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처럼 앞으로도.
사람은 언제 실수를 하게 될까.
때마다 날마다 답이 달라질 수 있겠지만 요즘 떠올리곤 하는 대답은 "자신이 옳다고 믿을 때"다. 정치인을 봐도 기업인을 봐도 나의 가장 가까운 사람과 지인들을 봐도 무엇보다 나 스스로를 돌아봤을 때 그렇다. 특히 큰 실수들이 "내가 옳다"는 생각에서 시작되곤 했다. 자신이 옳다고 믿고 확신하기에 타인에게 되물을 수 있게 된다.
"너는 왜 그러니?"
보통 내 마음속에는 질책이 가득하게 차올라 있는데 그런 마음 상태가 이상하다고 느낀 건 최근이다. 조금 정확하게는 질책하는 마음이 그렇게 오랜 시간, 크게 자리 잡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게 최근이랄까. 내 마음이니까 가장 잘 알고 있다는 믿음이 마음을 바로 알지 못하게 한 거라고 생각한다. 자신을 가장 잘 안다, 나는 내가 잘 조절할 수 있다는 자기 확신 종류의 믿음들. 그런 믿음들을 되짚어 보고 있다.
브런치 작가 10년을 1년 앞두게 됐다. 누적뷰 70만을 기념해 예전에 쓴 글을 보고 알았다. 정확히는 8년 3개월째인데 숫자에 의미가 있다기보다 요즘 하는 '사람은 자신이 옳다고 믿을 때 실수를 한다'는 생각과 맞닿는 게 있어 기록해두려고 한다.
새삼 돌아보려고 해도 이제는 기억이 희미해서 잘 안 되는데 초반 30만 정도는 쉽고 빠르게 채워졌던 듯하다. 50만도 그렇게 어렵지 않았던 듯한데 아마 그 이후에 시쳇말로 현타(현자 타임, 깨달음)가 왔다. 브런치의 시스템에 의구심을 갖고 어떤 방식으로 진행되는지 모를 운영에 반감을 느끼며 2년 가까운 시간을 겉돌았다. 가장 큰 건 좀처럼 오르지 않는 조회수와 차가운 반응이었다. 뭐가 그렇게 대단하다고 믿었는지 그때는 '이런 글을 썼는데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다?'며 분노하곤 했다. 브런치의 문제를 지적하고 이렇게 하면 안 되느니 저렇게 해야 한다느니 조언으로 위장한 불만을 적기도 했다. 사람으로 보면 사춘기였달까. 대단한 일을 해냈음에도 세상이 나를 주목하지 않고 오히려 하찮고 시답잖은 글에 주목하고 열광하는 게 배 아팠던 시기.
그럼에도 사람이 대단한 건 성장한다는 거다. 실수를 하면서 자라고, 실수라는 걸 인정하고 변하려 노력하면서 달라진다. 아직 내게 달라진 건 없지만 일단 깨닫는 단계에 들어왔다는 것으로 조금 안도하는 중이다.
그렇게 질풍노도 같던 분노의 시기를 보내고 브런치에 돌아왔을 때, 브런치는 아무 일 없이 자신의 세계를 확장해 나가며 출판사와 작가를 연결하고 새로운 작가와 글을 발굴하고 있었다. 브런치라는 플랫폼은 그렇게 돌아간다. 늘 새로운 사람, 생각을 원하는 동시에 남아서 꾸준히 자신의 생각과 이야기를 들려줄 사람들도 필요로 하는 거다. 나의 베스트 프렌드가 새로운 친구를 알게 되면서 가까워지는 모습에 질투라는 감정, 배신감을 느끼다 어느 순간 동화되며 친한 친구를 더 얻게 되는 원리와 비슷하달까. 처음부터 나라는 브런치 유저는 브런치 운영자나 플랫폼의 운영 의도에 완전히 부합하지는 않았을 거다. 자신이 쓰고 싶은 걸 쓰고 그에 반응하는 사람들에만 관심을 갖는 작가. 그보다는 다른 작가와 교류하기도 하고 연결을 다독이며 확장되기를 기대하지 않았을까.
