통의 사람들처럼 지난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을 때면 책 읽기를 다짐하는 한 사람으로서 쓴다.
놀랍게도 책 읽기는 계획에서 시작하지 않는다. 책 읽기를 계획한다고 책이 생겨나지 않을뿐더러 읽고 싶은 책이 손에 잡히지도 않는다. 계획이란 실현되기 전까지는 뜬구름이라고 봐야 한다. '읽어야지'하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어떤 읽기도 시작되지 않고, 시작되지 않으면 읽기는 가까워지지 않는다. 가까운 건 당연히 생활이 될 수 없고, 다시 한 해가 저물 무렵에 지난해를 닮은 결심과 계획을 세우게 되는 거다. 그러나 계획을 세웠다는 건 대단히 고무적인 일이라는 얘기도 하고 싶다. 보통의 더 많은 사람들은 계획을 세우거나 결심을 하는 지점까지도 이르지 못한다. 읽는 삶이 마음 한 구석에 뜬구름 같은 부피조차 차지하지 못하는 거다. 그러면서 몹시 바쁘게, 부산하게 세월을 보낸다.
그럼 읽기는 어디서 시작될까. 부제에 적은 것처럼 읽기는 생활에서 시작된다. 망중한(忙中閑)은 제법 익숙한 단어겠지만 그 실천은 만만하지 않다. 책 읽기를 생활의 일부로 만드는 게 그만큼 어렵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면 생활에 잠깐씩이나마 끼워넣기 시작해서 일단 익숙해지기만 하면 크게 노력하거나 애쓰지 않아도 읽기에 마음이 실리게 되고 그 양이(읽는 양, 권수) 많지 않더라도 계속할 수 있게 된다. 그렇게 시작해서 자연스럽게 세월을 보내면서 읽는 사람이 되어 가는 거다.
너무 당연해서 허탈할 수 있지만, 거의 모든 유효한 조언들을 보자. 그 조언들 대부분은 이미 여러분이 알고 있는 사실일 테고 알지만 여러 이유로 '아직 실행하지 못하고 있는 사소한' 무엇일 가능성이 크다. 그래도 이렇게 끝내면 서운할 테니 조금 다른 얘기를 이어서 해보자.
당신은 주로 무엇을 읽고자 계획을 세우고 결심하는가.
경제서, 재테크, 트렌드, 사람 사는 얘기, 세상 돌아가는 얘기, 허무맹랑한 얘기, 허구의 덩어리.
사람마다 다를 거다. 그러나 그 읽고자 하는 것이 '책'이라면 어떤 형태로든 손에 책을 쥐어야 시작할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적은 것처럼 손에 쥐기까지 많은 계획과 다짐과 결심과 수고가 요구되기에 그게 간단하지가 않다. 그래서 아주 간단한 방법 하나를 제안해 본다.
이제는 제법 잘 알려진 개념으로 '사람책'이라는 게 있다. 들어봤는지. 들어봤거나 들어보지 않았거나 크게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다. 이른바 사람, 자신과 타인을 포괄하는 사람을 일종의 읽고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는 텍스트로 받아들이는 거다. 예나 지금이나 "내 얘기를 소설로 쓰면 장편 소설 몇 권은 그냥 나온다."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 데서 시작하면 이해가 수월해진다. 말 그대로 여러분이 만나고 스쳐 지나는 사람들 모두를 하나의 책 혹은 이어지는 이야기로 여기는 거다. 그래서 사람책을 왜 언급했는가?
아직 손에 책을 쥐지 않았더라도 당신은 당신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하나의 이야기 혹은 영감, 질문, 이해 혹은 이해 불가능, 때로는 불가사의로 보고 되뇌고 궁금해하고 이해하려거나 무시하는 걸 택할 수 있다. 읽기란 애초에 시각으로 문자를 입력시켜 머릿속에 들인 후 분석 혹은 해석, 종합 등의 과정을 거쳐 어떤 이해나 공감에 이르는 행위다. 문제를 풀거나 정보를 얻는 것도 읽기의 큰 비중을 차지하는데 문제 풀이는 유형이나 상황이 달라질 뿐 평생 우리가 해나가야 하는 활동임을 부정할 수 없고, 그 문제를 푸는데 더 유효하고 적절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창구를 다양화하면 해결에 도움을 받는다. 물리적, 물질적, 관계, 감정, 지식 모든 걸 문제의 관점에서 보면 해결하거나 해소하는데 읽기가 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거다.
장황하게 얘기했지만 읽기를 생활로 가져오면 의외로 쉽게 시작할 수 있는 더 강한 계기가 된다는 이야기다. 계획에 그치고 마는 가장 큰 이유는 익숙하지 않아서다. 적어도 읽기는 그렇다. 호기심이나 욕구가 낯섦을 극복할 만큼 크지 않거나 함께 하는 사람이 없을 때는 동기부여가 더 어렵다. 쓰지 않던 근육을 쓰면 어색하고 금세 효과가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읽기도 그렇다.
이번에 제안하고 싶은 읽기의 첫 단계는 적어도 대화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천천히 귀 기울여 들어보는 것이다. 물건을 사고파는 순간의 대화도 좋고, 친구들이나 가족과의 이야기도 좋다. 무슨 의도로 하는 이야기인지, 어떤 상황인지,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건지 일정에 쫓겨 마음이 바쁜 그 순간에 아주 잠시 시간을 내어보는 거다. 상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정도의 노력이라면 두툼하고 무거워서 집어 들거나 첫 페이지를 넘기기 어려운 책도 충분히 넘길 수 있게 될 것이다. 호기심이 없다면 책은 가까이하기 어려운 물건이 된다. 아무리 시간이 남아돌아도 심심하고 한가해서 책을 읽게 될 정도로 세상이 읽기에 호락호락하지가 않다는 건 이미 잘 알고 있으리라.
사람에게 관심이 없다. 대화하는 상대방의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다. 그들의 마음, 생각을 이해하고 싶지 않다면 굳이 책을 읽으려고 계획하지 않아도 될 시대다. 더 재밌는 것이 얼마든지 있고, 시간을 보내는 게 목적이라면 더욱더 그렇다.
사람에게는 저마다 때와 적성이 있다고 한다. 요즘에는 이런 말들이 고리타분한 옛날 얘기처럼 취급되기도 하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다가 어느 순간에 갑작스럽게 수월해지는 경험이 있었을 거다. 그게 때다. 적성은 접근법이다. 우직하게 노력하면 할 수 있게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혼자서는 도무지 할 수 없는 사람도 있다. 읽기 수월한 책이 있는가 하면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는 책과 마음이 가지 않는 책도 있다. 적성을 아는 게 필요한 건 잘할 수 있는 걸 더 잘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하고 싶은데 잘 되지 않는 것에 접근할 때 자신에게 더 맞는 방식으로 조금 더 수월하게 해내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그래서라도 다른 사람과의 대화에 귀 기울이는 건 필요하다. 묻고 듣고 답한다. 읽기는 소리 없는 물음, 울림 없는 들음, 말 없는 답을 듣는 일이다. 새해를 맞아 책 읽기를 계획했지만 시작하기 어려운 이들에게 작고 사소하더라도 계기가 되는 대화들이 찾아가길 소망한다.
사람과 세상이 궁금하지 않은데, 대체 읽기가 무슨 소용인가.(이것은 무슨 옛 성현이나 할 법한 소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