처음에는 그랬으나 지금은 조금 달라진 게 아닐까. 지금은 최소한의 저변을 확보했기에 꾸준히 유지하며 자기 세계를 구축하는 작가의 비중도 커진 게 아닐까 한다. 확실한 근거는 아니지만 작은 반증으로 이전 콘텐츠가 꾸준히 독자와 만나고 유입되는 비율도 브런치 자체의 비중이 커졌다는 점이 있다. 3년, 5년, 브런치 초기에 썼던 글들이 지금도 묻히지 않고 독자와 만난다는 건 글을 쓴 이에게는 큰 의미가 된다.
10년 차인 2024년이 되기 전에 조금 더 발전적인 일을 벌이려고 계획하는 이유도 그 의미에 있다. 무슨 일이든 10년을 지속하기는 어렵다. 의욕이 클수록, 초반에 폭발적인 반응을 경험했을수록 계속해야 하는 의미를 찾기가 어려워진다. 누가 그 의미를 찾아서 안겨주지 않기에 더 힘든 거다.
처음에 '문제'라고 느끼기 시작했을 때 나는 그 문제가 '나' 혹은 '대상'에 있다고 믿었다. 그게 문제인지 아닌지, 문제라면 어떤 성격의 문제이고 그 문제를 풀기 위해 어떤 방법을 사용해야 하는지, 지금 방법이 없다면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고민하지 않았다. 다만 앞서 적었듯 '나' 혹은 '대상'을 바꾸면 된다고 확신했고 둘 모두를 바꿀 수 없어 분노하며 뛰쳐나갔다. 문제 해결은 유예됐고 다행히 그 기간 동안에도 드물게나마 꾸준히 글을 썼기에 돌아올 수 있었다. 어디에 쓰는지는 문제가 아니다. 쓰고 싶을 때 편하게 쓸 수 있는 곳이 있으면 활용하면 될 뿐이다.
내 글이 뛰어나고 생각의 관점이 새롭고 내용이 재밌다는 자기 생각이나 믿음은 독자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독자는 우연히 내 글을 만날 가능성이 높고 드물게 공감하거나 새롭다고 느낄 것이다. 나는 내가 쓴 글에 반론이나 이의, 의문을 제기하는 걸 환영하고 즐기는 편이지만 누군가는 그런 걸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 어쩌면 독자는 일종의 배려로 아무런 반응도 안 하고 지나칠 수 있다는 거다. 반응을 드러낸다는 건 상당한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이기에 요즘처럼 신경 쓸 일이 많은 시대라면 더 말해 무엇할까.
종종 쓰는 글이지만 자신의 글에 일희일비하지 않아야 계속 쓸 수 있다. 타인의 관심 혹은 무관심에 실망하거나 분노하지 않아야 자신의 이야기를 계속할 수 있다. 어려운 이야기를 큰 결심하고 겨우 꺼내 적은 이들이라면 더 큰 실의와 마주할 수 있다는 데 공감한다. 그러나 계속 써야 한다. 그래서 계속 써야 한다.
계속한다면 실수는 고쳐진다. 실수를 계속하라는 얘기가 아니라 무엇이 실수였는지 알게 되는 때까지 계속해보자는 얘기다. 그 사이에 조언이나 활용할 수 있는 정보가 주어진다면 더 좋다. 이 시대는 자기 확신, 자신이 옳다는 믿음을 요구하지만(그렇지 않으면 휘둘리기만 할 테니) 너무 당연하게도 그건 아집과는 다르다.
고집하되 고립되지 않아야 한다.
자신을 돌아보고 처음 마음으로 돌아가기를 계속하자.
이 말은 당연하게도 나 스스로에게 되뇌는 말이기도 하다.